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02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2주차(127-129문답)

“우리는 너무 약해서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없어요.” 고린도전서 10장 12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어떤 소녀가 말하더군요. “제가 에덴에 있었더라면 아담처럼 죄를 짓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그 소녀는 죄를 지었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죄인일 뿐이고 불완전한 삶을 삽니다. 아담은 처음에는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유혹이 오기 전에는 죄도 없었고 불완전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왔을 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육신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죄인입니다.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는 유혹이 올 때마다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시편 78편 38-40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하심으로써 피할 길을 주십니다.

2021년 8월 01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2주차(127-129문답)

[제127문] 여섯째 간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대답]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너무나 연약하여 한 순간도 우리 자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시 103:14-16; 요 15:1-5).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마귀와(고후 11:14; 엡 6:10-13; 벧전 5:8) 세상과(요 15:18-21) 우리의 육신은(롬 7:23; 갈 5:17) 우리를 공격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하므로 주의 성신의 힘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를 강하게 하셔서, 우리가 이 영적 투쟁에서 패하여 거꾸러지지 않고(마 10:19-20; 26:41; 막 13:33; 롬 5:3-5), 최종적으로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얻을 때까지 우리의 원수를 견고히 저항하게 하실 것입니다(고전 10:13; 살전 3:13; 5:23).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기도 내용은 우리를 죄로부터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 다섯 번째 간구에서는 이미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죄를 범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 간구 역시 다른 성경 구절에 근거한 조심스러운 설명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을 경우 잘못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시험’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단어를 두 가지 경우에 사용합니다.

  1. 시험은 종종 ‘재판(trial)’, ‘입증하다(proving)’, ‘시험하다(testing)’ 등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틀림없이 사람을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시험하셨습니다(창 22:21). 욥도 마찬가지로 시험했습니다(욥 1:12; 2:6). 그리고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셨습니다(요 6:5-6).
  2. 시험은 ‘죄로의 유혹(enticement to sin)’ 또는 ‘죄로의 유인(inducement to sin)’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선,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사탄과 악한 사람들 그리고 악한 일들이 우리를 죄로 이끌어 들입니다.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시험의 두 가지 종류를 말합니다. 첫째, 그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1:2)라고 했고, 그런 후에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짓는 원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1:1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련은 하시지만, 결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시험하시거나 유도하시지는 않습니다. 매우 흡사한 이 두 가지 상황은, ‘죄를 짓게 하는 시험’과 그리고 ‘죄를 짓게 하지 않는 하나님의 시험’으로 구분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의미로 이 간구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전체 간구를 하나의 덩어리로 받아 들인다면 이것의 의미는 명확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악한 것’으로부터 보호해주시사 하는 간청을 드리는 것입니다. 실력 있는 헬라어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번역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악(악한 사탄)의 시험에 드는 것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이 문답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끔 하는 사단의 분투에 맞선 우리의 고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a.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전적으로 약하기 때문이고, 영적 원수들을 대항함에 있어서 우리의 힘으로는 조금이라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위한 시험에 맞서는 영적 전쟁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떠나 순전히 자신만의 힘으로 싸울 수 잇는 성도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b.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추구하게 하는 원수는 사악한 삼인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탄,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옛 사람입니다. 사탄은 세상의 배후에 있고, 그리고 우리의 연약한 육체는 그들을 더 강력하게 하는데 일조합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그는 욥을 유혹했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스려 이스라엘을 계수하도록 하였습니다(대상 21:1). 사탄은 그리스도를 공격했습니다(마 4장). 그는 베드로를 공격했습니다(눅 22:31). 그러한 사탄이 지금도 계속해서 지상에서 먹이 감을 찾는 우는 사자처럼 사방을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벧전 5:8). 우리의 영적인 원수와의 이 치명적인 투쟁은 중단되는 법이 없고, 따라서 휴전이나 휴가의 기회도 없습니다. “사탄은 중단 없이, 집요하고, 맹렬하게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매일 자신을 살피고, 기도에 졸지 않아야 합니다(마 26:41).

