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8월 16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2주차(3-5문답)

제3문답: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어디에서 압니까? [대답]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알고 그로 말미암은 우리의 비참함을 압니다(롬 3:20; 7:7, 23-24).

제3문답에서는 죄의 근원에 관해 배우게 됩니다. 질문의 요지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그로 말미암는 비참한 실상에 대해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배워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해줍니다. 율법은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추악한가를 밝혀줌으로써, 인간은 단지 선하지 않을 뿐이라는 정도로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매우 악하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율법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율법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말하고, 그리고 순수한 사랑과 순종을 요구합니다. 순수한 마음의 자세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 자체는 우리를 순수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실 ‘율법’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때로는 구약의 ‘의식법(성막 의식, 제사장 기타 등등)’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유의 율법은 오늘날에는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율법이 ‘모세오경’과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주님의 법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종종 ‘율법’은 ‘십계명’으로 불리우는 ‘도덕법’을 의미하며,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도덕법은 ‘옳고 그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제3문답은 특별히 십계명에 관한 것인데, 다음 번 질문에서 가르치듯이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는 십계명의 어느 것이라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계시합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죄인으로 정죄되었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의 죄와 그로 말미암는 비참을 보여줍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그의 율법을 주셨고, 그것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말씀해주십니다. 율법을 내신 하나님은 가장 주권적이시고 전능하신 입법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에 여하 간에 불평해서는 안 되고, 어떠한 이의도 제기치 말고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제4문답: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2장에서 이렇게 요약하여 가르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레 19:18; 신 6:5; 막 12:30-31; 눅 10:27).

우리는 제4문답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핵심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명기 6:5을 인용하시면서 완전한 사랑만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랑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가슴, 마음, 영혼, 힘이 담긴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인데, 다른 말로 하여 하나님께 대한 전인격적 혹은 전존재적인 완전한 헌신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지극히 작은 흠도 없으리만큼 항상 완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죄인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을 완벽하게 사랑하지 못하는 데 따라 율법에 걸려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두 돌판을 두 부분으로 나누셨습니다. 첫 번째 부분(제1-4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두 번째 부분(제5-10계명)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오기 마련인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이 사랑의 법은 모든 구약과 신약의 도덕적 기초이며(율법과 선지자들), 참 종교와 성경적이고 언약적 신앙의 특권입니다.

제5문답: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대답] 아닙니다(롬 3:10, 20, 23; 요일 1:8, 10). 나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습니다(창 6:5; 8:21; 렘 17:9; 롬 7:23-24; 8:7; 엡 2:3; 딛 3:3).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다섯 번째 질문은 인간이란 철두철미 죄인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반대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사랑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키지 못하게끔 그렇게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령께서는 인간은 본성으로써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는 것을 부단히 깨우쳐주십니다. 이러한 상태를 ‘전적부패(total depravity)’라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기 자신과 세상과 심지어 사탄까지 섬기는데 민첩하여, 결과적으로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데, 왜냐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을 위하여 그를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려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인으로서는 실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일단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는 자연인으로서는 어떠한 종류의 선한 일도 행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 않겠습니까? 자연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연인은 율법을 겉으로만 지켜 통상적으로는 살인을 하지 않고, 도적질, 거짓말 그리고 간음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순종은 대체적으로 잘못된 동기나 자신의 이기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순종이 될 수 없습니다. 자연인의 ‘외적인 율법 순종'은 오직 ‘자신을 높이려는’ 데 따른 이기적인 이유 때문인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죄인인지라 참되게는 선한 일을 행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롬 8:8), 율법도 지킬 수 없습니다(롬 8:7). 성령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인간이란 애초부터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중생되지 않는 한, 그가 제아무리 최상의 덕행을 수행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쇠패한 잎사귀(filthy rags)’와 같다고 가르칩니다(사 64:6).

 

 

2020년 08월 15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1주차(1~2문답)

본래 자신이 위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누군가의 도움도 바랄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의 구세주께로부터 오는 평안과 위로를 누리기 위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절대적으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데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먼저 자신이 자신의 죄된 본성과 그 비참함에 대해 깨닫고 인정하는 단계에 이르러야만 가능합니다.

