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8월 26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3주차(6-8문답)

낙원은 세상에 죄와 죽음이 들어오기 전 상태의 에덴 동산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유발할만한 슬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전부 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지음 받은 사람들은 완벽했으며 온전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즐길만한 훌륭한 것들로 세상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니, 감사만 드리기에도 한없이 부족할 분이신 하나님께 불복종한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사실 얼마나 괘씸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동산의 수많은 나무 열매들 중에서 딱 한 가지만, 오직 한 가지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아담 부분을 타락시킬 요량으로 그것을 먹어보라면서 온갖 감언이설을 다 쏟아냈고, 결국에는 그러한 꼬임에 넘어감에 따라 우리의 시조는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불복종하는 참담함을 초래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 1절로 6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는 태초에 일어난 이 불복종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물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높은 지위로부터 추락하기를 스스로 자처한 사건입니다. 이후로 인간은 심술궂고 사악해져 죄스러워졌습니다. 이 땅에서의 온갖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일들이 전부 그렇게 된 타락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은 그러한 인간의 타락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상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존재인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심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여전히 계속될 것이었습니다. 전인류의 타락과 멸망이라는 사상 최대의 비극을 모면하기에 넘치고 족한 엄청난 위로가 바로 그러한 계획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2020년 08월 25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3주차(6-8문답)

시편 8편 3절로 6절을 읽어보십시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은, 사나 죽으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첫 번째 문답으로서 시작합니다. 사실 정말 큰 위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서는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철저하게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이 계시되, 행여라도 그분이 악한 존재였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차고 넘치실 정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끝없는 사랑을 고스란히 쏟아주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고대 종교들은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를 제시할 때에 그들을 자신의 하인 삼거나 제물로 취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그들에게 선을 행사하고 자비를 베푸심으로 크신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롭고 거룩하신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그에 따라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영원한 행복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길 원하셨습니다. 이사야 43장 10절과 7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24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3주차(6-8문답)

창세기 1장 26절로 31절과 19장 1절로 2절을 읽어보십시오. 인간이 다른 피조물에 비해 월등히 우수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창조물은 인간이 유일무이합니다. 심지어 천사들조차도 그렇지는 못하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우리는 제한적이라는 것만 빼면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 같다는 의미입니다. 작은 하나님들이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음을 잘 나타내주는 한 예로 선함과 거룩함과 의로움이라는 특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습니다. 짐승이나 새, 물고기와는 달리 사람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차이를 압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까닭에 사람을 만드심에 있어서도 그러한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당신의 사람이 되고, 당신께서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시어, 그들을 향한 당신의 크신 사랑과 선하심을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누리며 살게 하려 하셨습니다.

만약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거룩하고 의롭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아마도, 하나님으로서도 그들과의 친밀한 교제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가 본래 온전히 거룩하시며 죄와는 무관한 분이시기에,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우리 역시도 그러해야 함은 아주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2020년 08월 23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3주차(6-8문답)

[제6문답]: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악하고 패역한 상태로 창조하셨습니까? [대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창 1:31), 그리고 자신의 형상(창 1:26-27), 곧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창조하셨습니다(엡 4:24; 골 3:10).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마음으로 사랑하며, 영원한 행복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리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시 8:4-9; 계 4:11).

제6문답과 7문답에서는 인간의 죄성의 기원 또는 원인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비난하지 않는 사람은 비난 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죄성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죄 있는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 자신의 창조자를 비난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가 한 변명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하나님께 대들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와를 주신 데 대해 원망한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을 범했을 때, 자신의 죄성을 옹호하려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대체적입니다. 혹은 기껏해야 “나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었어!”라면서 핑계를 댈 것입니다.

