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9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44문답

[질문] 십계명의 머리말이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Ÿ 십계명의 머리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되는 분이시고, 구속자이시므로, 우리가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호 11:1-2; 눅 1:74-75; 롬 8:1-4; 고전 5:7-8; 벧전 1:14-19).

제44문답은 십계명의 머리말이 왜 선포되었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여기서 잠깐 머리말을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하신 내용입니다(출 20:2; 신 5:6). 한 눈에 척 떠오르는 인상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 받았다는 사실의 전제 하에 베풀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너희가 구원 받았으니까, 즉 은혜를 빚졌으니까, 이제부터 십계명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는 의미이겠습니까?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여하튼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한데,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 이런 것 저런 것을 바친다 하는 차원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십계명의 머리말을 대할 때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에 성립되었다는 데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이 아무라도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러한 능력이 없고, 그렇게 할만한 생각조차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지닌 부패성은 부분적이지 않고 전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첫 번째인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주제로서 고백하는 바대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한다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으려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 6:63)라고 하신 말씀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연합되어 구원을 받게 되면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첫째, 죄책이 사라집니다. 이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신칭의 교리를 통해서 잘 알려진 바대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성도에게는 결코 정죄가 뒤따르지 않는데, 바로 여기에서 그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문제가 나오게 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칭의론의 부록’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책을 사해주신 것이고, 이것은 영단번에 이루어진 결코 변치 않는, 아니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므로, 향후 그 어떠한 죄도 성도를 정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구원이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된 데 따른 것이요, 그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함을 선고 받은 것이므로, 향후 만에 하나 제아무리 극악한 죄악에 빠진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인으로서의 신분은 취소됨이 없이 온전히 끝까지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살아가게 되는 놀라운 신비를 발휘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신칭의 교리’가 ‘간단 신앙주의’로 변질되어 있는 성향이 강한 한국적인 상황에서 신실한 성도로서는 이 사실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는 단지 의롭다 함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도다”(고전 1:30)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보십시다. 분명히 ‘의로움’이 되었다고 할 때에 ‘거룩함’도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거룩함이란 것은 신앙신학(信仰神學, Faith Theology) 또는 고백신학(告白神學, Confessional Theology)의 용어로는 성화를 가리키는 것인데, 바울은 이 성화에 대해서도 완성적이라는 의미로 칭의와 동일하게 배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차원과 연결시켜 구원 받았다고 보는 것이 정답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서 살려고 해도 살 수 없는 그런 신비한 존재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속에서 약동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게 되고,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기를 마치 일용할 양식을 취하는 것처럼 하게 되는 것입니다(요 4:34). 백이면 백 모두가 예수님처럼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모든 것과 결별하여 새로운 부활체로서 다시 살아가게 되는 영화의 때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이 땅에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서 사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실로 송이꿀보다 더 단 것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때에 실로 사람답게 사는 보람을 느끼면서 가슴 뿌듯함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십계명에서의 머리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로 말미암아 능히 십계명과 같은 복음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자신이 받은 구원의 확신도 증대되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일예배순서 2019년 6월 16일 (10:00)
. (09:30 준비) 사도신경송-시편찬송-십계명송
. 송영
. 신앙고백 (다같이)
. 언약선포 (십계명 교독)
. 시편찬송 117편
. 목회기도 (설교자)
. 시편찬송 119-1편
. 말씀선포 막 1:1-8
. 말씀설교 하나님의 복음
. 시편찬송 119-2편
. 주님의 만찬 (매 분기말마다)
. 주기도문 (다같이)
. (예배 이후) 애찬 및 성도의 교제
. (13:00부터) 평강의 예배 (성경학습)
주언교회 -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

