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보통 사극 같은 곳에 잘 등장하는 표현으로, "네 이노옴,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식으로 내리는 불호령이 있습니다. 요즈음 차원으로 보자면, 경찰이나 검사가 피의자를 취조하면서 "죄목이나 형량을 잘 선처해줄테까, 순순히 죄를 인정해! 당신이 죄인이잖소. 맞지!" 하는 식이겠습니다. 통상 효력 있는 부르심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볼 때에 이런저런 신학적 용어로써 설명하게 되는 일체의 것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제 죄를 제가 압니다!"라고 고백하는 데서, 그야말로 가장 뚜렷한 효력이 발생하는 것이겠습니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죄에 대한 '올바른 정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서 14장 7-8절을 읽어봅시다. 그런 다음, 제1문답에서의 긍정적인 고백이 지금 나에게 어떤 식으로 구체적인 열매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적 토론을 나누어 봅시다.

2019년 3월 1일 (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고린도전서 6장 11절을 읽어 보십시다.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각각의 위격이 거명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이해는 이중적이어야 합니다. 하나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이고 다음은 경륜적 삼위일체이겠습니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역사, 곧 구속사가 없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대해 이해할 수 없고,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전제되지 아니하면 경륜적 삼위일체의 역사가 베풀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는 것을 통해서, 의롭다하심과 양자로 입양됨과 거룩하게 하심을 얻는다고 한 이 고백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되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얻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설명할 필요를 느낄 때가 있습니까? 어떤 경우입니까?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2019년 2월 28일 (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칭의와 성화는 '이중은혜' 또는 '이중칭의'를 가리키는데, 모두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에서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이지만(칭의), 그렇게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게 된다는 것(성화)이 개혁된 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을 이중칭의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첫째는 죄인의 법정적 칭의이며, 둘째는 의로움을 얻은 자에서 일어나는 성화적 칭의입니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성화는 칭의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함께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은 이 부분과도 연결됩니다. 이 '이중칭의' 문제와 관련하여 혹 어떤 오류가 틈탈 수 있습니까?

2019년 2월 27일 (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알아 경외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부르심이 주는 유익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해준다는 데 있습니다. 반면, 효과적인 부르심을 입지 못한 이 세상은 우리의 이러한 변화를 알지 못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성경에서 통상 '안다'고 할 때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즉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떤 의미로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합니까?

2019년 2월 26일 (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오늘날 '의'라는 단어는 많이 애매해진 경향이 있습니다. 주로 사람 편에서 자신들의 이해에 맞게끔 정의하기 때문에 생각하기에 따라 들쑥날쑥합니다. 성경에서 '의'라는 단어는 이중적으로 사용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익히 잘 알려진 바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정적으로 선고하시는 의에 대해 '칭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칭의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데 대해서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의 그 저주스러운 '간단 신앙주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0을 읽어보십시다. 여기서 '의'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습니까? 네, '거룩함'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성화'이겠습니다. 그런데 신학적 용어에 아주 정통한 칼빈은 이 성화를 이중칭의라는 용어로써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이며,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합니까?

2019년 2월 25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우리가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는 기회에 통상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는 표현을 쓸 때, 이는 '저 세상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차 들어가서 살게 될 영원한 생명의 삶이 전제 되지 않으면, 굳이 이 세상의 삶이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세상에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러한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부터 느끼고, 확정하고, 견고히 굳혀 나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바로 '효력 있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므로 이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앞서 우리에게 이루어진 구원이, 지금 현재 능력 있게 우리에게서 작용하고 있는 데 대한 표증이자, 미래에 완성될 것에 대한 보증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2019년 2월 24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질문]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대답]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입양됨과 거룩하게 하심을 얻고, 또한 그것들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제반 유익을 얻습니다(롬 8:30; 고전 1:30; 6:11; 엡 1:5).

지난 제31문답에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간단히 말해서 소명이로되, 성신에 의한 유효적 소명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제32문답은 ‘유익’이 주제입니다. 성신에 의한 유효한 소명은 기본적으로 성도의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시는 것인데, 따라서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구속의 공효를 덧입게 됩니다.