그런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행하신 일과 그것이 어떻게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엄청난 비참함과 위험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나면, 이제는 무엇을 하여 어떤 식으로 자신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소원이 생깁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성경을 통하여 말씀해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구원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자들이기에 이제는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이 신앙고백문답의 모든 내용도 우리가, ⑴ 첫째, 우리의 죄성과 비참한 상태를 깨닫고, ⑵ 둘째, 그러한 처지로부터 어떻게 구원 받았으며, ⑶ 셋째, 그 구원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옳은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디도서 3장 3-8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14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1주차(1~2문답)

자신에게 속한 자들을 위해 지금도 부지런히 일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여러 가지 놀라운 일들 중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님을 보내주신 데 있습니다. 성령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계신 세 번째 인격이시라는 데 대해서는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다른 두 인격은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아들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 연합되어 있는 자들의 심령에 찾아와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그러한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영생을 누릴 것에 대한 확신을 일으키십니다.

사람이 예수님께 속해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죄인 된 본성은 잔존하며 이 땅에 사는 한은 영원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망을 늘 갖게 됩니다. 현생에서는 결코 완벽히 해낼 수가 없는 소망이지만, 그러한 때에 성령님께서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이르지 못할 수준의 순종을 이끌어내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능히 새로이 창조된 본성에 걸맞은 살 수 있게 하십니다. 로마서 8장 2절로 3절과 16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13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1주차(1~2문답)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맞는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두 가지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신 것이고, 둘째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근거하여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속사에 성실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놀라운 일들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는 우리를 마치 눈동자와도 같이 살피시고 지키고 계십니다. 결국에는 그분만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그 어느 것 하나 그분의 통치아래 있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좋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들만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하시고, 그에 근거하여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의로우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보심으로, 다시금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슬프거나 안 좋은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약속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필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것임을 기억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토록 슬프고 상처가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게 하지도 못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영원히 멸망토록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과 27절로 29절,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12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1주차(1~2문답)

신실하신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많은 일들을 볼 때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다른 모든 필요들 역시 충분히 공급하실 것이라는 데 호리만큼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갖은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본래 죄인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죄를 묵인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심판자의 자리에 계십니다. 일단 죄인 한은 반드시 벌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질이 얼마나 나쁘든, 죄가 얼마나 많든 지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 그 자체로 결점이 없이 완전하시고, 죄를 모르시는 오직 단 한 분이셨던 까닭에, 그분의 죽음은 인간이 마땅히 겪어야 하는 심판으로서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피는 참으로 어마어마하게 숭고한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로 9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죄인이라서 문제가 되는 또 한 가지는, 우리를 증오하는 사탄이 바로 죄인의 통치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실 때에 사탄의 왕국으로부터 빼내어 당신의 빛의 왕국으로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드리고 있는 사탄의 권세를 차단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렇듯 우리의 가장 절망적이었던 문제마저 이미 다 해결해주신 예수님이시므로, 삶의 이런저런 크고 작은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주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어떻게 감사한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2020년 08월 11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1주차(1~2문답)

당신은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당신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 자신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 또한 당신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신변의 안전 문제도 결국 자기 자신이 보장해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이나 수단 역시도 스스로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니, 사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만 속해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불쾌하고 무서운 부담 그 자체라는 것에 대해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우리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러한 부담은 훨씬 덜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발적인 순종으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해 있던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내하시기까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그분께서 친히 피를 흘려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우리를 사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때 실로 필요에 합당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으므로, 우리가 또다시 죄로 인해 멸망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 크신 사랑으로써 자기 백성을 양육하시는 분의 보살핌 안에서, 사나 죽으나 우리의 몸과 영혼은 늘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3절과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10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1주차(1~2문답)

당신은 한 번이라도 “만약에 ...?”라고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크게 잘못된다면? 만약 나의 건강이 심각한 수준으로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질 가망성마저 없다면? 만약 나의 가정에 또는 부모님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기타 등등이 있겠죠.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온갖 종류의 나쁜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 좋은 일이란 것들이 겹치고 또 겹쳐서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조차도, 우리가 충분히 위로 받을 수 있을만한 무언가가 있기는 한 걸까요?    

