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0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1주차(29-30문답)

구약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택하여 구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시고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믿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은 예외 없이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많은 종류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를 본받은 이스라엘은 이웃나라의 우상도 숭배하면서 동시에 여전히 하나님도 섬겨보려는 시도를 반복적으로 자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도처에서 오직 당신만이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은 전부 나무나 금속으로 된 것으로 그 어떤 것도 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이사야 45장 21절로 25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공표하시기를 세상의 모든 사람 곧 ‘땅의 모든 끝’이 당신께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현시대 사람들은, 세상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만큼 각기 다른 신도 존재할 수 있으며 자신들이 섬기는 신만이 다른 이들의 신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라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성경은, 세상에 진정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 계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서 인간에게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명하시기를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당신께로 돌이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당신 외에 다른 곳에서는 구원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2020년 10월 19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1주차(29-30문답)

마태복음 1장 21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누구시며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확실히 말해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좋은 선생 정도로만 여기기를 원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르침을 행하신 것은 사실이며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실제로 선생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분명 ‘구세주’를 뜻하였습니다. 현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우리네 삶을 더 풍요롭게 하시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거나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심으로써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오신 분 정도로 여겨지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른다는 것이 삶을 편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들고 고달프게 하는 것이라고 당시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들은 제쳐두고, 쉽지 않은 것들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가 못박혀 죽을 십자가를 직접 짊어 멘다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힘들 수 있는지를 이토록 생생하게 보여주는 비유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에 관해 정확히 아셨습니다.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고 그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성취하신 속죄에 근거하여 죄를 회개하고 당신을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우리네가 안고 사는 모든 삶의 문제가 바로 이와 직결된 것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문제들에 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 마가복음 10장 45절 그리고 누가복음 5장 32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0월 18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1주차(29-30문답)

[제29문] 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곧 구주라 부릅니까? [대답]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분이시기 때문이고(마 1:21; 히 7:25), 또 아드님 외에는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서도 안 되며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사 43:11; 행 4:11-12; 딤전 2:5; 요일 5:11-12). 

신앙고백문답 제29문답부터 52문답에서는 사도신경의 두 번째 문단부터 일곱 번째 문단까지를 설명합니다. 이 문단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 하나님에 대하여 논합니다. 신앙고백문답은 이 주제를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1. 그리스도의 이름과 직분 제29-34문답
  2. 그리스도의 다섯 단계의 굴욕 제35-44문답
  3.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설명 네 단계 제45-52문답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의미에 관해서부터 공부를 시작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많은 이름을 부여합니다. 일부는 천상의 별들로부터 취했습니다. 즉 ‘광명한 새벽 별’, ‘의로운 해’(계 22:16; 말 4:2) 등등인 것입니다. 일부는 화초의 왕국으로부터 취했습니다. ‘샤론의 수선화’, ‘골짜기의 백합화’(아 2:1) 기타 등등입니다. 일부는 동물의 왕국으로부터 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린 양’, ‘유대 지파의 사자’(요 1:29; 계 5:5) 기타 등등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더 많은 이름을 제공해 줍니다. 우리 구주를 위한 이 모든 이름들은 부요하고 광대한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의미심장한 표현들입니다.

구주께 대한 극히 일반적인 이름은 ‘주’,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 등입니다. 이곳의 문답에서는 ‘예수’라는 이름을 설명합니다. 예수는 ‘주께서 구원하시다’라는 의미의 구약 이름인 ‘여호수아’로부터 온 신약적 용어인 것입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라고 요셉에게 말했는데(마 1:21), 이는 ‘그는 자기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예수’라는 이름을 듣거나 읽을 때마다, 우리가 죄로부터 구원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의해서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치 구약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던 것처럼, 신약의 ‘여호수아’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천상의 가나안으로 인도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시고, 다른 문답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완벽한 구주이십니다.

[제30문] 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소위 성인들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찾는 사람들도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까? [대답] 아닙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님을 말로는 자랑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는 것입니다(고전 1:13, 30:31; 갈 5:4). 예수님이 완전한 구주가 아니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한 자들이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만 찾든지, 둘 중의 하나만 사실입니다(사 9:7; 요 1:16; 골 1:19-20; 2:20; 히 12:2; 요일 1:7).