제32문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공효에 대해 ‘칭의’, ‘양자 입양’, ‘성화’ 등의 세 가지 신학적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하이델베르크 제51문답의 경우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라고 물은 후 “첫째, 그리스도는 성신으로 그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를 부어 주십니다(행 2:33; 엡 4:8, 10-12). 둘째, 그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시 2:9; 시 110:1-2; 요 10:28; 계 12:5). ”라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거룩하게 하심을 얻고’라고 한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는 ‘성화’입니다. 첫째, 성도의 성화는 칭의의 경우처럼 단 번에 이루어집니다. 성도에게 이루어진 칭의가 어떠한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이루어진 거룩함도 어떠한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앞에 고백된 ‘양자 입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성화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에 약간 혼란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성화의 과정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도에게서 진행되는 성화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도덕주의’와 다른 것은, 성도의 성화에는 기독교적인 용어들이 따라붙는다는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실제로’ 성도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화 역시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지, 사람 편에서 성취한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능력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성화를 성취하고 있다’라는 인정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성화나 도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옷입혀지지 않는 한, 그 자체로는 여전히 전적 타락에서 나오는 그러한 것들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자들은 이것을 ‘이중 은혜’라고 하는 관점에서 옳게 파악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살이에서 성화를 이루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이를 받아주시는 것에 대해, ‘또 하나의 칭의’라고 본 것입니다. 물론 이 두 번째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영단번에 일어나는 ‘이신칭의’ 그 자체는 아니고, 그보다는 첫 번째 칭의가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 하에 주어지는 칭의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성도의 거룩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연합된 자로서, 그러한 생명을 자기 속에서 활성화시켜 주시는 성신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로 여겨주시는데, 그러한 차원에서의 이중 은혜 또는 이중 칭의이다 하는 말입니다.

성화의 개념을 이렇게 올바르게 파악하게 되면, 항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위 ‘성인 제도’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네들은 순교자들이나 특별한 신앙적 공로를 쌓은 사람들에게 ‘성인 칭호’를 부여하고,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섬깁니다. 심지어 성인들이 취득한 공로에 대해 잉여 공로처럼 여겨, 그것을 넘겨 받을 수 있도록 의지하게까지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성화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가납해 주시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 그 자체만으로는 여전히 썩은 하수구나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항간에 개신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특정인을 드높이고 그가 일반인들보다 더 뛰어난 성인인양 드높이고 떠받드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성화를 이중 은혜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성도에게 베풀어진 영단번의 칭의와 영단번의 성화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땔 수 없는 관계를 이루면서 상호 진위성을 보증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의롭게 된 자이기에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을 보니 의롭다 함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 그 자체를 칭의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화의 능력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주의 그 자체는 명백히 구원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도다”(고전 1:30).

 

 

2019년 2월 23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1문답

오늘날 소위 히트 치는 설교자들이 있어서 속칭 추종하는 펜 클럽도 있는가 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에 대해서는 '이야기주의'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 정확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웃기고 울리는 기독교적 감정주의 일색이 성신의 역사일 수는 없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신의 역사란, 항상 하나님의 영광과 결부된 진리에 대한 각성,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실천 신앙이 전인적으로 구현되는 데서 비로소 성립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의지 그 자체나, 설교자의 설득력 그 자체가 주가 되는 곳에서는 인본주의 종교현상만이 극대화될 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각별히, 그리고 항상 유념해야겠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4-5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여기서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한다'고 한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019년 2월 22일 (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1문답

성신의 역사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하늘과 땅을 뒤섞을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인 진리이지만, 이 진리를 애절한 심정으로 의지하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5장 39-40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연구했던 사람이었고, 이때 성경은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결국 성신의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입지 못한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5-6절 말씀도 보십시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고,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깊이 파고들지만, 정작 성신께서 진정한 깨달음을 준다는 진리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외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에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2019년 2월 21일 (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1문답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간으로서는 구원의 진리를 파악할 수 없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입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하지만 이 세상의 임금인 사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하지만 성신께서 효과적인 부르심을 베푸시게 되면, 우리의 마음에 내적인 조명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킬 구원자로서 다름 아닌 예수님을 유일한 분으로 보내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장 6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서로 나누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