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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에서 나타난 창조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음의 역사를 통하여 찬란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께서는 화해를 바라는 분이시고 그에 따라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데서 밝히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당신의 권능과 지혜를 통해서, 그리고 매일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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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1호. 성도의 부활 신앙과 확신

옛적에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마게도냐의 빌립 2세 대왕은 스스로 겸손해지기 위하여 항상 이 죽음의 문제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종 한 명을 특별히 고용했는데, 자신이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쟁반에 받쳐든 사람의 해골을 들고 나타나, “빌립이여! 그대도 이처럼 죽을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는가!”라고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물론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처럼 죽음을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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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호. 영원한 심판과 영원한 생명의 상호성

당시 에드워즈는 무슨 부흥사들처럼 청중을 종교적 최면상태로 몰아넣는 식으로 그렇게 요란을 떨면서 감정을 조장하는 그런 식으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전에도 했던 준비한 원고를 조용히 읽어가듯이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기도 전에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설교가 진행되는 중인데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대대적으로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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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호. 교회 시대의 올바른 헌금 자세

이후 존 칼빈 같은 개혁자들을 통해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을 말끔히 벗어버린 개혁교회가 출범하게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각별하신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충성을 다한 믿음의 선진들을 쓰셔서 ‘세 개가 하나’를 이루는 ‘네 쌍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반석 위에 개혁교회를 든든히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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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호. 거룩한 성례: 주님의 만찬 ②

신앙고백서들이 십일조 헌금을 신약 교회가 지켜야 할 규례로 보지 않는 까닭은, 구약의 모든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예표하였던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 사역을 완수하심에 따라, 그것들은 당연히 폐지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서들은 보다 큰 문제, 곧 구약의 각종 절기들과 같은 의식법들이 폐지된 사실을 선포하는 방식으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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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호. 거룩한 성례: 주님의 만찬 ①

개혁교회는 ‘성찬’이라는 말보다는 ‘주님의 만찬’이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이것이 로마 카톨릭의 그 동안의 잘못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배설하신 만찬’이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이 점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면 용어 사용의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하튼 주님의 만찬은 성격상 식사이고 잔치입니다. 이 식사 자리에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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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호. 거룩한 성례: 세례

사실 원칙적으로 예배시 설교를 통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실현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을 모두 품에 안고, 성부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십니다. 이는 오직 성신의 능력 안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역사요, 또한 신비한 효과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하나님의 존전에 부복한 자들에게서 일어나기 마련인 위엄 의식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개인적인 감정에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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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호.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찬송 소고

그런데 오늘날 전혀 이런 의식이 없이 찬송을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마치 무슨 귀찮은 순서 해치우듯이 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음악성 발휘에 치중하면서 스스로 즐기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찬송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 순전히 예배 순서를 하나씩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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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호. 성령 안에서의 기도

하지만 성도의 기도는 참되고 순수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 행위’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는 아무 것이나 덮어놓고 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 받은 목적을 누리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아뢰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기도는 지금 구원 받은 목적을 누리고 있는 삶의 토대로부터 이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토대가 전제되지 아니하면 기도가 성립될 수 없는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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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호. 믿음의 최상의 실천으로서의 기도

그래서 사실 기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하기도 쉽지 않지만, 바르게 기도한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간절히 기도드린다는 명분 아래 통성 기도로써 이말 저말 마구잡이로 뱉어내고, 40일 작정 기도로써 시간을 억지로 채우기만 하면 간절하고 끈기 있는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런 식의 기도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정말 적지 않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 것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