개혁된 교회는 원리면에서 설교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선명한 정의를 내립니다. 이 원리는 장로교회도 마찬가지여서 신앙고백문답에 이 내용이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대신앙고백문답 제158문답입니다.
LC 158 문답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 설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충분한 은사를 받고(딤전 3:2, 6; 엡 4:8-11; 호 4:6; 말 2:7; 고후 3:6), 또한 정당하게 인정 받으면서 그 직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렘 14:15; 롬 10:15; 히 15:4; 고전 12:28-29; 딤전 3:10; 4:14; 5:22).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첫째, 충분한 은사를 받았고, 둘째, 정당하게 인정 받았고, 셋째, 직분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속한 교회(교단과 노회)에서 정식으로 인허되고 직분에 부름을 받은 자만이 설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개혁되던 당시 사방에서 나타난 엉터리 설교자 문제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저마다 목사로 자처하며 설교를 하고 나섰는데, 문제는 그들의 성경 실력이 엉망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개혁되는 일에는 당연히 설교자의 정당한 자격 문제가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교회의 공식적인 신앙고백으로까지 자리잡았고, 따라서 교회는 오늘날과 같이 설교자 인허 제도를 엄격하게 실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앙고백문답에 따르면 교회에서 설교권을 취득한 사람만이 공식적으로 설교할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주류는 장로교회인데, 장로교회가 설교에 대한 관점을 이렇게 공식적인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목사가 아닌 사람들에 의한 설교를 용인하고, 심지어는 장려하기까지 하면서, 교회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성경과 교회가 무엇인가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신학생들이 자의적으로 교회를 개척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을 많이 모으기만 하면, 교단과 노회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간의 모든 과정을 묵인하고, 심지어는 장려하기까지 하면서, 최종적으로 자기네 체제의 일원으로 받아줌으로써 그 동안의 모든 오류를 정당화시켜 주는 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일찍부터 설교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확고해 해왔습니다. 더욱이 설교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합법적 설교’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허를 받은 목사의 설교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제2차 스위스 신앙고백의 제1장 4조는 제목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다(th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is the Word of God.)”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정통성에 성립되어 있는 ‘교회’와 ‘목사’와 ‘예배’와 ‘설교’라고 하는 조건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오늘날과 같이 대충 이런저런 형식으로 꾸민 후에 “나는 목사이다!”라고 하는 경우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오늘날과 같이 한국 교회가 타락한 것은 사방에 짝퉁 목사들이 난무하는 데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한 설교는 일상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과는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비록 설교에 가르치는 성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명백한 선포라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선포되는 그 자체만으로도 성립되는 것이고, 사람 편에서 자기 좋은 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설교는 항상 예배 형식 속에서 선포되게끔 되어 있는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교육 행위로 전락시키는 것은 결국 예배 자체를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강의는 설교가 아니고, 설교 또한 강의가 될 수 없습니다.
설교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게 될 때에, 설교를 작성하여 선포하는 목사는 물론이고 그것을 듣는 청중도 진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설교에 대한 정의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예배가 타락할 수밖에 없고, 결국 교회의 정체성도 상실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항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엄중하고도 진지하게 선포되어야 하는 예배 시간에, 성경 사상에 맞지 않는 과장된 예화나 자기 주관적인 신앙 체험을 늘어 놓거나, 심지어 아예 간증으로 대체되는 식으로 인간 중심의 무대가 되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한 때에 청중들 또한 웃고 울고 떠들며, 결국 기독교 풍의 종교쇼 또는 유흥으로 전락하고 마는 현상은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개혁된 교회가 더욱 개혁되어 가기 위해서는 교회적인 어휘에 대한 바른 이해와 바른 사용도 정착되어야 합니다. 가령, 통상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표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좀더 정확하게는 “개혁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것처럼 설교에 대한 이해도 정확해야 합니다. 예배의식에서의 설교가 진정으로 설교다운 설교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외적인 형식을 정당화시키는 내적인 조건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설교가 이야기주의로 전락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설교의 타락은 반드시 교회 전체의 타락으로 귀결됩니다.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게다가 요즈음 들어 교회(Church)라는 말보다 공동체(Community)라는 말이 급부상하고, 찬양과 경배라는 형식에 따른 종교 유흥이 대세가 됨에 따라, 설교의 절대적 가치가 구색 맞추기 차원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교회 타락의 실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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