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7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9주차(78-79문답)

고린도전서 10장 16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성찬에서 떡을 뗄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몸으로써 성취하신 구속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곳에 우리도 함께 있음이 더더욱 확신 있게 됩니다. 하지만 홀로가 아니라 앞뒤좌우에 앉은 지체들과 그렇게 합니다. 교회는 그 분의 몸의 입장에서 성도들 간에 자주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통하여 서로가 지체임을 더더욱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옛적에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릴 것이라고 예언했는데(슥 13:1), 성찬은 그 샘이 열린 것이고 완전한 정결이 이루어진 데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1년 2월 26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9주차(78-79문답)

고린도전서 11장 23절로 26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함으로 진지하고 엄숙한 시간을 갖습니다. 주님께서 처참한 고통을 당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마음은 슬퍼지고, 따라서 그러한 주님의 죽음을 자초한 우리는 죄를 더욱 더 미워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찬에서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을 통하여 단순히 그분의 육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넘어 그것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또한 성찬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도 선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로 하여금 이 성찬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은 구원하실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도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2021년 2월 25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9주차(78-79문답)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문은 “사나 죽으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입니다. 우리가 잘 될 때에는 겸손케 해주소, 슬픔이나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에는 위로를 주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죄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슬픔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죄로 일관하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않으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때 성찬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감당해 주신 고난을 상기시키며, 그분의 속죄의 공로를 우리에게서 활성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교회가 성찬을 자주 베풀수록 성도는 이러한 은혜에 더더욱 자주 사로잡힐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과 15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2월 24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9주차(78-79문답)

성찬은 우리의 몸이 생명 유지를 위하여 음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영적인 삶을 위해서도 반드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는 의미 이상의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으며,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우리가 직접 해낸 것처럼 여기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고, 진짜 우리와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로 9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께서 실제로 인간이 되셨고, 끝내는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죽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을 읽으십시오. 성찬에서 이것의 의미가 활성화됩니다. 성신께서는 주님의 백성을 하나로 연합시키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의 삶을 넉넉히 살 수 있도록 힘을 베풀어 주십니다.

2021년 2월 23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9주차(78-79문답)

세례에서의 물은 죄를 씻어주고 깨끗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피가 죄를 씻어줍니다. 성찬 역시 같은 의미의 성례입니다. 그런데 성찬에서 사람의 살을 먹고 사람의 피를 마신다는 개념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단어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로 하여금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시려 한 때문입니다. 영생을 위해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영생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그러한 분께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육신적인 양식을 먹는 것처럼, 영적인 삶에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7절로 51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2월 22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9주차(78-79문답)

마태복음 26장 26절로 29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과 피를 대표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지만 성찬의 빵이 진짜 육신의 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는 자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시거나 포도나무요 가지라고 말씀하실 때도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빵과 포도주는 일종의 비유요 상징입니다. 빵을 몸이라고 할 때 그것이 쪼개져 먹는 사람에게 영양을 주고 생명을 유지시켜주듯이, 영혼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포도주가 피라고 할 때도 역시 마시는 사람의 영혼에 생명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2021년 2월 21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9주차(78-79문답)

[제78문]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로 변합니까?  [대답] 아닙니다. 세례의 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것도 아니고, 죄 씻음 자체도 아니며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표와 확증인 것처럼(엡 5:26; 딛 3:5), 주님의 만찬의 떡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마 26:26-29). 주님의 만찬의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은(고전 10:6; 11:26) 성례의 본질을 나타내는 성례적 용어입니다(창 17:10-11; 출 12:11, 13, 26-27; 13:9; 24:8; 행 22:16; 고전 10:1-4; 벧전 3:21). 

첫째, 화체설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거절된 잘못(error rejected)을 살펴보겠습니다. 제78문답에서는 명백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를 거절합니다. (이 문답은 세례에 관한 잘못을 거절한 제72문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A.D. 1215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찬의 빵(떡)과 포도주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로 바뀐다고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화체설(transubstantiation [trans = 건너서(across); substantia = 물질(substance) = 물질이 다른 물질로 건너감)’이라고 합니다. 후에 신앙고백문답에 첨가된 제80문답에도 이곳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화체설을 다시 다룹니다.

화체설이라는 거짓된 가르침은 빵과 포도주가 기적적으로 참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정말이지 그 동안 다른 사람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의 발상입니다. 이 잘못된 교리는 주님께서 만찬에서 말씀하신 짧은 구절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26:26, 28에서, 제자들에게 빵을 주목하게 하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is)”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포도주를 주목하게 하시면서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is)”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손에 실제로 자신의 살 조각을 들었거나 자신의 피를 컵에 들었다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이다(is)’라고 한 단어는 ‘표시하다(represents)’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표시하였던(represent)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께서 “나는 문이다”(요 10:7)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나는 참 포도나무요”(요 15:1)라고 말씀하실 때, 문자 그대로 문이나 포도나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찌하든지 예수님께서 동시에 그 두 가지가 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는 문과 포도나무로 표시되었던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경만 왜곡시킨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도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빵(bread)이고, 빵으로 느껴지고, 빵 맛인 빵 조각이, 화학적 변화에 의해 진짜 사람의 살이 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런 것은 믿음(faith)이 될 수 없고, 반대로 말도 안 되는 미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들은 진짜(real) 기적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을 때(요 2:6-11), 그것은 진짜 성질의 변화였습니다. 당시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의 문답에서는 정작 왜 포도주가 아닌 빵만을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당시 그들이 ‘미사(mass)’라고 부르는 로마 가톨릭의 ‘성찬(Supper)’에서는 빵만을 사람들에게 주는데, 살 안에 피가 있기에, 사람들이 살(빵)을 먹을 때 피도 마신다고 주장하던 바를 염두에 두고, 잘못을 바로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한 가르침도 더 악한 의도에 따른 그들의 추론일 뿐입니다.