제30문답은 예수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 ‘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설명을 추가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예수께서 구원하신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만이 오직 구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신앙고백문답이 기록될 때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단언하는 사람과는 달리, 오늘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주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가령,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에다가 소위 그네들이 주장하는 ‘성자들’을 포함시켰는데, 특별히 동정녀 마리아를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하듯이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에게도 기도를 합니다.

16세기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이단자 야곱 알미니우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유일한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그들은 사람 편에서 자신의 믿음을 발휘하여야 하고, 그에 더하여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돕지 않는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선행’과 교회에 등록하는 것이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더불어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을 율법주의자라고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하여 이러한 율법주의를 확실하게 반대하였습니다(갈 2:16-21).

이상의 사람들은 예수만이 오직 구주이시고 완전한 구주이시라는 진리를 참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에 맞서서,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의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믿음조차도 예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엡 2:8).

2020년 10월 17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0주차(27-28문답)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은 우리가 미래를 대면하는데 있어 자신감을 주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죄로 물든 세상을 살아갑니다. 살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어렵고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지 않는 이상, 우리 역시 언젠가 죽게 될 것도 자명한 일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우리가 끔찍이도 아끼고 함께하기를 즐겼던 많은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죽음을 맞기도 할 것입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이러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어떻게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신감을 갖고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것은 철저하게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의 일부가 아니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을 수도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적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몸을 뉘여 잠을 청할 수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했던 그의 믿음에서 비롯된 자신감 덕분이었습니다. 시편 3편 1절로 6절과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0월 16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0주차(27-28문답)

제28문답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묻고 있습니다. 일단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에 한에서만 도움이 됩니다. 만약, 전에 지은 죄로 인하여 당신이 여전히 하나님과는 적이라고 친다면,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무엇이든 하실 수가 있으며 당신이 그런 하나님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당신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적은 세상 모든 힘을 가졌는데 그것에 관하여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음을 깨닫는 것은 오히려 무서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대하여 아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안이 되는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아는 것은 당신이 어떤 것으로 인해 기쁨을 누릴 때에도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당신을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하는 누군가가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당신이 이것을 누릴 수 있도록 예전부터 이미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과 디모데전서 6장 17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은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감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것은 또한 크리스천들을 인내하게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내 맘 같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내 편이시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이용하실지 보기 위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그 또한 선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넉넉히 이길 힘 또한 함께 주시리라는 데까지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여정의 매 순간마다 우리와 함께하시고 보살펴주실 것임을 잘 압니다. 이사야 45장 7절과 시편 23장 1절로 4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0월 15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0주차(27-28문답)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기지만, 마음에 차지 않고 좋아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길 때면 그들은 그것을 단순한 사고, 또는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한 것이라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또는,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다 사탄의 개입에 의함이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좋은 일들만 관장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의 지배자시라고 가르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어느 누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일은 절대 일어나지 못합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이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신 이상 그분께서 가장 높으시며 가장 크십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으며, 그 누구라도 임의로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완성할 수 없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으며 그분의 작정 없이는 움직일 수도, 움직여질 수도 없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참으로 견디기 버거운 시련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면서 그러한 시련의 뒤에도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상기할 때에 그분께서 어떠한 고난을 허락하시든 우리보다는 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날 필요가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우리의 유익과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쓰실 것인지를 아십니다. 이 어려움의 뒤에는 하나님께서 계시며 선한 이유를 가지고 계시다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께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원치 않으셨지만 그를 막으실 만한 능력이 여의치 못하셨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위로가 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7절로 38절과 마태복음 10장 29절로 31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0월 14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0주차(27-28문답)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일체의 모든 것을 지배하십니다. 그 말은, 세상의 모든 번영과 빈곤의 배후에는 이유를 불문하고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말입니다. 번영과 빈곤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현대인들은 이 신앙고백문답이 쓰여졌을 당시의 사람들에 비하면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약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간단하고 사소해 보이는 질환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생명을 위협할만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요즘 의사들처럼 수술을 한다거나 할만한 지식이나 기술도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의학의 진보 뒤에는 인도하시고 제공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계시며 우리는 이러한 발전이 가져다 주는 혜택을 감사히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현대의학이라도 모든 병을 고쳐내지는 못합니다. 현대인들의 수명은 더 길어졌을지 모르나 그들도 언젠가는 분명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질병도 건강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출애굽기 4장 11절을 읽어보십시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하나님 손에 달려있습니다. 매우 극소수의 사람만이 정확히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 알 뿐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자신들의 죽고 사는 것을 결정해주심이 크리스천에게는 오히려 위로입니다. 시편 139편 13절로 16절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는 각 사람이 정확히 몇 일을 살고 갈 것인지 처음부터 이미 정해놓으셨습니다. 이해 안 된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2020년 10월 13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0주차(27-28문답)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은 수백 년 전에 쓰여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한다는 것은 대개가 논밭에 나가 일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기르는 것이 그들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비나 가뭄 등이 자신들의 생계 확보에 있어서 얼마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지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식량을 전세계로 운반할 수가 있습니다. 설령 당신이 사막에 산다 해도 여전히 마켓에 가면 타지에서 온 음식도 쉽게 접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부모님도 논이나 밭이 아니라 사무실로 출근하시겠죠. 하지만 여전히 변치 않는 사실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는 데는 하나님께서 일일이 주관하시는 원리가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이 노동의 대가로 돈을 벌지만 그렇게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땅의 식물이 자랄 수 있도록 비를 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이시며, 위와 같은 식품의 운반을 가능케 한 온갖 현대 문명과 과학의 성장 뒤에도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사람이 번창하여 큰 돈을 벌 때에도, 그럴 능력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기업들이 파산하고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또는 병에 걸려 일할 수 없게 될 때에도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우연으로 일어나는 일은 단 하나도 없으며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무엘상 2장 7절로 8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이것은 실로 엄청난 위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사랑하는 아버지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10월 12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0주차(27-28문답)

