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4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13문답 묵상2018년

[질문[: 우리의 시조는 창조받은 지위에 그대로 있었습니까? [대답]: 우리의 시조는 의지의 자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써 창조받은 지위에서 타락하였습니다(창 3:6-8, 13; 고후 11:3).

시조(始祖)란 한 겨레나 가계의 맨 처음이 되는 조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연히 아담은 우리네 인류의 시조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류를 창조하실 때에 오직 아담과 하와만을 만드셨고, 그들을 통하여 인류가 생육적으로 번성케 될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서 최초의 자녀들이 태어나고, 그렇게 태어난 자녀들 간에 혼인하여 다시금 자녀들을 낳아가는 식으로 이 세상에 인류가 충만케 하려 하신 것입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설(?)을 시도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의 하나님의 계획은 가장 지혜롭고 최선의 것이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담의 위치는 결코 자기 개인만으로 독립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대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신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신앙고백문답은 ‘창조받은 지위’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앞의 제12문답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대면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특별한 섭리란, 은혜 언약 또는 생명 언약이었습니다.  즉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혹여 아담이 생명의 언약을 잘 지켰다면, 그에 따른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과가 그의 후손들 모두에게 미쳤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죄라고 하는 부패가 들어올 수 없었고, 그로 말미암은 온갖 고통 및 죽음과 형벌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영원무궁토록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언약을 파괴하고 말았고, 따라서 언약 규정에 따라 그의 후손들 모두는 지금까지 쓰라린 결과를 겪고 있습니다. 반복하거니와 이는 당시 아담은 홀로였던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태어나는 후손 모두를 대표하는 언약의 머리였기 때문입니다.

간혹, “사탄이 우리의 첫 조상을 유혹하도록 어떻게 허용되어졌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곤 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모든 행위를 보존하시며 섭리하신다고 한 앞의 제11문답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즉 아담이 유혹을 받는 것 역시도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의 한 부분이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들여다 볼 수 없는 하나님의 깊으신 심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확실하게 두 가지를 가르치는데, 첫째, 하나님은 피조물과 그의 모든 행위를 통제하시고, 둘째,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의 조성자가 아니시면서도 어떻게 해서 모든 것을 통치하실 수 있는가, 즉 어떻게 해서 사탄이 아담에게 다가가 유혹할 수 있었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비밀로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이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하튼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주장하는 분이시고(엡 1:11),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는 분이십니다(약 1:13). 시편 기자는 이 사실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행사에 은혜로우시도다”(시 145:17)라면서 탄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신앙고백문답은 아담의 역사적 실재성을 가르칩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세기 1-3장의 기록은 특별한 시간과 장소의 지구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기록입니다. 현대에 들어 인간 이성만을 의지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아담을 단지 상징적 인물로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현대 신학의 주장이 매우 매력 있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아담의 이야기를 믿는다고 말할 때에 조심해서 새겨 들어야 합니다. 아담의 이야기가 품고 있는 어떤 가치관을 믿는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기록으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담’이라는 이름은 단지 ‘범죄하고 타락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뜻할 뿐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논리를 펼칩니다.

이제 개혁된 교회의 신앙고백에서는 이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의 역사적 실제성을 부정하게 되면 기독교 교리체계 전체가 무너지고야 맙니다. 성경은 확실하게 “한 사람이 순종치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5:19)고 선포합니다. 따라서 아담이 실재 인간이었음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는 아담의 실재성과 그가 행위 언약 하에서 행한 바를 믿지 않는다면, 성경이 말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은혜 언약 하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바에 관해서도 사실상 믿지 못하게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이겠습니까?

 

주일예배순서 2018년 10월 14일 (10:00)
. (09:30 준비) 사도신경송-시편찬송-십계명송
. 송영
. 신앙고백 (다같이)
. 언약선포 (십계명 교독)
. 시편찬송 022편
. 목회기도 (설교자)
. 시편찬송 023편
. 말씀선포 갈 2:1-10
. 말씀설교 진리의 교회
. 시편찬송 024-1편
. 주님의 만찬 (매 분기말마다)
. 주기도문 (다같이)
. (예배 이후) 애찬 및 성도의 교제
. (13:00부터) 평강의 예배 (성경학습)
주언교회 -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

  1. 주언교회는 하나님께서 개혁교회의 창시자 존 칼빈과 그의 사상을 계승한 개혁자들을 통해서 세계 최초로 프랑스 개혁교회(1559)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1560)를 출범시키심으로써 교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섭리에 감사드리며 이를 소중히 받듭니다.
  2. 주언교회는 교회개혁이란 동전의 양면의 관계와도 같이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에 성립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첫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한 신앙고백이 보다 더 정확하고 섬세한 '제반 신앙고백들'로 확정되었고 둘째는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하신 바대로 신앙고백을 성경적으로 구현하는 교회질서(정치)가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3. 주언교회는 이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대하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는 신앙고백의 핵심에 깨달았고 동시에 이와 같은 신앙고백은 개혁된 교회의 전통에 따른 성경적 교회질서에 성립될 때에 비로소 '교회의 삼대 표지'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는 각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4. 주언교회는 더더욱 겸손히 고개숙여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신앙학(신학과 신앙)을 계속 깊이 배우고 계승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라고 고백하는 바대로 보편의 교회와 함께 정통 신앙고백교회질서에 성립되는 것을 통하여 교회로서의 온전한 품위를 구현하는 사명을 위하여 한 길로 줄곧 나아갑니다.

성경해석의 원천: 기독교강요

주지의 사실이듯이 칼빈을 빼놓고서는 '참된 교회'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따른다고 외치지만 오히려 칼빈이 그렇게도 배척한 신앙 형태를 자행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도 벌어지고 있다. 진정으로 개혁사상을 계승하려 한다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하고, 그럴 경우 성경 해석과 선포를 보다 풍성하게 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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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신앙의 모범: 칼빈의 개혁목회

칼빈의 위대성은 그의 독창성에서보다는 기독교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현장에서 줄기차게 개혁을 실현해 나갔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책상 머리에서 이책저책 뒤적거려 짜낸 이론들로 그럴듯하게 뜯어 맞춘, 그래서 늘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정작 삶으로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이론만의 종교주의자가 아니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임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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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현장의 용사: 교회학 박사

제네바 교회를 섬기면서 칼빈은 목사회 모임을 이끌었고, 거기서 배출된 목사들이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개혁교회를 세웠다. 또한 칼빈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운 존 녹스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세계 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오늘날 사방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교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다운 목사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와 도전이 참으로 크고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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