둘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도움을 힘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이러한 상황과 환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의 성령, 말씀, 그리고 은혜로 개입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로서는 항상 죄로 이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탄과 그의 영향력으로부터의 보호와 구출을 위해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으므로, 우리로서는 확신 있게 하나님께 이를 위해서 간구할 수 있고 더불어 응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 13:5). 기독교인의 신뢰는 시험에 빠지지 않는 법인데, 왜냐하면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세상에 있는 사탄보다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4). 게다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사람(중생)은 결코 타락하기까지의 죄는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생인으로 하여금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노력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악인은 중생인을 만지지조차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요일 5:18). 그런 셈입니다. 성도는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써 어떠한 영적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기어코 이긴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셉이 그러했습니다(창 39:10-12). 욥도 마찬가지입니다(욥 42:12). 그리고 사도들 역시 그러했습니다(롬 8:37). 

우리가 매일 같이 이러한 간구로써 기도한다면, 항상 행복하기만 하다거나 죄 없이 사는 삶으로만 항상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경륜에 따라, 우리도 역시 아브라함, 욥, 다윗, 베드로 기타 등등의 믿음의 선진들처럼 심하게 시험 받고 고난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직면하여 죄 지을 상황에 처하게 되고, 어쩌면 베드로가 그랬듯이 우리 주님을 부인하기까지 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슬퍼하고 회개하면서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은혜를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시온의 대로를 달려나가는 중에 한 동안 일부 전투에서 패할 수 있겠지만, 더 크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완벽한 승리를 쟁취할 것입니다.

말할 필요 없이, 이러한 간구로써 기도하는 사람으로서는, 일부러 하나님께 도전하여 사악한 영향력에 자신을 내어주고 노출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간구에 응답하시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제128문] 이 기도가 의미하는 당신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대답]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든 능력의 왕으로서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고 싶어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주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구하옵니다(롬 10:11-13; 벧후 2:9). 주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영원히 모든 찬송을 받으십니다(시 115:1; 요 14:13). 

이 완벽한 모범 기도문을 최종적으로 마치는 선언은 송영(doxology)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독솔로기아(doxologia)에서 파생되었는데, 의미는 ‘영광 혹은 찬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종종 찬송하는 “모든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역시 ‘송영’이라고도 불리웁니다.

현대 번역 성경에서, 예를 들면 ASV(the American Standard Version), RSV(the Revised Standard Version), NIV(the New International Version, the Catholic Bible) 기타 등등에서, 주기도문을 마치면서 이 놀라운 송영뿐 아니라 ‘아멘’까지도 포함하지 않은 것은 우리를 매우 놀라게 합니다. 그들의 이유를 보면, 첫째, 가장 오래된 사본에 이 송영이 포함되어 있지 않고, 둘째, 누가복음 11장 4절의 주님의 기도에는 송영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송영을 포함한 사본과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을 받아 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역대하 29장 11절의 명백한 근거에 따라, 즉 다윗 왕의 기도에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라고 한 바에 따라 송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송영(doxology)에 ‘권능’, ‘영광’, 그리고 ‘왕국’ 등의 단어가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송영은 완전한 주님의 기도와 모든 참된 기도의 참된 기초입니다. 이 사실이 기도를 위한 이유 혹은 근거로 설명한 단어 ‘위하여(for)’로써 도입되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고, 응답될 것이라는 데 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왕국은 너희의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들의 왕이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한을 주셨습니다(마 28:18; 하나님 왕국에 대해 논의한 제123문답 참조). 하나님이 왕이신 이유는, 세상 모든 것의 창조자시요, 공급자시요, 구속주시요, 그리고 재판장이시기 때문인데, 하나님은 그의 이름과 그의 나라의 발전을 위해 만드는 모든 간구를 응낙하실 권위(authority)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주인이시고, 통치자이시고, 의와 진리와 그리고 사랑으로서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둘째, “능력은 너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시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 어린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실제로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능력은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뜻을 집행할 능력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손을 멈추게 하거나 하나님께 저항할 수 있는 권력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하는 마음에 이러한 사실이 확실한 믿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하다거나 도움을 줄 수 없는 그런 무능한 신에게가 아니라, 자신의 왕국을 향상시키는 간구에는 모두 응답하는 전능하신 분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송영에 나오는 능력은 헬라어 원문으로는 ‘다이나믹(dynamic)’이데, (이것은 오늘날 ‘다이너마이트’라는 단어로 파생된) ‘에너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에너지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죄인들의 굳어진 마음까지도 바꿀 수 있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을 믿게 하실 수 있습니다.