신앙고백문답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결코 악하게 창조하시지 않았고, 확실히 선하게 창조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었을 때 지니게 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인데 이로써 짐승과 구별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영원한 영적 생명을 지니고 있는 인격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인격성은 지(mind) 정(affection) 의(will)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담은 지성으로써 자신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정으로써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지로써는 의와 거룩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수 있기 위하여,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그러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써 타락하고야 말았습니다. 향후 그의 후손일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은 아담의 부패성이 자신에게 유전된 데 따른 선천적인 악함과 부패로 말미암아 아주 작은 점의 점만큼이라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약 1:13-18).

[제7문답]: 그렇다면 이렇게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대답]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타락하고 불순종한 데서 왔습니다(창 3:1-24; 롬 5:12, 18-19). 그때부터 사람의 본성은 심히 부패해졌고 우리는 모두 죄악 중에 잉태되고 출생합니다(시 51:5; 요 3:6).

제6문답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부패와 타락한 본성에 대한 원인자가 아니심으로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으십니다. 대신 원칙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비난을 받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우리의 처음 부모는 자신들 스스로의 의도적인 불순종으로써 죄를 지어 타락하였습니다. 아담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아 죄성의 존재가 된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자의적 행동에 의해 초래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은 아담의 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담이 범한 죄는 자신만의 성품을 완전한 죄악으로 채우게 되는 그런 정도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죄된 본성은 이후의 모든 인류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본성’이 ‘부패하였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태중에서부터 부패되었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어머니의 뱃속에 자리잡게 될 때부터 부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탄식했습니다. 로마서 5:12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선포합니다. 이러한 구절들은 진정 아담이 범한 한 가지 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고, 그러한 죄로 말미암아 부패한 삶을 살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죄의 원인이 되게 한 이 아담의 죄에 대해 ‘원죄’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는 총체적으로 타락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든 사람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사람의 성품은 선한 법이므로 교육을 잘 받을수록 더 나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교육, 돈, 행복한 환경 등등이 사람의 질을 향상시키기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정반대로 가르칩니다. 애초부터 아담은 거룩하고 행복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아주 고귀한 자로 창조되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써 타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게 되었고, 행복하지도 않은 자가 되었습니다.

썩은 사과의 부패한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인간의 모습이 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전체 생애를 통해 본성으로서 행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은 오직 악하고 사악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완벽한 존재였던 아담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죄를 지었습니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단지 우리로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서 만족할 뿐입니다. 이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의 한 부분인 것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한 비난과 책임은 아담에게만 남게 되었고, 지금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께 미룰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닙니다.

[제8문답]: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대답] 그렇습니다(창 6:5; 8:21; 욥 14:4; 사 53:6; 딛 3:3). 우리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니다(요 3:3, 5; 고전 12:3; 고후 3:5).

제7문답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죄의 기원 혹은 근본은 사람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지 하나님과는 상관 없습니다. 제8문답은 인간은 어떠한 선한 일도 수행할 수 없고, 도리어 모든 악한 일만을 행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정말이지 심각하게 악해진 것입니다.

인간 영혼의 이와 같이 타락한 상태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게 되었는데, 이것을 신학적으로 ‘전적 부패’라고 칭합니다. ‘부패’라는 명사로 번역된 라틴어는 ‘구부러진, 어긋난’의 의미를 지닌 ‘디프라바레(depravare)’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부패하다’는 것은 곧은 길로부터 벗어나 ‘구부러졌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의의 곧은 길’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죄에 사로잡혀 있기에,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변질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듭나게 되기 전까지는, 인간의 마음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 있고, 오로지 이 세상만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불경건하고, 선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엡 2:12). 진실로 인간은 거듭나게 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거룩한 생각을 한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고픈 마음을 품는다거나,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 순종한다거나 기타 등등의 경건의 영역에서 철저히 무능력해졌습니다. 인간은 부분적으로가 아닌,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인간의 의지는 물론이고 양심조차도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이 전적 부패 교리가 의미하는 바는, 믿지 않는 사람인 경우 전적으로 사악한 행동만을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참된 의미는 항상 ‘그럴 경향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나름의 믿지 않는 자들도 나름 사람이 보기에 선해 보이는 그런 일들을 하곤 합니다. 가령 그들은 의사로서 봉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돈을 기부하기도 하고, 품위 있는 시민으로서의 행동도 하고 기타 등등 선한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유의 소위 ‘선한 일들’이란 것은, 여전히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눈으로 보시기에는 전혀 선하지 않습니다. 자연인에게서의 ‘선행’과 ‘친절’은 항상 사람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이지, 결코 하나님을 향해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인간의 원천적인 무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악을 행치 않는 데서도 자유롭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케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도록 요구 받고 있지만,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처해 있는 전적 부패의 상태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부터 자리잡고 있는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성신에 의해 거듭나는 것만으로, 즉, 하나님의 성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패한 마음이 영적인 생명을 지니게 되는 데서일 뿐입니다.