시편 46편에서 저자는 “만약에 ...?”라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지진으로 땅이 뒤틀리고, 산이 흔들리면서 심지어 바다 한 가운데 빠진다면, 그러한 난리(?) 속에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극도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힘이 되실 것이요, 최악의 고통 중에서도 만날 수 있는 도움이 되십니다.

현재의 어떤 어렵고 힘든 고난이나 미래의 삶에 대한 염려마저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아무런 염려 없이 세상을 대면할 수 있다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즐기기란 정말 불가능합니다. 시편 46편 1절로 3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9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1주차(1~2문답)

제1문답: 살든지 죽든지 간에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요(고전 6:19-20), 살아서나 죽어서나(롬 14:7-9) 몸과 영혼이 나의 신실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고전 3:23; 딛 2:14).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자신의 보혈을 충분히 치르셨고(벧전 1:18-19; 요일 1:7-9; 2:2) 나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요 8:34-36; 히 2:14-15; 요일 3:1-11).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마 10:29-31; 눅 21:16-18) 그러한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심으로써(요 6:39; 10:27-30; 살후 3:3; 벧전 1:5), 참으로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합력하게 하십니다(롬 8:28). 나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신으로써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롬 8:15-16; 고후 1:21-22; 5:5; 엡 1:13-14), 이제부터는 나로 하여금 전심으로 기꺼이 그리고 신속히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롬 8:1-17).

제2문답: 이 위로의 기쁨 중에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만 합니까?

세 가지인데,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롬 3:9-10; 요일 1:10), 둘째, 나는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자유케 되는가(요 17:3; 행 4:12; 10:43), 셋째, 나는 그러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가 등입니다(마 5:16; 롬 6:13; 엡 5:8-10; 딤후 2:15; 벧전 2:9-10).

 

해설: 

기독교인의 위로는 특정된 것들을 아는 분량에 따라 달라집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더 많은 지식에 대한 추구는 그리스도인의 발전과 행복에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기독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거의 배우지 않는다면 성도로서의 생활은 연약해지고, 영적 삶에 있어서 마치 ‘아기’와 같은 수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유용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참된 위로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앙고백문답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배워야만 하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성경을 배우고 적용하는 일을 증진시켜 줄 삼중적 지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는 배워야만 하고, 둘째, 성경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하고, 마지막으로, 아는 지식을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여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죄의 본성과 비참을 알아야만 합니다. 죄에 대한 경험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죽을 수 밖에 없는 병 혹은 치료제를 결코 찾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우리의 죄에 대하여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만들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를 유발하도록 합니다. 

둘째, 우리는 죄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는 데 대한 확신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과 비례합니다.

셋째,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반드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화재가 난 건물 안에서 누군가에 의해 구조를 받았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분명히 감사를 표현할 것입니다. 그렇듯이 죄로부터 우리를 살려주시려고 자신 생명까지 내어주신 주님께 우리는 진실로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 번만 배우고 잊어버려야 하는 정도로 마지막 문제인양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지구상에서의 우리의 구원 받은 인생으로서의 의미란, 우리의 죄스러운 성품, 구속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더 배우는 일에 헌신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설교를 들어야 하며, 그리고 우리를 성숙시키는 세 가지 방면의 지식과 위로가 우리 마음에 심어지기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1. 나의 죄성(죄권): 문답 3-11
  2. 나의 구속(구원): 문답 12-85
  3. 나의 감사(봉사): 문답 86-129

2020년 08월 08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07문답

'아멘'은 지금까지 기도한 내용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소원과 확신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에서의 정의는 좀 더 깊습니다. "아멘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의미로, 내가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참으로 갈망하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라고 했습니다(129문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터인데, 이는 주기도문은 칼빈이 터툴리안을 인용하여 정의했듯이 '합법적인 기도(lawful prayer)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간절함을 앞세워 마구 쏟아내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주기도문의 정신과 내용에 일치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멘.

2020년 08월 07일(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07문답

예로부터 방언 또는 소위 방언 기도의 진위성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기도란 마치 신앙의 호흡과도 같다고 볼 때, 이 문제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확정 짓는 일의 사활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만일 주기도문의 정신와 사상으로써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설혹 방언과 같은 신비한 태도로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또는 반대로 주기도문의 정신과 사상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과연 방언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기나 하겠습니까? 실제로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들 중에는 방언 기도를 인정하는 것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의 무게를 실감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