셋째, “영광은 너희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것들의 왕이시라면,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권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시다면, 그러면 그는 모든 영광의 하나님이심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시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전체 존재가 삼위로서 무한하시고 완벽하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움’은 우리가 그 분 앞에서 경외와 감탄으로 영원히 서 있을 것으로서의 하나님의 선하심, 능력, 사랑, 공의, 그리고 기타 속성들입니다. 우리는 기도 시에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영화로워지시는 데 관심을 가여야 합니다.

이 송영의 마치는 단어는 ‘영원히’입니다. 이 단어는 세 개의 명사 모두를 수식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하고, 그의 권세도 영원하고, 그리고 그의 영광도 영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의 신실하심도 영원하십니다(시 89:2; 146:10). 하나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시간에 제한 받지 않으시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심지어는 우리가 아뢰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응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사 65:24).

[제129문] ‘아멘’이라는 이 짧은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대답] ‘아멘’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참으로 갈망하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사 65:24; 고후 1:20; 딤후 2:13). 

우리는 이제 주님의 기도에서 마지막 단어인 신성한 ‘아멘’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이 단어의 발음을 길게 혹은 짧게, 혹은 어떤 방법으로 하든 간에, 생각이 같다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단어는 ‘확고한’, ‘보증’, ‘확실’, ‘그래서 그렇게 될지어다’, ‘그것이 될지어다’ 등을 의미합니다.

‘아멘’은 헬라어 신약 성경에서 영어 번역에 이르기까지 축어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아멘’은 진리나 율법에 사람의 신성한 동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민 5:12-22; 신 27:15 등을 보시오). 신약 성경에서는, 축복(롬 1:25)과 찬미(롬 11:36)와 축도(롬 15:33; 16:24)와 기도를 선포하고 난 후에 사용되었습니다.

구세주께서는 종종 중요한 가르침을 베푸실 때에 먼저 아멘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사용할 때, 그것은 ‘진실로’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 주님은 요한복음에서는 이 단어를 이제 막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진리임을 강조하시려고 두 번 연속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렇게 “진실로 진실로(문자적으로는,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25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아멘’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용한 신약성경 설교자는 아무도 없는데,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만의 특별한 권위로써 말씀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시오, 하나님의 아멘이시오(요 14:6; 계 3:14), 충실한 지지자시요, 진실한 증인이십니다.

‘아멘’은 확실함과 진실을 의미합니다. 신앙고백문답은 ‘아멘’을 ‘참되고 확실하다는 의미’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기도 마지막에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확실성과 진리를 이중적으로 적용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129문답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포함됩니다.

첫째, ‘아멘’은 우리의 기도를 확실히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이라는 데 대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가 기도시에 언약적 약속들을 사용하면서 믿음으로 요청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언약적 약속을 무효화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이 ‘아멘’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하면서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일깨워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참으로 확실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의 확실성은 우리의 ‘느낌’이나 ‘좋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파기될 수 없는 약속에 근거합니다.

둘째, ‘아멘’은 우리가 신실하고 진실한 기도자로서 기도했다는 것을 하나님께 하는 우리의 엄숙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감히 위선이나 거짓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마음 깊은 곳에서 나와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작은 단어로써 우리의 기도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스러워지셔야 하고, 성경에서 계시된 바대로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기도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소망을 표현합니다. “제 마음과 깊은 생각을 아시는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는 제 기도가 신실하다는 것과, 그리고 제가 진실되이 아버지의 것들을 소망한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아멘’은 성경에 근거한 우리의 기도가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효력 있고, 응답될만하다는 데 대한 하나님과 우리 자신 양쪽을 위한 표시와 확증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믿지 않는 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일부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됩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말하는 우리의 은밀한 간구들은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 주님을 위한 달콤한 향과도 같이 ‘금 대접’에 담깁니다(계 5:8).

