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2일 (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4문답

로마서 8:15-17을 읽어 봅시다. 성도가 받은 영을 무엇이라고 합니까(15절)? 성신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한다고 한 말씀의 의미는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16절)? 성도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받을 영광을 위하여 지금 이 땅에서는 무엇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합니까(17절)? 이 사실과 관련하여 지금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충성하기 때문에 기꺼이 감당하거나 감수하고 있는 손실이나 희생 또는 열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십시다.

2019년 3월 11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4문답

요한일서 3:1-2을 읽어봅시다. 두 번이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주변에서 이따금 양자 삼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는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의 자녀를 실제로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은 하나님께서는 첫째,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부르시고, 둘째,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고, 셋째, 계속해서 양자로 삼아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제32문답에서 고백한 주제를 순서대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제31문답에서 고백하듯이 성신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것을 상속받음에 있어서 무엇을 가장 값진 것으로 제시하시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2019년 3월 10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4문답

[질문] 양자로 삼으심이 무엇입니까? [대답] 양자로 삼으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고(요일 3:1),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 들게 되고 자녀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출 4:22; 요 1:12; 롬 8:15-17).

제34문답의 핵심 단어는 ‘양자(養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함축하고 있는 부요함과 영광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그 중에 ‘양자 입양 사상’은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최인호의 ‘지구인’이라는 책에 보면 “그가 신부의 주선으로 새로운 집으로 양자로 입양될 때부터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 앞에 떳떳하게 내세울 수는 있는 성씨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처럼 양자는 혈연적으로 부모자식 관계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법률적으로 자식의 자격을 얻은 자를 일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 입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이 사실은 여타의 종교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탁월한 축복입니다. 물론 이 양자됨은 신분 취득과 그로 말미암은 특혜 획득에 핵심이 있는 것이지, 실제적인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게 되는 차원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두어야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의 이 양자 입양 사상은 상당히 오랜 동안의 계시 체계를 형성해 나왔습니다. 가령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로 여겨졌습니다(렘 3: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말씀하셨고(출 4:22), 이스라엘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려진 아이를 데려와서 키운 입양아로 묘사되었습니다(겔 16:6-7).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관계를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호 11:1)라고 말함으로써 ‘입양의 관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게서 다윗 가문과 맺은 언약에서도 보면 ‘입양’이라는 은유가 사용됩니다. “나는 그(다윗의 후손)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아들로 입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들로 삼으셨음에 대해 찬양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라고 선언하시자, 다윗은 “주는 나의 아버지요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시 89:26)라고 화답한 것입니다. 이상의 표현들은 이스라엘 나라에 등장하는 열왕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친히 아들을 삼았다는 것으로, 비롯 언약의 원조 다윗이 죽고 난 뒤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키우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시겠다는 데 대한 강조입니다. 이처럼 구약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들의 관계로, 즉 양자 입양의 이미지로 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속사 속에서 부단히 계승되어져 나온 양자 입양 사상은 마침내 참 다윗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의 주가 되심에 따라, 이제 성도들 개개인에게 매우 구체적으로 정용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마울은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변하는 양자 입양을 선포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돌립니다(갈 4:1). 헬라 로마 세계에서 입양되는 자녀는 원래이 친자식이 갖는 권리와 동일한 법적인 지위와 특권을 누렸고, 그에 따라 양부의 재산과 소유를 상속받는 상속자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자녀로 입양된다는 것은 이전의 소속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소속의 일원이 되어 그에 부합한 신분과 권리와 의무를 다 소유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상기한 사실을 전제하면서 이제 신앙고백문답이 고백하는 양자 입양 사상을 두 가지 핵심 사항으로 정리해보자면, 첫째, “양자로 삼으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인데, 둘째, 이로써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 들게 되고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거하는 것은 없다(요일 3:1)”라고 외쳤습니다. 계속 덧붙이기를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므로(딤후 2:13), 우리를 육신의 부모 이상으로 사랑하신다(시 27:10; 사 49:15; 63:16; 마 7:11)”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양자 입양의 확실성을 위해서 그의 성신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담대한 믿음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주십니다(롬 8:15; 갈 4:6). 이때 성도는 각각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개인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므로(마 23:9), 하나님의 자녀들 간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진심으로 나누는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서 ‘독생자의 충만’이 실현됩니다. 즉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라고 한 바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지금 바로 앞뒤에, 또는 좌우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혈육의 관계 이상의 실제성과 친밀함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자신에 대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긴다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2019년 3월 9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스가랴의 환상이 기록된 3:1-5을 읽어봅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의롭다고 하실 때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비전에 대한 것입니다. 이곳의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합니다. 스가랴는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죄를 뒤집어 쓰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주의 사자는 더러운 옷을 벗기게 하면서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다”고 선언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주의 사자는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아들께서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출현 형태를 가리킵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제거해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게다가 아름다운 옷을 입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죄만을 제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의까지도 덧입혀 주십니다.

