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1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7문답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합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에 보내심으로써 택한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계획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는데, 이 일은 다시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즉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모든 역경, 즉 수난과 죽음을 포함합니다. 높아지심은 예수님께서 예전부터 누리시던 상태로 회복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천상에서 영광을 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2019년 1월 20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7문답

[질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무엇입니까?  [대답]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은 그분이 강생하시되 그처럼 비참한 형편에 태어나셨고(눅 2:7; 고후 8:9; 갈 4:4) 율법 아래 나셨으며(갈 4:4),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비참함을 겪다가(사 53:3; 눅 9:58; 요 4:6; 11:35; 히 2:18) 하나님의 진노와(시 22:1; 마 27:46; 사 53:10; 요일 2:2) 십자가의 저주의 죽음을 받으셨고(갈 3:13; 고전 15:3-4; 빌 2:8), 장사되셔서(사 53:9; 마 27:59-60; 행 13:29; 고전 15:3-4)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 거하신 것입니다(마 12:40; 행 2:31).

제27문답에서 고백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여러 단계들은 상세히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사도신경과도 연결시켜서 살펴버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한국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지옥에 내려가시고’가 없이 신앙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지옥에 내려가시고’라고 한 부분이 제27문답에서는 모호하게 진술된 것입니다. 물론 핫지(A. A. Hodge)는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을 해설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을 때에 장사되어 ‘얼마 동안 죽음의 권세 아래에 계셨다’라는 부분은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 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지만 약간 억지(?)의 느낌이 있어 어색합니다.

먼저, 개혁교회는 사도신경에서 그리스도의 비하의 최종 단계를 ‘지옥에 내려가셨다’라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한국 개신교가 사용하는 성경책과 찬송가 속지에는 공통적으로 사도신경이 실려 있는데, ‘지옥에 내려 가시고’라는 구절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이 이 부분을 명백히 가르치는 바와 배치됩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44문은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말이 왜 첨가되었습니까?”라고 묻고, “내가 큰 고통과 중대한 시험을 당할 때에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옥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고 거기에서 풍성한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그의 모든 고난을 통하여 특히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아픔과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친히 당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라고 답합니다.

1894년 언더우드 선교사는 한국 교회 최초로 찬양가를 발행하였는데 이때 ‘지옥에 내려 가시고’라는 구절이 정확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이후 1905년에 선교사 공회의가 ‘찬송시’를 발간하였을 때에도 ‘지옥에 내려 가시고’라는 내용은 계속 게재되었습니다. 하지만 감리교측에서도 선교사 존스와 라즈월어와 번커가 1897년 10월 15일에 찬미가를 편집하여 출판하였는데 이때 ‘지옥에 내려 가시고’라는 부분을 빼놓았습니다. 이후로도 감리교는 1905년에 이르기까지 세 차례에 걸쳐 사도신경을 개역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지옥에 내려 가시로’ 부분은 싣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한국 교회는 각 교파에 따라 각기 자신들의 찬송가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05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찬송가를 합칠 것을 결의하였고, 작업에 들어가 드디어 1908년에 장◦감 연합공회의는 262곡으로 구성된 통일된 찬송가를 펴냈습니다. 이 찬송가는 1931년에 감리교가 ‘신정 찬송가’를, 1935년에 장로교가 ‘신편 찬송가’를 별도로 사용하기까지 초교파적으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찬송가의 사도신경에 ‘지옥에 내려 가시고’ 부분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이후부터 한국 교회의 찬송가에서 더 이상 ‘지옥에 내려 가시고’ 구절은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초기 사도신경 판본에는 이 내용이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존 칼빈은 이 부분이 초기의 사도신경 판본들에 실려 있지 않다 할지라도, “극히 유익한, 따라서 버려서는 안 될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필요하다”(2.16.8)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칼빈의 해석은 명쾌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육체적 죽음만 죽으셨다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만족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혹독한 보응을 받는 일도 필요했다”(2.16.10).  그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지옥의 세력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맞서 ‘직접 맞붙어 싸우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죽음을 담당하셨다는 것과 … 하나님 앞에서 우리로서는 볼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2.16.1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으로도 고난을 당하셨으며, ‘저주받고 멸망한 인간의 두려운 고통’을 견디셨습니다. 이러한 고통 가운데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신 것입니다. “이 부르짖음이 영혼 깊은 곳의 고통과 번민에서 울려 퍼졌다”(2.16.11)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승리의 개가가 울려 퍼진다고 합니다.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죽음의 공포와 지옥의 고통을 안고서 마귀의 권세와 직접 맞붙어 싸우심으로써 그것들을 누르고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죽음 앞에 설 때 우리의 왕이 삼켜버리신 것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2.16.11).

