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21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40문답

[질문] 사람이 마땅히 순종할 규칙으로 하나님께서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사람이 마땅히 순종할 규칙으로 하나님께서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도덕의 법칙입니다(창 2:16-17; 롬 2:14-15; 10:15).
  • 제40문답은 일명 도덕법에 관한 내용입니다. ‘도덕’이란, 사회의 구성원들이 양심, 사회적 여론, 관습 따위에 비추어 스스로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준칙이나 규범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과 달리 각자의 내면적 원리로서 작용하는데 통상 ‘법률’과 ‘양심’에 어긎나지 않는 생활태도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도덕법과 세상의 도덕법 간에는 차이가 있는데, 양심을 넘어 초월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당한 생활을 견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여부가 도덕법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가 되지만(롬 2:14-15), 그럴지라도 기독교 도덕법은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그와 같은 순종을 이끌어내는 내면의 동기를 살핍니다.
  • 하나님께서 태초의 인간 아담에게 “...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라고 하셨을 때,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마땅히 순종해야만 하는 절대적 규범으로서의 ‘도덕의 법칙’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신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신 것인데, 이 요구에 응하는 데서 ‘도덕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최고의 선이시므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일체의 계명은 항상 그 자체로서의 최고의 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 오늘날 도덕의 법칙 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대체적으로 ‘성화의 삶’이라고 하는 옷을 입는 양상을 취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던 상태로의 회복인 구원에 대해 다룰 때에 통상 칭의와 그로 말미암은 성화라는 주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새 생명의 삶’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이 새 생명의 삶에 대해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2-14)라고 하였습니다.
  • 새 생명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명확한 전제를 요구합니다. 곧 죄책(칭의)과 죄권(성화)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사실은 성도가 성신의 신비적 사역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데 대한 전제로부터 파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할 때에 ‘성화’보다는 ‘새 생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실제로는 둘 다 같은 의미이지만, 성화는 주로 성도 개인이 스스로 발휘해내는 도덕성 함양을 연상시키는 반면, 새 생명은 그와 같은 삶의 원천이 되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을 연상시킴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느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 이 단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화로 표현하든 또는 새 생명으로 표현하든 간에, 이 기독교적 도덕의 법칙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덕주의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신 말씀에 착념하는만큼, 세상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데 대해서는 적어도 표현상으로는 반대하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 차이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할 경우, 기독교 도덕의 법칙은 단순히 일반적인 도덕률에다가 다만 기독교적인 용어들을 채색한 정도 밖에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그토록 공경한 것은, 이 세상에서 어느 효부가 시어머니를 극진히 공경한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물음인 것입니다.
  •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91문답은, “그런데 선행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후, 대답하기를 “참된 믿음으로(롬 14:23; 히 11:6)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레 18:4; 삼상 15:22; 엡 2:10)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실행한 것만을 선행이라고 하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계명에 근거한 것은 선행이 아닙니다(신 12:32; 사 29:13-14; 겔 20:18-19; 마 15:7-9)”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더 ‘성신을 좇아’라는 표현의 함축을 고려하면서, 이는 아주 필요적절한 가르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도덕의 법칙에 대한 규정 문제와 관련하여, 신약성경의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새 계명들에 대한 문자적 진술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실상 구약적 율법주의와 신약적 도덕주의 간에는 경계가 없이 그대로 혼합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화가 되었든지, 새 생명의 삶이 되었든지 간에, 좀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삶은 결코 개인의 도덕성 햠양에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기여해야만 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더더욱 선양하는 데 이바지 하는 도덕의 법칙 준수여야 하는 것입니다.

