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03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8문답

[질문] 제6계명이 명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제6계명이 명하는 것은 모든 정당한 노력을 기울여 자기 자신의 생명과(엡 5:28-29) 다른 사람의 생명을(왕상 18:4; 욥 29:12-13; 시 82:3-4) 보존하라는 것입니다.

제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 명령 역시 적극적인 차원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단순히 ‘살인하지 말라’라고 한 의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명’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힘써 지키고 힘써 보존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즉 이 말씀 역시 금지명령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배후에 잠재되어 있는 의무명령도 함께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성도는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나아가 어떠한 경우에도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끊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살은 명백히 제6계명을 위반하는 무서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인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스스로의 생명을 저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따라서 그러한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엄격히 금지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고의적인 자기 살인의 형태로, 사울 왕과 아히도벨,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가룟 유다의 경우를 보여줍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패배하여 큰 부상을 당하게 되었는데, 스스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끝에 옆에 있던 부하에게 죽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그가 응하지 않자 스스로 자살로 내몰았던 것입니다(삼상 31:1-6).  압살롬의 모사꾼이었던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꾼 후새와의 모략전에서 패배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메고 자살하였습니다(삼하 17:23). 가룟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그깟 은 30개에 팔아먹은 데 대한 죄책을 견디지 못하여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하면서 목을 메어 자살했습니다(마 27:3-5).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죄를 범하는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직접 자살이라고는 볼 수 없을지라도 의당히 자살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 형태들도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경시하는 일체의 경우를 다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가령, 자동차를 무모할 정도로 과속으로 모는 행위, 안전장치가 없는 아슬아슬한 형태의 경기나 연기를 하는 행위, 높은 수입을 바라고 위험한 연기를 하는 스턴트 맨을 직업으로 취하는 일, 추락사고가 현저해 보이는 공사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안전장치를 확보함이 없이 작업에 나서는 행위 기타 등등입니다. 나아가 육체적 건강에 주의하지 않는 형태도 들 수 있는데, 가령, 과도한 음주로서 육체를 해친다거나 암 발생 요인으로 명백히 밝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줄담배를 피워댄다거나 나아가 여러 종류의 마약들을 사용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범주에는 아예 얼굴을 처음과 다른 정도로 뜯어 고치는 과도한 성형수술도 포함시킬 수 있겠고, 같은 원리로 온 몸에 문신을 하여 몸 전체는 물론이고 심지어 얼굴까지도 온갖 그림으로 채우는 행위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살인하지 말라고 한 계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자신과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사람이라면 모두가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이웃’이라는 개념의 울타리에 몽땅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소위 ‘우리의 이웃’에 대한 정의를 내려주셨는데(눅 10:29-37), 자신과 친분관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야말로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성도라면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사람도 자신의 이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도 얼마든지 우리처럼 창세 전부터 택함을 입은 잠재적 그리스도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직 그들이 구원 받을 때가 되지 않아서, 그 시간이 임하기까지 임시로 불신자로서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혹 택함을 입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성도에게는 그들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만큼의 가치로서 보존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 역시도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살인의 문제로 돌아와서, 항간에 이 계명을 들어 국가가 집행하는 사형제도의 폐지를 부르짖는 운동이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이단의 경우이긴 해도, 가령 여호와의 증인 같은 사람들은 전쟁에서 부득불 사람을 죽이는 일을 피하겠다는 의도로 아예 군대의 징집권조차 거부하기도 합니다. 후자의 경우는 이단 쪽의 형편이니까 거론할 필요가 없겠고, 그러면 전자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입법 행위라고 하는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사형폐지 제도를 제정한다면,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법률을 제정하는 행위에 속하는 것이므로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사형제도를 법률로서 이미 제정해놓았는데, 이를 여기 제6계명을 들어 전적으로 불법인양 매도하면서 당장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정치적 시위’를 하는 등등의 행위는 옳다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데모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로 대두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국가 정당한 법률 제정으로써 사형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주일예배순서 2019년 11월 17일 (10:00)
. (09:30 준비) 사도신경송-시편찬송-십계명송
. 송영
. 신앙고백 (다같이)
. 언약선포 (십계명 교독)
. 시편찬송 022-1편
. 목회기도 (설교자)
. 시편찬송 022-2편
. 말씀선포 시 107:1-32
. 말씀설교 예배의 행복
. 시편찬송 022-3편
. 주님의 만찬 (매 분기말마다)
. 주기도문 (다같이)
. (예배 이후) 애찬 및 성도의 교제
. (13:00부터) 평강의 예배 (성경학습)
주언교회 -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

  1. 주언교회는 하나님께서 개혁교회의 창시자 존 칼빈과 그의 사상을 계승한 개혁자들을 통해서 세계 최초로 프랑스 개혁교회(1559)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1560)를 출범시키심으로써 교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섭리에 감사드리며 이를 소중히 받듭니다.
  2. 주언교회는 교회개혁이란 동전의 양면의 관계와도 같이 분리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에 성립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는데 첫째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한 신앙고백이 보다 더 정확하고 섬세한 '제반 신앙고백들'로 확정되었고 둘째는 '모든 것을 품위있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 14:40)고 하신 바대로 신앙고백을 성경적으로 구현하는 교회질서(정치)가 제정된 것이었습니다.
  3. 주언교회는 이 두 가지 중요한 원리를 대하면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라는 신앙고백의 핵심에 깨달았고 동시에 이와 같은 신앙고백은 개혁된 교회의 전통에 따른 성경적 교회질서에 성립될 때에 비로소 '교회의 삼대 표지'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는 각성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4. 주언교회는 더더욱 겸손히 고개숙여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신앙학(신학과 신앙)을 계속 깊이 배우고 계승하면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 ...'라고 고백하는 바대로 보편의 교회와 함께 정통 신앙고백교회질서에 성립되는 것을 통하여 교회로서의 온전한 품위를 구현하는 사명을 위하여 한 길로 줄곧 나아갑니다.

성경해석의 원천: 기독교강요

주지의 사실이듯이 칼빈을 빼놓고서는 '참된 교회'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을 따른다고 외치지만 오히려 칼빈이 그렇게도 배척한 신앙 형태를 자행하는 어처구니 없는 모순도 벌어지고 있다. 진정으로 개혁사상을 계승하려 한다면 칼빈의 신학과 신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를 필수적으로 학습해야 하고, 그럴 경우 성경 해석과 선포를 보다 풍성하게 해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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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신앙의 모범: 칼빈의 개혁목회

칼빈의 위대성은 그의 독창성에서보다는 기독교 메시지를 일관성 있게 이해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신앙의 현장에서 줄기차게 개혁을 실현해 나갔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책상 머리에서 이책저책 뒤적거려 짜낸 이론들로 그럴듯하게 뜯어 맞춘, 그래서 늘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정작 삶으로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이론만의 종교주의자가 아니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임을 아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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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현장의 용사: 교회학 박사

제네바 교회를 섬기면서 칼빈은 목사회 모임을 이끌었고, 거기서 배출된 목사들이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개혁교회를 세웠다. 또한 칼빈에게서 개인적으로 배운 존 녹스 역시 스코틀랜드에서 세계 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다. 이것은 오늘날 사방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교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목사다운 목사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와 도전이 참으로 크고도 크다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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