  1. 주언교회는 하나님께서 개혁교회의 창시자 존 칼빈과 그의 사상을 계승한 개혁자들을 통해서 세계 최초로 프랑스 개혁교회(1559)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1560)를 출범시키심으로써 교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섭리에 감사드리며 이를 소중히 받듭니다.
  2. 주언교회는 교회개혁이란 동전의 양면의 관계와도 같이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에 성립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첫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한 신앙고백이 보다 더 정확하고 섬세한 '제반 신앙고백들'로 확정되었고 둘째는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하신 바대로 신앙고백을 성경적으로 구현하는 교회질서(정치)가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3. 주언교회는 이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대하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는 신앙고백의 핵심에 깨달았고 동시에 이와 같은 신앙고백은 개혁된 교회의 전통에 따른 성경적 교회질서에 성립될 때에 비로소 '교회의 삼대 표지'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는 각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4. 주언교회는 더더욱 겸손히 고개숙여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신앙학(신학과 신앙)을 계속 깊이 배우고 계승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라고 고백하는 바대로 보편의 교회와 함께 정통 신앙고백교회질서에 성립되는 것을 통하여 교회로서의 온전한 품위를 구현하는 사명을 위하여 한 길로 줄곧 나아갑니다.

성경해석의 원천: 기독교강요

주지의 사실이듯이 칼빈을 빼놓고서는 '참된 교회'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따른다고 외치지만 오히려 칼빈이 그렇게도 배척한 신앙 형태를 자행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도 벌어지고 있다. 진정으로 개혁사상을 계승하려 한다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하고, 그럴 경우 성경 해석과 선포를 보다 풍성하게 해내게 될 것이다.

준비중

고백신앙의 모범: 칼빈의 개혁목회

칼빈의 위대성은 그의 독창성에서보다는 기독교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현장에서 줄기차게 개혁을 실현해 나갔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책상 머리에서 이책저책 뒤적거려 짜낸 이론들로 그럴듯하게 뜯어 맞춘, 그래서 늘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정작 삶으로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이론만의 종교주의자가 아니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임을 아는 사람이었다.

더보기

개혁현장의 용사: 교회학 박사

제네바 교회를 섬기면서 칼빈은 목사회 모임을 이끌었고, 거기서 배출된 목사들이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개혁교회를 세웠다. 또한 칼빈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운 존 녹스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세계 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오늘날 사방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교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다운 목사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와 도전이 참으로 크고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준비중

최근 글

xxxxxx-1[1]

제017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이중적 특성

인간 영혼의 이러한 능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감지할 수 있는 데서 절정에 달합니다. 이처럼 신적인 특성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은사를 자기 안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 같은 은사를 주신 창조주를 멸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불합리한 처사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은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부러 더보기

xxxxxx-1[1]

제016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오작동

사실 오동작하는 인생살이란 우리네 인간들끼리의 관계 속에서도 얼마나 속을 상 하게 합니까? 가령, 자식이 허구한날 부모님 속을 썩이고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자식 의 도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거나 일상 언어에 있어서도 존댓말 조차 쓸 줄도 모르고, 마치 저 혼자 잘나서 자연적으로 큰 듯이, 제멋대로 살아가는 자녀가 있다면, 부모의 입장에서 얼마나 속이 썩어 더보기

xxxxxx-1[1]

제015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이중적 성격

자, 이제 무엇을 강조하려는 것인가가 명확해졌습니다. 우리가 발휘하는 일종의 ‘믿음의 행위’는,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하여 다음 단계로 구원이라고 하는 열매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구원이 들어와 자리잡고 있다는 데 대한 일종의 시인, 또는 인정 혹은 고백하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복음을 따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이나 또는 더보기

xxxxxx-1[1]

제014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과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동사인 ‘안다(know)’ 또는 ‘알다’라는 단어와 ‘지식’(knowledge)이라는 명사는 대부분 동격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둘의 의미가 합쳐질 때가 많은데, 그러한 경우에는 ‘안다’라는 말과 ‘지식’이라는 말은 좀 더 의미가 강화되어 ‘인정한다’, ‘승인한다’, ‘자인한다’(acknowledge)라는 뜻이 됩니다. 가령, 호세아 선지자가 “내 백성이 지식(knowledge)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