정리하자면,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다룰 때 사도신경과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을 통하여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표현까지 포함하여 다룹니다. ‘한국식(?) 사도신경’에 길들여져(?) 있는 장로교의 경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은 잘 모르는 채, 소신앙고백문답에만 익숙해 있는 편이어서, 대체적으로 이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9년 1월 19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6문답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땅에서는 물론이지만 최종적인 날에 원수들을 완전히 파멸시키실 것입니다. 승리자 예수님을 묘사한 요한계시록 19장 11-16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다른 구절에는 예수님의 원수들의 모습도 나옵니다. 그들은 강하고 잔인합니다. 예수님과 한 판 전쟁을 벌이려고 모여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4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위대한 왕이시니 끝까지 우리의 구원자로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믿음과 확신은 지금 현재 이 땅에서부터 경험되는 데서 그 궁극적인 승리도 보장되는 것이겠습니다. 왜 그런가에 대해, 과거에 받은 구원의 '현재적 작용' 차원과 이에 근거한 '미래의 궁극적 완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설명해보시겠습니까?

2019년 1월 18일 (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6문답

요즈음과 같은 날에도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업을 얻지 못해 가족을 부양하기 힘든 나라도 있습니다. 심하면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 사탄이 교회를 이긴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실한 남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교회는 결코 파괴되지 않는다고 선언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에베소서 1장 20-23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므로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셔서,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승리를 얻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란,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좀 더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 성립되어 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 당신이 속해 있는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각기 한 가지씩 제기해 봅시다.

2019년 1월 17일 (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6문답

왕이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되, 선하신 모든 것을 베풀려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질병이나 신체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때도 있지만 심하게 아프거나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하면 급작스럽게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하튼 간에 주님께서는 가장 적절하게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구원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어떠한 영적인 대적으로부터도 보호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사탄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지만, 구속의 왕이신 예수님은 자기의 백성을 여하한 경우라도, 그리고 단 한 명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8장 31-39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무엇이고, 그에 따라 요구되는 핵심 사상은 또한 무엇입니까?

2019년 1월 16일 (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6문답

사도행전 9장 10-19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아나니아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순종'하는 모습을 눈여 보십시다. 그는 사울이 박해자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에게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진심이었지만, 주님께는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원칙 앞에서 기꺼이 사울에게로 갔습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을 사용하시는 예수님은 이번에는 사울에게 특정한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이것은 많은 고통이 요구되는 일이지만, 사울은 기꺼이 순종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왕에게 불순종하는 백성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사울이 순종한 일로 말미암아 향후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게 드러났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왕이신 예수님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살든지 죽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고 하시는 이 절대적인 명령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무슨 증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2019년 1월 15일 (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6문답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시는 데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합니다. 비록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러한 성향은 성도에게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신을 보내셔서 반역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왕이신 자신에게 복종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끝끝내 완성에 이르게 하십니다. 이것을 구속적 통치라고 합니다. 로마서 8장 35-39절을 읽어보십시오. 성신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통치가 성도에게서 효과를 내게 해주시는데, 이를 위해서 사용하시는 수단이 말씀입니다. 이렇게 성신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이 성도에게 작용케 하시는 최고의 방식은 예배인데 왜 그렇습니까?  혹여 당신의 입장 또는 경우는 어떻습니까?

2019년 1월 14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6문답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왕을 세우신 것은 장차 최고의 왕의 도래를 계시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왕들은 미래에 오실 구속적 통지자의 모형이로되, 자신들의 불완전을 통하여 완벽한 왕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가령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최고의 왕이었지만, 여전히 죄에 넘어졌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대로 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뜻만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서 통치할 완전한 왕에 대한 소망은 더욱 간절해졌는데, 이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게끔 하는 죄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데서  비로소 참된 왕이 된다는 계시로 발전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왕적 권세는 자신을 속죄물로 바치는 헌제사역과 연결되었습니다. 왕의 직분이 제사장의 직분 및 선지자의 직분과 연결되어 있는 원리에 대해 설명해봅시다.

2019년 1월 13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6문답

[질문]: 그리스도께서 왕의 직분을 어떻게 행하십니까? [대답]: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우리를 자신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보호하시며(시 110:3; 사 32:1-2; 마 28:18-20; 요 17:2; 행 15:14-16; 골 1:13), 그분의 모든 원수들, 곧 우리 원수들을 제어하시고 정복하십니다(시 2:6-9; 110:1-2; 슥 9:9; 마 12:28; 21:5; 고전 15:24-26; 골 2:15; 계 19:15-16).

