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7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질문] 거룩하게 하심이 무엇입니까? [대답] 거룩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고(겔 36:27; 빌 2:13; 살후 2:13),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온전히 새사람이 되고(고후 5:17; 엡 4:23-24; 살전 5:23),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됩니다(겔 36:25-27; 롬 6:4, 6, 12-14).

제35문답의 주제는 거룩함, 즉 제34문답에서처럼 양자로 입양된 하나님의 백성인 까닭에 마땅히 힘써야 할 성화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은 우리 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려함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고귀한 죽음으로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 용서되었고 더불어 깨끗케도 되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로 인한 유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칭의입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 죄의 권세로부터도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입니다.  하지만 이 두 요소는 논리적으로는 구분되어도, 경험적으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 사실에 주목하지 않게 되면, 항간에 특별히 구원파의 경우에서 명백히 보듯이 신앙주의라는 데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러한 모습이 제도권 안에서도 적지 않게 나타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겠습니다.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숭천하신 후, 우리의 심령에 죄의 권세를 깨부수는 성신을 선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것에 대해 ‘온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신다’고 했는데, ‘새 사람’이라는 표현은 반대편에 있는 ‘옛 사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죄의 권세에 지배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옛 사람’은 거듭나기 전의 우리를 지배하고 주장하는 죄의 권세로서, 곧 죄의 실체였습니다. 개혁교회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전적부패론’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옛적에 동양 철학계에서 맹자에 의해 성선설이 가르쳤고, 조금 지나서 순자가 그에 반대하여 성악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성경적 입장에서 보자면 단연 성악설이 옳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에 지배되는 존재여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결단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장사로 말미암은 성신께서 우리의 심령에 좌정하시게 되자, 그토록 기고만장하던 죄의 권세는 이제 죽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롬 6:6; 갈 2:20), 그리고 함께 장사되었고(롬 6:4), 그리고 그와 함께 부활했다고 선포합니다(골 3: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그리고 부활되셨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게 됨에 따라, 우리의 삶에서의 죄의 권세와 능력이 벗겨졌고, 반대로 부활 생명으로 표현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능력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제35문답은 로마서 6:1-14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죄스러운 정욕과 욕구까지도 제압해주셨다는 깨닫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성도가 성신에 의해 중생될 때에, 그는 이후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어찌하든지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리려는 소망과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전제했듯이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성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각 개념을 분리할 수 있겠지만, 경험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을 가를 수 있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성화라는 용어는 편의상 사용하는 것이지, 우리가 실제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써 의롭게 되고, 동시에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이지, 칭의의 문제이든 성화의 문제이든 간에, 실제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고, 이때 성화는 칭의의 토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성화는 자신에게 칭의가 일어났다는 데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여 자신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어떤 높은 정도나 고상한 특성을 들어 자신에게 칭의가 일어난 증거로는 삼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영락없이 ‘이행칭으’라고 하는 괴물을 끌어앉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금석은 이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성도로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성화 혹은 거룩함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대단한 업적(성화)를 이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돌리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 앞에서 의외로 말과 행동이 다른 경향이 교계에 팽배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진리를 말로는 수궁하지만, 실제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는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를 내세우고 높이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물어봄으로써 마치게 될 때에 이 문제는 더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화의 선물(거룩해지려는 데 대한 소망)과 칭의의 선물(죄의 용서와 지옥으로부터의 구출에 대한 감사) 이 양면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 증거로는 어떤 것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주일예배순서 2019년 3월 24일 (10:00)
. (09:30 준비) 사도신경송-시편찬송-십계명송
. 송영
. 신앙고백 (다같이)
. 언약선포 (십계명 교독)
. 시편찬송 092편
. 목회기도 (설교자)
. 시편찬송 093편
. 말씀선포 갈 5:1-6
. 말씀설교 성령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 시편찬송 094편
. 주님의 만찬 (매 분기말마다)
. 주기도문 (다같이)
. (예배 이후) 애찬 및 성도의 교제
. (13:00부터) 평강의 예배 (성경학습)
주언교회 -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

  1. 주언교회는 하나님께서 개혁교회의 창시자 존 칼빈과 그의 사상을 계승한 개혁자들을 통해서 세계 최초로 프랑스 개혁교회(1559)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1560)를 출범시키심으로써 교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섭리에 감사드리며 이를 소중히 받듭니다.
  2. 주언교회는 교회개혁이란 동전의 양면의 관계와도 같이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에 성립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첫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한 신앙고백이 보다 더 정확하고 섬세한 '제반 신앙고백들'로 확정되었고 둘째는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하신 바대로 신앙고백을 성경적으로 구현하는 교회질서(정치)가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3. 주언교회는 이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대하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는 신앙고백의 핵심에 깨달았고 동시에 이와 같은 신앙고백은 개혁된 교회의 전통에 따른 성경적 교회질서에 성립될 때에 비로소 '교회의 삼대 표지'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는 각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4. 주언교회는 더더욱 겸손히 고개숙여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신앙학(신학과 신앙)을 계속 깊이 배우고 계승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라고 고백하는 바대로 보편의 교회와 함께 정통 신앙고백교회질서에 성립되는 것을 통하여 교회로서의 온전한 품위를 구현하는 사명을 위하여 한 길로 줄곧 나아갑니다.

성경해석의 원천: 기독교강요

주지의 사실이듯이 칼빈을 빼놓고서는 '참된 교회'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따른다고 외치지만 오히려 칼빈이 그렇게도 배척한 신앙 형태를 자행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도 벌어지고 있다. 진정으로 개혁사상을 계승하려 한다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하고, 그럴 경우 성경 해석과 선포를 보다 풍성하게 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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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신앙의 모범: 칼빈의 개혁목회

칼빈의 위대성은 그의 독창성에서보다는 기독교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현장에서 줄기차게 개혁을 실현해 나갔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책상 머리에서 이책저책 뒤적거려 짜낸 이론들로 그럴듯하게 뜯어 맞춘, 그래서 늘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정작 삶으로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이론만의 종교주의자가 아니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임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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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현장의 용사: 교회학 박사

제네바 교회를 섬기면서 칼빈은 목사회 모임을 이끌었고, 거기서 배출된 목사들이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개혁교회를 세웠다. 또한 칼빈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운 존 녹스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세계 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오늘날 사방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교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다운 목사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와 도전이 참으로 크고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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