섭리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의미로 씁니다. ‘섭리’를 뜻하는 ‘프로비던스(Providence)’라는 단어의 일부가 '제공 하다' 또는 '공급하다'라는 뜻의 ‘프로바이드(Provide)’라는 단어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실제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부분은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과 호흡, 음식과 물을 공급하십니다. 살아있는 생물에게뿐만이 아니죠! 우주의 온갖 행성이며 별들이 각기 제자리를 유지하고 돌과 바위가 무너져 내리지 않으며 물이 흘러 바다로 모이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관장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전능하시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 당신의 창조물들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창조물들을 또한 지배하기도 하십니다. 크든 작든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께 무조건 복종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관심 둘 것 같지 않은 아주 사소한 우연의 일치마저도 하나님의 통제를 받습니다. 지상 최고의 왕이나 통치자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세우셔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최고로 강력하다는 천사나 악마라도 하나님의 의지 앞에 복종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 벨사살에게 그의 부친인 느부갓네살에 관한 이야기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느부갓네살 왕을 미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하여 인정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왕으로 살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으로 인함이라는 것 말이죠. 다니엘서 5장 18절로 21절을 읽어보십시오. 느부갓네살 왕이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달은 바대로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나라와 모든 천사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다니엘서 4장 34절로 35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0월 11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0주차(27-28문답)

[질문] 하나님의 섭리란 무엇입니까? [대답]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시 94:9-10; 사 29:15-16; 렘 23:23-24; 겔 8:12; 마 17:27; 행 17:25-28),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히 1:3).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렘 5:24; 행 14:17),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잠 22:2; 요 9:3)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잠 16:33; 마 10:29-30). 