둘째, 루터교의 잘못인 공재설(consubstantiation [con = with])도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화체설과 다르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루터교 교리가 더 나은 것은 아닙니다. 공재설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물질적인 살과 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대신 빵과 포도주와 함께(with) 한다고 가르치는 이론입니다. 이 역시 성경과 사람의 일반적인 상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물질적 육체는 하늘에 있는 하나뿐입니다. 수 만개의 조각으로 찢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따라서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의 성찬상에 뿌려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영적이지 않고, 실제로 우리와 같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적으로 먹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의 축복을 받았다는 그러한 인식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문답에서 다루게 됩니다.

[제79문]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떡을 그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그의 피 혹은 그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또한 바울 사도도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까? [대답]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 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요 6:51, 53-55).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 사실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 먹는 것처럼 실제로, 성신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고전 10:16).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죄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롬 6:5-6, 8-9; 고후 5:14).

앞에서 주님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취할 때에 실제로 그리스도의 물리적인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데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부터는 그처럼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 때 실제로 무엇을 받게 되는 것인가를 배웁니다. 앞서 제73문답은 세례 성례에서 받는 확신의 은혜(the grace of assurance)를 가르쳤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이곳에서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때 믿는 자에게 받은 은혜에 대한 확신이 주어진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진실하다는 데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성례적 용어’에 친숙해져야만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외적인 표(outward sign)는 영적 축복 그 자체라고 종종 불려진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물은 ‘죄를 씻어낸다’(행 22:16)고 말하듯이, 성찬에서의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것들을 제대로 받게 될 때 은혜의 약속이 외적 요소에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외적 표는 표명된 것의 영적 은혜를 성신께서 전달하시려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세례도 주님의 만찬도 단순히 공허한 준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통해 은혜를 베푸십니다. 어찌되었든 성례는 개심하는 의식(converting ordinances)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되어야만 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임했거나 앞으로 임할 은혜(유아 세례의 경우)를 강화시켜 주고 확신시켜 줍니다.

이 문답에서는, 성찬의 표와 인 양면이 다시 강조됩니다(이미 제75문답에서도 강조되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피는 우리의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고 배웠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에 의한 축복은, 우리가 믿음으로 빵과 포도주를 받는 것처럼 성신에 의해 우리에게 인쳐집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점차적으로 확신되고(assured), 우리는 더욱 더 그리스도께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주님의 만찬의 목적과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위대한 영적 특권들 중의 하나로 여겨야 합니다. 주님의 축복된 상으로 가는 허락을 받기 전까지는, 신앙적으로 모든 것이 만족한 듯이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2021년 2월 20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8주차(75-77문답)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 앉아있는 어린이들은 성찬에 참여할 수 없어 섭섭해 합니다. 성찬은 간식 시간이 아님을 아이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기억하는 엄숙하고 진지한 시간입니다. 나를 위해 그분의 몸이 쪼개지고 그분의 피가 쏟아진 것을 기억할 때 슬픈 마음과 기쁜 마음이 교차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내 죄가 없어진 것은 기쁜 일이지만, 내 죄 때문에 예수님이 고통 당하신 것을 생각하면 슬퍼집니다. 나를 위해 인간으로서 가장 처참한 고통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면 더욱 슬퍼집니다. 내 죄 때문에 그토록 심한 고통을 당하셨으니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활성화를 위한 성찬은 간식 시간이 아니므로, 어떤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3절로 6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지금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2021년 2월 19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8주차(75-77문답)

세례는 일생에 한 번 받지만 성찬은 교회에서 반복해서 받습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인이 성장하도록 이끌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 읽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육적인 삶에는 영양공급이 필요합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을 너무 적게 먹거나 건강치 못한 음식을 먹으면 건강을 해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아예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생명은 존속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중생을 통해 성신께서 주시는 영적인 생명을 받았지만 영양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 기도, 성례를 통해 성신의 역사를 통한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이것은 믿음이 활성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더더욱 새롭게 되고 강건하게 되어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48절로 51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2월 18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8주차(75-77문답)

성찬식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활기차게 하시려고 우리의 영혼에 영적 영양을 주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기엔 한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힌 몸과 흘린 피는, 이제 성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 영생을 위한 우리의 양식이 됩니다. 요한복음 6장 31절로 33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일은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일으키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