이제 이 신앙고백문답으로서 ‘주님의 기도’라고 하는 주제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고백문답도 마칩니다. 우리가 공부한 문제들이 진실되고 확실하기에 ‘아멘’으로 신앙고백문답을 끝마치는 것 역시 얼마나 적절한가를 절감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한 ‘아멘’으로서 우리의 죄(sin)에 대한 학습, 우리의 구원(salvation)에 대한 학습, 그리고 우리의 축복된 구세주께 대한 우리의 예배(service)에 대한 학습으로서의 ‘우리의 삼중의 위로(our threefold comfort)’를 말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간에, 이 작은 책의 위대하고 영원한 진리가 당신에게 영원토록 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당신의 교회가 교회의 신앙고백으로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을 영원히 품고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1년 7월 31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1주차(126문답)

이웃이 우리에게 해를 끼칠 때 그냥 넘어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자존심이 상했고 우리가 바라던 바를 잃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사실 우리 자신부터가 하나님께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고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 생각하게 해달라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기꺼이 도말해주신 것처럼 상대방이 자신에게 끼친 해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여러 번 거치게 되면 용서하는 게 쉬워집니다. 하지만 너무 심한 경우 죄값을 치르게 하고 싶어집니다. 그래도 그냥 용서해버리십시오. 공의의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가장 적절하게 판결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참을성 있게 바라보면서 용서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9-17절, 로마서 12장 14-21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7월 30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1주차(126문답)

주님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교환 조건, 즉 먼저 남의 죄를 용서해야 우리 죄가 용서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 죄가 모두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입장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흔히들 죄를 지은 상대방에게 “내 너무 상처가 크고 나쁜 일이라 그냥 넘어갈 수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기 자신부터가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죄를 용서받았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그 때에 감격에 겨워 어떠한 것으로도 다 보답해 드리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어떤 제한도 받지 않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3-35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지금 혹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21년 7월 29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1주차(126문답)

또 다시 죄를 용서해달라는 간구를 하려니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용서해달라고 할지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미 받은 은혜도 많은데 염치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만드시고 생명을 주시고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셨습니다. 우리가 모반을 계속하자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성신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위로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무슨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남을 탓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시간이 있지만 무시하기 일쑤입니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고 오래 참으시는 걸 알면서고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어떻게 이번에도 더 용서해 주시라고 요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심으로” 죄 용서를 구하라고 신앙고백은 답합니다. 누구에게나 피는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피는 죄 없는 하나님 아들의 피입니다. 얼마나 가치 있는 피입니까! 인간의 죄를 다 갚고도 그리스도의 피는 다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거스르는 죄는 말할 수 없이 사악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위로는 이렇습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많고 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피는 그것을 다 갚고도 마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게 확실합니다. 요한계시록 5장 8-10절, 베드로전서 1장 18-21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7월 28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1주차(126문답)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모든 죄를 고백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 앞에 가져와야 합니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벽한 거룩함에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토록 거룩한 분이신 하나님과의 화평을 위해서는 우리는 낱낱이 용서를 구해야 하고, 사죄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우리가 앞으로 지을 죄까지 모두 포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섭고 많은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지는 못합니다. 남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죄도 가지고 있지만, 구원자께서는 샅샅이 우리를 살피고 계신 중에 용서해주신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요한복음 2장 23-25절, 시편 139편 1-12절, 23-25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용서가 무한하긴 하지만, 오직 실제로 용서를 구하는 자만의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2021년 7월 27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1주차(126문답)

회개한 후 그리스도를 믿어 용서를 받았으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라고 또 기도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기 때문에 그러한 간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주님과 함께 거하며 완전해 질 때까지 우리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죄를 짓는 순간 우리는 평화, 주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깨어지고 맙니다. 유일한 결론은 다시 하나님께 나아와 우리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시편 32편 1-7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계속 죄를 짓는 데도 하나님의 용서가 한량 없으신 것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2021년 7월 26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1주차(126문답)

다섯째 간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즐거워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평화와 죄에 저항할 힘과 사후의 소망 등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화해되지 못한 한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합니다. 죄를 용서받아야만 하나님과 화해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받은 용서를 믿기에, 이웃을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이고, 그에 따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 드릴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행여라도 그렇지 않다면 지금 우리는 얼마나 끔찍한 상태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시편 130편을 읽어보십시오. 나의 용서를 바라는 누군가가 혹 생각나십니까? 바로 지금 기꺼이 믿음을 발휘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2021년 7월 25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1주차(126문답)