2019년 3월 8일 (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오늘날 이신칭의 교리를 미묘하게 변질시키는 사탄의 아주 간교한 책략 중에 신앙주의(believism) 혹은 간단 신앙주의(easy-believism)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구원파' 같은 경우입니다. 이신칭의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를 나에게 은혜로 값없이 수여해 주셨다”는 데 있는데, 여기에는 이 사실이 믿어지고, 따라서 신뢰하면서 의지하는 행동이 뒤따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는 성신께서 성도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생명에 접붙여 주신 실제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파는 순전히 “내가 믿는다”는 데 강조점을 둠으로써, 하나의 소리를 자신의 입에서 뱉어내는 방식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이 아무 때라도 그런 식으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인양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와 신앙주의의 차이를 어떻게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2019년 3월 7일 (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당신이 빚을 져서 큰 곤란을 겪고 있는데 누군가가 대신 갚아준 까닭에 빚에서 해방된 경험이 혹 있습니까? 아니면 그러한 사랑을 베푼 적이 있습니까? 어떻든 간에 그런 경우 그는 더 이상 빚진 자가 아닙니다. 빚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고 해주실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빚을 갚아주셨기 때문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해주신 구속을 실제로 믿고 신뢰하는 일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줄기차게 예언되어져 나온 진리입니다. 사도행전 10:43을 읽어 보십시오. 지금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것은 성경의 어떤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까?

2019년 3월 6일 (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칭의에서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 받아주신다는 것(accepting us as righteous)'입니다. 물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데 방식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실 수 있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신 우리의 죄를 물으셨다는 사실이고, 바로 이 사실을 믿고 신뢰한다면,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원리입니다. 로마서 4:3-5을 읽어보십시오. 그런 다음 여기서 중요한 핵심으로 떠오른 믿음의 내용에 대해 선언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5:21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면 이제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한 말씀의 의미를 설명해 보시겠습니까?

2019년 3월 5일 (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은혜인 칭의의 중요한 두 가지 요소 중의 하나는 우리가 범한 모든 죄에 대한 '값없는 용서'입니다. 이 말의 좀 더 정확한 의미는 아주 최소한의 죄값조차도 치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 마땅한 형벌을 완벽하게 치르신 데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타인에게 입힌 죄까지도 실상은 당신께 범한 죄로 여기십니다. 이는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금하시기 때문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를 자연법(양심)으로써 인류 모두에게 제정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문법(성경)은 당연하거니와 이 양심법도 칭의의 필요성을 더더욱 갈망케 합니다. 시편 130:4을 읽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유하시는 목적을 확인한 후, 과연 우리는 이에 어느 정도로 반응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봅시다.

 

2019년 3월 4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누가복음 18장 9-14을 읽어봅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제쳐놓으시고 세리를 가리키시면서,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의롭다고 하신다'‘고 하는 사상은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의를 수여하시는 행동'을 가리킵니다(롬 4:5-6).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믿음을 ‘그의 의'로 여겨주십니다(창 15:6). 이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서도 ‘하나님 의'라고 합니다(롬 3:21). 이 각각의 ‘의'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확실하게 설명해 봅시다.

2019년 3월 3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질문] 의롭다 하심이 무엇입니까? [대답]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고(롬 3:24), 이로써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시 130:4; 롬 4:6-8; 고후 5:19) 우리를 자기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고후 5:21).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일이고(창 15:6; 롬 4:6, 11; 5:19),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행 10:43; 갈 2:16; 빌 3:9).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단체 같아 보이면서도 자칫하면 가장 부정직한 집단이 될 수 있는 그런 것에는 어떤 부류가 있겠습니까? 나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보아 정치 집단과 종교 집단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생선과 정치인은 사흘만 지나면 썩은 냄새가 난다!” 하는 말이 회자되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정치인의 활동 무대는 세상이라고 하는 곳에서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전체가 그렇게 부정직한 집단이 될 수 있다는 데서 이 주제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마음이 참담하기 그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키에르 케고르 같은 실존주의 신학자는 “자체적으로 커지고 부유해진 사실 때문에 실상은 도리어 망한 것이 있다면 유일하게 교회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겠습니까?