2020년 08월 22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2주차(3-5문답)

죄는 온갖 종류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인간의 삶 속에서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 이어지는 것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서 옵니다. 그러므로 본래는 하나님의 선하고 거룩하신 성품대로 지음받았던 인간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죄인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정말이지 절망스럽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대신 아담처럼 죄짓는 쪽을 택하며 살아가는 현실을 볼 때면 너무도 딱하고 한심합니다. 이런 죄의 본성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도 비통해 하시면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려고 우리 자신과 주변까지도 아프게 한다는 사실은 우리로서는 슬프지만 인정해야만 하겠죠. 게다가 이런 비참함을 해결함에 있어서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되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고, 우리의 성품 전체에 물들어 있는 이런 죄성은 우리가 그 무엇을, 어떤 수단을 쓴다고 한들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이사야 59장 9절로 13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처해 있는 이러한 불행과 비참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비로소 우리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비참함을 알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비이십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처지를 알지 못하고서는 의사를 찾아갈 수 없듯이, 우리도 우리가 처한 이 불행을 모른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일 리 만무이기 때문입니다.

2020년 08월 21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2주차(3-5문답)

교회 육아실에는 딱 두 아이만 있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기본적인 말 몇 개 밖에 할 줄 모르는 그토록 어린 나이였습니다. 두 아이 모두 참 귀여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천진난만해 보이는 어린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칙적으로는 둘 다 죄인이었습니다. 이 말이 마음에 거슬립니까?

이제 그에 대한 증거를 보십시다. 육아실은 매우 큰 편이었고 주방놀이, 미끄럼틀, 자동차와 트럭을 비롯해 그 외에도 수많은 다른 장난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 내내 그 아이들이 반복한 것은, 한 명의 아이가 무언가 가지고 놀기 시작할 때마다, 실컷 다른 것을 하고 있던 나머지 아이가 갑자기 그것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남자 아이가 장난감 접시를 집어 들면, 여자 아이는 이미 갖고 놀던 접시들을 팽개치고 오직 남자 아이의 접시를 빼앗으려 들었습니다. 여자 아이가 미끄럼을 타러 올라가기 시작하면, 남자 아이는 반대편에서 딴 놀이를 하고 있다가도 ‘내 차례야!’라고 외치면서 달려들었지요. 작은 벤치 한 쪽에 먼저 앉아있던 여자 아이는 남자아이가 반대편으로 다가와 앉으려고 하자 다리를 쭉 뻗어 앉지 못하게 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그런 정도로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서로 상대방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도록 방해하면서 그렇게 저녁 시간을 다 보냈습니다. 아이들의 이런 행동은,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남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신앙고백문답의 내용을 참으로 잘 설명해줍니다. 로마서 3장 13절로 17절과 19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20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2주차(3-5문답)

만일 우리가 항상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언제나 내 자신을 사랑하듯이 우리의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즉, 굳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아담 안에서 결코 그렇지 못합니다. 본래 의로운 상태로 지음받은 아담이었으나 그는 스스로 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악한 상태가 된 이래로 줄곧 그의 죄된 본성은 후손들에게 대대로 전달되게 됩니다.