제27문답과 28문답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교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하나님의 섭리 교리’를 고백합니다.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창조한 분이시라는 데 대한 고백입니다. 창조는 단 한 번에 진행되었는데, 6일 동안에 걸쳐 모든 것들이 연속적으로 한 번에 실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들을 돌보시는데,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틴어에서 온 이 섭리라는 단어는 ‘그전에 보는 것’이라는 뜻)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는 창조 사역을 돌보고, 통치하고 그리고 보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섭리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써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무가치하게 되거나 소멸되는 상황에 처해지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지키고 보존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섭리 교리는 창조 교리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영역에는 당연히 죄와 악도 포함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와 악을 자신의 영원한 계획 속에 포함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그들을 사용하지 않으셨다면, 그것들은 결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암 3:6), 하나님께서는 죄를 항상 미워하신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신 25:16).

이 우주 안에서는 비록 급작스럽게 발생하는 사고라 할지라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란 하나도 없고, 아무리 세세한 부분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로써 다스려집니다. 수많은 별이 뿌려져 있는 광대한 하늘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현미경으로도 보기 힘든 가장 작은 원자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지배됩니다. 우리의 삶도 우연한 운명이나 행운 혹은 운수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통치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습니다(마 10:29-31).

만약 하나님께서 6일 동안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면, 그리고 창조 사역을 완전히 끝내셨다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령, 기적이란 창조 사역 혹은 섭리 사역 중에 무엇에 속하는 것일까?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이 부르심에 따라 물질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기적의 일종인데, 마치 과부를 위해 생겨난 기름(왕상 17:8; 왕하 4:1)의 경우나 5000명을 먹였던 음식의 경우처럼(요 6장),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추가된 창조 사역을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력을 비롯하여 기타 등등에 대해 통상 ‘자연법칙’이라고 표현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러한 법칙들을 제정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고 나아가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는 언제라도 필요 없게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적 그 자체에 대해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랑의 섭리로써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마 6:33; 딤전 4:8).

 

[질문] 우리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섭리로써 여전히 보존하심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은 어떤 것입니까? [대답] 우리는 어떤 역경에서도 인내하고(욥 1:21-22; 시 39:9; 롬 5:4-5; 약 1:3), 형통할 때에 감사하며(신 8:10; 살전 5:18), 또한 장래 일에 대해서도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굳게 신뢰하여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확신합니다(시 55:22; 롬 5:4-5; 8:38-39). 모든 피조물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여 일어나거나 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욥 1:12; 2:6; 잠 21:1; 행 17:25-28).

사도신경의 첫 번째 조항의 마지막 문답인 제28문답은 하나님의 백성을 모든 것들의 주관자이시고 공급자이시고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아는 데서 얻게 되는 위로에로 안내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의 생과 사를 주관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우리의 생활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칩니다. 통상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세 가지 기독교인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역경 가운데서 인내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번창하는 일에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확실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므로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언제나 우리를 영원한 선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피조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피조물’은 동물, 인간, 혹은 천사처럼 살아 있거나 그렇지 않는 모든 창조된 것들을 가리킵니다. 하늘에 있는 태양이 되었던지 혹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되었던지 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의지로부터 분리 혹은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어떤 특별한 고통이나 어려움 혹은 슬픔에 처할 때라 할지라도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축복이 된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살아 있는 것들, 즉 인간 등과 같이 생각하는 피조물은 자신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지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선택과 결정을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서로 독립되고 분리되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하나님의 ‘은밀한 의지’, 혹은 ‘예정된 의지’와 섭리는 다른 모든 피조물의 의지까지도 통치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 또는 의지는 인간 의지의 모든 행위들 속에서도 항상 이루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을 때에도, 그것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행 2:23; 4:26, 28).

이것이 인간의 이해에는 신비의 영역이지만, 여하튼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어떤 것도, 어떤 경우에도 아주 작은 점의 점만큼도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잠언 19:21과 사도행전 17:28을 봅시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의지)에 관해서는 또 다른 설명도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 혹은 하나님의 ‘명령된 의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하나님의 의지 또는 뜻도 결코 죄인에 의해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정된 의지(은밀한 의지)’와 ‘계시된 의지(명령된 의지)’ 등의 두 가지의 하나님의 의지가 있음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둘의 신비한 관계에 대해서는 결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신 2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