[제126문] 다섯째 간구는 무엇입니까?  [대답]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이렇게 하는 간구입니다. “주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마 6:14-15; 18:21-22, 35),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시 51:1; 143:2; 롬 8:1; 요일 2:1).”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 모범 기도의 다섯째 간구는 언뜻 오해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돈 채무를 언급하는 것입니까? 실제로 우리가 용서를 구하기도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면, 왜 우리는 계속해서 용서를 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용서의 공로가 아닌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이 이곳의 간구와 함께 발생되는 문제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음 요점들을 공부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입니다. ‘빚’이란 돈과 연계된 것이 아니라 누가복음 11장 4절에서처럼 죄와 관계된 것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즉 우리의 죄를 ‘빚’이라고 불렸습니다. 여기서 빚은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바대로의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과 순종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우리의 실패를 대표합니다. 신앙고백문답 여러 곳에서 설명하듯, 우리가 하나님께 지불해야 하는 순종의 실패로서의 빚은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징계의 빚을 의미합니다(예를 들어, 제12문답과 제16문답). 이 빚은 우리 스스로에 의해서는 결코 지불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제공되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사랑과 징계의 모든 빚은 지불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빚은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문답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그의 희생적 죽음)로 죄가 용서된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실하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용서에 대한 공로를 시작할 수 없고, 성취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죄들을 무상으로 용서하셨습니까? ‘우리의 다양한 죄(우리의 실제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의 죄)’, 그리고 항상 우리에게 붙어 다니는 우리의 사악, 타락한 본성 등입니다. 범한 죄(악을 행함), 태만의 죄(선행의 실패), 개인적인 죄, 공공의 죄, 의도적으로 행한 죄, 의도적이지 않은 죄, 대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우리 자신을 대적하고, 다른 사람을 대적하는 죄 기타 등등입니다.

둘째, 용서의 조건에 대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속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냈는데, 왜 우리는 반복해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까? 하나님으로 인하여 한 번 의로워지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계산이 영원히 청산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롬 5:1; 8:33).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죄들은 그 자체로 처벌을 받을만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도적적인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개인적 칭의에 대한 보증은 죄에 대한 계속적인 우리의 회개와 고백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고백과 용서에 대한 확신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정해 놓으셨습니다(시 32:3-5; 요일 1:9). 

이 간구는 우리에게 죄 지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을 가르칩니다. 다시 한 번, 이것은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진 돈 부채가 아닌 우리를 대적하여 저지른 죄를 가리킵니다. 우리를 향한 이웃의 모든 죄들은 진심으로 용서되어야만 합니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14-15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용서에 대한 거부는 자신의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를 적대하기 위하여 그것들을 붙잡아 두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받은 상처는 잊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용서한 사람을 실제로 용서했다고 단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대적한 모든 죄들을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까? 일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17장 3-4절은 회개하는 사람만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가르칩니다. 만약 그가 “’나는 회개합니다’라고 당신에게 말한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나 반복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허한 간청을 기대하기 전에, 우리는 상대방에게 사랑의 심정으로 먼저 책망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소위 범죄자라고 불리는 사람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의 용서를 구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알려 주었을 때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우리에게서도 용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함을 받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수들의 마음에 은혜로 역사해 주셔서 그들이 회개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항상 기도해야만 합니다(마 5:44). 우리를 대적하여 죄를 지은 악한 자들에게 악으로 갚으면 결코 안 되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고자 하는 신실한 바램을 항상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2021년 7월 24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50주차(125문답)

우리가 의지하는 ‘돈’, ‘지혜’, ‘힘’, ‘지식’, ‘자신의 의’, ‘사람’ 등등은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항상 그리고 언제나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엄밀히 말해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의 모든 필요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용할 양식을 주십사고 매일 기도함으로써 실제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동시에 훈련으로 삼고, 마침내 일상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업, 사람, 월급,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기에 앞서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편 3편 5절, 예레미야 9장 23-24절, 디모데전서 6장 17절, 히브리서 13장 5-6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솔직히 말해 지금 당신은 무엇을 가장 의지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