이러한 죄의 가장 주된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땅에서 최고의 칭송과 사랑을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성에 사로잡혀 있는 까닭에,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곤 하는 것입니다. 싫어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여전히 빵점입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그렇다면 하물며 이웃을 향해서는 어떻겠습니까?

마음 속으로는 그러지 않아야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결국 그와는 반대의 행동을 했던 숱한 순간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가령, 그다지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거나, 성경 읽기에 게을렀다거나, 설교 시간에 헛된 공상에 정신을 빼앗겨 건성으로 말씀을 들었던 많은 날들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보다는 내 자신을 더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죄된 본성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만 있다면 항상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의 기쁨을 늘 먼저 앞세우곤 하는 것이죠.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과 18절로 19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19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2주차(3-5문답)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명에 대해, 자신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는 일이 꼭 그렇게 힘든 일만은 아닙니다. 정말 힘든 것은, 그러한 타인을 향한 사랑의 정도 문제로, 곧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이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점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욕구보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더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는 출장 가던 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문득 큰 부상을 입어 길가에 쓰러져있던 한 남자를 발견하게 되었죠. 그로서는 중요한 볼 일로 상당히 바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상당한 사람을 보살펴주는 일에 소중한 하루를 다 소비해버렸습니다. 그는 자비를 털어가면서까지 그를 숙박집에 데려다 주어 묵게 해주고 기타 그의 회복을 위해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마련해주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다시 돌아와 지불하겠으니 필요한 것이 생기면 주저치 말고 일단 해결해 달라고까지 당부했답니다.

만일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매 번 저렇게 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 자신을 위한 시간과 돈은 정작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수준의 사랑이란 적어도 이와 같은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 앞에서 지금 우리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10장 25절로 37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18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2주차(3-5문답)

마태복음 22장 34절로 40절을 읽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율법의 여러 계명들 중 어느 것이 가장 크냐면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별로 어려울 게 없어 보이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데, 우리라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닫는 과정에서, 예수님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만큼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했던 사람은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의 영광을 다 버리시고, 게다가 기쁜 마음으로 이 땅으로 내려와 기꺼이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죽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가에 대해 한 번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여럿이서 차에 탈 때에 좋은 자리를 남에게 내어놓는다거나 또는 케이크나 피자에서 맛 있는 부분을 누군가에게 양보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모님께 늘 즉각 순종하셨고 다른 형제들과도 결코 다투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주 기도로 밤을 지새셨습니다. 우리는 단 몇 분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힘들게 느껴지곤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러기는커녕 실상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 대해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에서, 참으로 많은 경우를 통해 경험하고 또 경험합니다.

2020년 08월 17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2주차(3-5문답)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위로가 진정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면하게 되는 그 어떤 고난과 시련일지라도, 족히 이겨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그러한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또한 누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아닌 사탄에게 복종하기를 선택한 이래로, 모든 인간은 전인격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죄가 우리의 본성 전체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성은 악합니다. 우리의 의지도 악합니다. 죄라면 마땅히 인지해야 하는 우리의 양심마저도 악해서 점차적으로 죄에 대한 자각조차도 무뎌져 갑니다. 그런 식으로 심지어 마음까지도 악한 우리이지만, 그리하여 실제로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 아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여겨버리는 식으로 자신을 스스로 속이곤 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우리 죄와 그로 말미암아 처해진 비참함을 깨닫고 그러한 상황으로부터 구원해주시는 당신께로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가 그분의 백성된 자로서 살아감에 있어 마땅히 따라야 할 규율이로되 완전한 의로움과 성스러움을 기준 삼은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자신이 남들에 비해 꽤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비교 대상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벽한 율법일 때,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죄에 찌들었는지, 그래서 구제불능 상태에 있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서 율법의 모든 계명을 최대한 완벽하게 지키고자 혼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였지만 ‘탐심을 금하는 율법의 계명’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바로 그 율법 앞에서는 자신도 별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의 속에서 죄가 맹렬하게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7장 7절을 읽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