2019년 4월 20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9문답

옵스! 오늘이 벌써 토요일입니다. 내일이 더더욱 기다려지는 날입니다. 예배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실패한다거나,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사람은 성도의 자격이 없습니다. 이대 예배는 절대적으로 배타적이고 절대적으로 독점적인 성격의 것임을 잘 깨달아 둡시다. 예배는 자신을 더욱 빛내게 해주는 다른 보조 수단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오직 예배 자체만으로서 스스로를 빛날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람의 속을 능히 감찰하시는 분이심을 명심하면서, 최대한 순결하고 최대한 정직하고 최대한 솔직함으로 서는 것 밖에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어떠한 거짓과 위선이나 속임수 및 요행 혹은 태만이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내일의 예배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각별히 보살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려보심이 어떻겠습니까?

2019년 4월 19일(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9문답

베드로전서 1:14-16을 읽어봅시다. 여기서 반복되고 있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거룩'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인용한 부분은 레위기 19:1입니다. 레위기의 전체적인 주제가 속죄와 거룩이라는 데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즉 구원과 성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전체의 사상으로 확대됩니다. 그런데 거룩(성화)이란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앞서, 세상 사람들과 뚜렷하게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대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현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제일은 단연 주일을 지키는 것이요, 더 정확하게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되, 의로운 삶을 살면 예배를 잘 드리게 되는지, 예배를 잘 드리는 데서 의로운 삶도 살 수 있게 되는지와 연관지어 생각을 잘 정리해 봅시다.

2019년 4월 18일(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9문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라는 사상을 생각할 때면 빼놓은 수 없는 구절이 미가서 6장 8절인데 찾아 보십시다. 두 가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데, 공의롭게 행하는 것과 자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데(to walk)서 이 두 덕성은 가능해집니다. 에녹과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대표적인 두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으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합니다. 여기서 겸손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한 조건일 수도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 따른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간에 겸손이 핵심입니다. 이쯤에서 마태복음 11:28-30을 읽어봅시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을 생각하다가 이 겸손이라는 단어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서가 내리는 겸손에 대한 정의는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2019년 4월 17일(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9문답

로마서 12:1-2을 읽어보십시오. 여기서 '거룩한 산 제사'와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한 두 표현은 아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두리뭉실하게 이해되는 경향입니다. 전자(산 제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후자(영적 예배)는 이성적(reasonable, 이치에 맞는)인 예배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4:24에서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하셨을 때의 의미와 비슷합니다. 요즈음 예배의 타락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예배인지 유흥인지, 마구 뒤섞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규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한정하신 바대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 중의 하나입니다. 당신의 교회와 당신 자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2019년 4월 16일(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9문답

아이가 태어나서 마침내 장성하게 되면 가정을 꾸미게 되고 자녀들을 낳게 됩니다. 하루가 다르게 커 가면서 부모를 알아보고 방긋방긋 웃는 모습의 아이들이란 얼마나 귀엽습니까?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가면서 자신의 인격을 갖추기 시작할 때쯤이면 서서히 거역과 불순종이라는 환경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귀여운 아이들 역시 부패한 죄인으로서 태어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심해지면 상대적으로 부모의 탄식과 한숨도 늘어갑니다. 이 단계에서 잠깐 위를 쳐다보십시다. 지금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나는 얼마만큼이나 순종하고 있습니까? 사무엘상 15:22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람됨의 본분을 포기하는 것이겠습니다. 지금 혹 불순종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19년 4월 15일(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9문답

시편 95:1-6을 읽어봅시다. 먼저 하나님을 우리의 구원의 반석이라고 선포합니다(1절).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은 온 우주만믈을 창조한 분이기도 하십니다(4-5절). 창조주 하나님은 결국 모든 왕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십니다(3절). 하나님은 왕이시로되 냉엄한 통치자로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신 구원자로서 그러하십니다(1절).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우리의 인식과 믿음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전심으로 경배를 올리는 대표적인 특성을 드러냅니다(2, 6절).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갖추기를 원하시는 본분입니다. 어떻습니까? 어제, 어제 말입니다. 주일의 예배를 신령으로 진정으로 드리셨습니까? 10점 만점에 스스로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2019년 4월 14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9문답

[본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대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분이 나타내 보이신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신 29:29; 삼상 15:22; 미 6:8; 요일 5:2-3).