그러면 교회란 무엇입니까? 사실 성도들의 입장에서 가장 잘 아는 것 같지만 가장 잘 모르고 있는 것이 교회의 정체성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교회가 타락하는 것이고, 타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한창 교회 개혁 운동을 이끌던 중에 부딪히고 있던 이해하기 힘든(?) 어려움 앞에서 탄식하기를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열 사람에게 물어보면, 열 사람 모두가 각기 다른 대답을 한다!”라면서 탄식했다고 합니다. 학생이 자기다 다니는 학교를 모를 리 없고, 회사원이 자기가 다니는 회사를 모를 리 없겠지만, 유난히 성도들만큼은 자기가 속해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 아는 경우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아예 모른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교회에 대한 정의나 이해는 대체적으로 전문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일 듯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이해한 바대로 교회를 그렇게 실제로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지만 말입니다.

자신이 속한 단체의 성격이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단체의 일원으로서 활동하고 나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까지 하는 모순이 버젓이 상식이 되어 있는 영역은 참으로 교회가 유일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요즈음 교회의 모습은 무익하고 헛된 열심의 난무 속에서 온갖 상업주의만이 득세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교회원이면서도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 기괴하고 괴이한 현상(?)의 기저에는 대체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종교인들처럼 열정만 앞세우는 그런 천박한 종교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 이렇게 표현한 것은 현실을 강조하려 한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사람들은 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아니므로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노파심에서 고쳐 말해 본다면, 성경을 아는 지식은 없는데 열심만으로 영차, 영차 밀고 나가기 때문에 교회가 타락할 수밖에 없다 하는 의미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알지만(존재성), 그렇게 계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하다는 의미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네 동족이 구약 신앙을 계승한 그토록 복된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망해 있는 데 대한 원인으로 “저희가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요”(롬 10:2)라는 분석을 내어 놓았습니다.

호세아나 바울이 말한 지식이란 하나님의 뜻에 이해력, 즉 성경을 아는 실력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항간에 성경을 줄줄 외울 정도로 많이 아는(?) 경우를 혹 만납니다. 세밀하게 살펴서 읽는 정독이 아닌 하 다독이 무슨 의미일까 싶지만, 실제로 며칠 밤낮 동안 성경 읽기만을 하는 그런 세미나도 있어서 호왕(?)을 누린다고 합니다. 성경 읽기만을 주도해 나가는 월간지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매월 말이 되면 다음달 용의 QT집들이 기독교 서점 신간 코너에 줄지어 진열됩니다. 기독교인 가정치고 성경책 대여섯 권 없는 집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기독교 관련 신앙서적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모습들은 정작 제대로 읽느냐, 읽고 충분히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인 것 같습니다. 여하튼 실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 그토록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회에 대한 지식과 관련해서는 왜 이렇게도 빈약하고, 나아가 혼란스럽기까지 한 것입니까?

사실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이 글을 시작하고는 있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도 교회에 대해 딱히 무엇이라고 제대로 설명하는 문제 앞에서는 다소 난감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만큼 교회를 설명할 수 있는 특징은 실제로 다양하기 그지 없고, 그 깊이와 넓이는 물론이고, 구체적인 적용 문제까지 생각할 경우 가히 무한대의 사고력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교회사의 전통 속에서 나름 교회에 대해 스스로 내린 정의를 살펴봄으로써, 아니, 그렇게 할 때에 이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는 판단입니다. 단, 교회를 설명하는 일은 그에 대한 묘사를 얼마나 지식적으로 잘 전개하느냐의 차원보다는 깨달음의 차원이라는 것을 전제해 두겠습니다.

깨달음의 차원이라는 전제 하에 교회를 정의해보자면 이렇습니다. “교회는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다!” 이것은 필자가 지금까지 약 30여년 동안 나름 성경 교사로서 활동해 나오면서 최종적으로 얻게 된 교회론에 대한 집약적 표현입니다. 이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거니와 깨달음의 차원, 또는 경험적 차원에서 접근해볼 경우 아마도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경우가 혹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할 경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한 탄식은 “내 백성이 교회를 모르므로 망하는도다”라고 이해될 될 것이고, “저희가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요”는 “저희가 열심이 있으나 교회를 아는 것이 아니요”라고 이해될 것입니다. 십중팔구 그러리라고 판단됩니다.

“교회는 부활하여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얻게 되는 교회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러한 지식을 실제적인 신앙생활로써 구현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절묘한 묘사인가를 깨닫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근거는 성도의 생명은 예외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접붙여져 있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러한 사람들끼리도 예외 없이 연합되어 있다는 데 따른 것이로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공동체의 모든 생명활동의 원동력이 되신다는 데 따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