  • 신앙고백문답 제39문답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요구하고 계신다는 데 대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순종’입니다. 하지만 어떤 성격의 순종인가 할 때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뜻’이라고 한 바를 유념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순종 문제와 관련하여 많은 오해와 왜곡 현상이 있는 것은 실로 유감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순종이 되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막연한 상상이나 추측은 절대 금물입니다. 여기서 모세가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 29:29)라고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오묘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으로서는 결코 들여다 볼 수 없는 것들도 많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아예 들여다 보려는 시도조차도 해서는 안 됩니다.
  •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명백히 나타내 보이신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예외 없이 언약이라는 범주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항상 구원을 증진시키고, 구원을 부요케 해주는 수단들이 됩니다. 이러한 유익을 누리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필요한 계명을 주시면서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유익을 얻으신다거나 하나님께 보탬이 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복이 되기 때문일뿐입니다.
  •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의 표시입니다. 성도가 구원 받은 자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으려면, 그리하여 가족을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시는 가장의 보호와 양육과 돌봄을 만끽하려면, 두말할 것 없이 순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겁지 않습니다. 육신의 세계에서도 어렵고 힘들고 불가능한 것을 자식에게 지우는 부모란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실까 보겠습니까?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라고 하신 말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서두에 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문제와 관련해서 나타나는 오해와 왜곡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미묘한 것은 ‘자신의 생각을 더 앞세우는 것’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도 같은 모습을 취한다는 데 있습니다. 즉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어리석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 실례를 구약시대 때의 사울의 모습에서 보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바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 할 일이었지만, 자기의 생각을 더 앞세워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했는데, 이때 그러한 형식의 순종거리들이 실제로 많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속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이다”(삼상 15:22)라고 한 책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상황, 직면한 문제 앞에서 우직하게 순종하여야 하는 원리가 중요합니다. 지금 자행하고 있는 불순종을 ‘다른 것에 대한 순종’으로써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것에 대한 순종’조차도 사실상 의미없는 것으로 변해버리고 맙니다.
  •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데서 얻게 되는 보다 중요한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대로 불신자들의 경우 전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 자명해집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가져다준 ‘죄사함’의 은혜를 입어야 하고, 그에 뒤따르는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속에서 약동하고 있는다는 데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 순종하면 할수록,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에게 불이익이나 기타의 고난이 나타나는 문제는 차치하고, 그 사람에게서는 정신적인 기쁨이 충만하게 되고, 그로 마림암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보다 더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계명에 그야말로 맹종하다시피 순종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이 무슨 유익을 얻으시려는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로서는 비로소 참된 행복에 충만해질 것이기 때문이고, 그런 식으로 지금 현재 자신에게 이루어져 있는 구원의 확신도 더더욱 증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9년 4월 13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8문답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최종적으로 영원한 유익을 주실 것입니다. 신자들의 영화된 몸은 전체적으로 강건한 가운데 영원할 것입니다. 그들은 영혼과 육체로서 다시 결합된 모습으로 부활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고 그의 존전에서 영원토록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2:1-5을 읽어봅시다. 그러면 성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와 같은 축복을 베푸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0:31도 읽어봅시다. 계속해서 다시 한 번 제1문답으로 상기해봅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가장 실제적이고 따라서 가장 실효적인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라구요? 네, 가장 정확한 대답입니다. 그러면 왜 그렇습니까?

2019년 4월 12일(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8문답

당신의 경우 영원토록 함께하고 싶은 특별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주저없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의 진수에 대한 깨달음이 각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다는 데 대한 증거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죄된 품성에 대한 각성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에 있어서 자신의 무능력이 더욱 절벽 같다는 데 대한 더 절실한 깨달음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하나님의 임마누엘은 결국에는 우리와 완연한 일체를 이루는 데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니, 이 얼마나 까무러칠만큼 놀라운 은혜입니까? 요한계시록 21:3-4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는 사실이 나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