소신앙고백문답 제26문답은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에 대해 다룹니다.  이전에 선지자의 직분(제24문답)과 제사장(제25문답)의 직분을 다룬 것을 기억하십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속자로서의 사역을 삼중적 직분을 수행하시는 방식으로 성취하셨다고 한 바대로 순차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제23문답).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의 왕의 직분은 우리네 세상 세계의 경우와는 달리 철저하게 영적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권은 ‘본질상 영적이다(Its nature is spiritual)’라는 것을 잘 깨달을 수 있어야,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효력과 혜택과 기타 모든 힘과 영원성을 가치 있게 추론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2.15.3).  그에 의하면, 이 그리스도의 영원성(eternity)은 그리스도의 위격(단 2:44)과 백성의 구원에 적용되는데(눅 1:33), 교회 전체를 위한 것과 각 교인에 대한 것 이렇게 두 가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손 안에서 교회는 영원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시 89:35-37). 하지만, 솔로몬이 죽은 후 다윗의 나라가 붕괴되었으므로(왕상 12장; 왕하 24장), 이 말씀의 진정한 실현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서 자기의 지체들과 결합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니(사 53:8), 그리스도가 영원한 권능으로 무장하신 데서 교회는 어떤 원수들의 위협 하에서도 확실히 영속하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시 2:2, 4; 시 110:1). 둘째, 그리스도의 영원성 안에서 성도들 각 사람은 축복된 영생 불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요 18:36). 따라서 그리스도의 왕권이 영적이라는 말에서 우리 각 사람은 용기를 내어 더 좋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붙잡아야 하고, 이 생명이 지금부터 이미 그리스도의 손에 의하여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결실을 기다려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왕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왕께서는 성신으로 출중하게 되시사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으로 충만하게 되셨습니다(사 11:2; 45:7). 당연히 이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성신을 한량 없이 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요 1:16, 32, 3:34; 엡 4:7; 눅 3:22; 요일 2:20, 27). 성신께서는 그리스도를 거처로 정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하늘 보화가 그를 통하여 풍부하게 흐르게 하셨습니다. 신자들은 이러한 분이신 왕에게서 힘을 받게 됨에 따라, 이제 영적 보화가 풍부하여 불굴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게 되니,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가운데 반드시 완전한 영광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 세계에 안착하게 됩니다(고전 15:24, 28).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최고의 왕 그리스도를 대리로 세워 교회를 통치케 하시려고 그를 당신의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엡 1:20-23; 빌 2:9-11), 진정한 주이시고(고전 8:5-6), 왕과 입법자이시고(사 33:22), 왕과 목자이십니다(시 2:9; 110:6). 우리는 현세에서도 이런 일들을 경험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통치의 최후 단계인 최후 의 심판에서는 완전한 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왕권은 영적인 까닭에, 평생 십자가를 지고 싸워야 하는 어렵고 가련한 우리의 지상 생활에서 그 힘과 효력이 확실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 그리스도에게서 우리가 약속받은 행복은 외면적인 유익이 아니고, 영적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즉 이 지상에서의 육신적으로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 많은 재산, 아무 해도 받지 않는 안전한 처지, 육신이 보통 동경하는 풍부한 오락 기타 등등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천상 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본성에는 애초부터 없었던 성신의 은사를 받게 되고, 영적 원수들의 공격이 어떠할지라도 능히 방위력을 강화하여, 우리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인 ‘성신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게 하시니(눅 17:20-21; 롬 14:17), 부패해버리고 말 지상적이며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 생명의 영원에 이르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에서 불행과 기근과 멸시와 비난과 그밖의 괴로움을 겪게 될지라도 잘 참고 견디며 나그네처럼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성도의 왕께서는 결코 성도를 궁핍하게 버려 두지 않으시고, 필요한 것을 주실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싸움을 끝내고 개선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데 따른 것으로, 여기에 그리스도스의 통치적 특색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기의 권능으로 무장시키시고 자기의 웅장한 미덕으로 장식하시고 자기의 부요로 풍부하게 만드셔서, 우리가 힘써 자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풍부한 이유가 되게 해주십니다. 실로 마귀와 죄와 죽음을 상대로 두려움 없이 싸우게 하시니,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자답게 세상의 모든 비난을 초월할뿐더러, 또한 은혜를 받은 자답게 그에게 영광이 될 만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영적 통치권에 안주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연히 그의 몸된 교회에 한 지체로서 잘 서 있을 때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2019년 1월 12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25문답

구약의 제사장들은 완벽한 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예시였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장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죄인이었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을 수밖에 없고, 구약의 제사장들은 수천 번의 희생제사를 드렸지만 예수님은 단 한 번으로 충분하셨을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용서와 죄로부터의 씻김이 장차 일어날 날을 소망하게 한 것에 불과하였지만, 예수님은 실제로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11-14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이렇게 예수님은 다시는 죽으실 수조차 없게 되셨으므로, 그에 따라 영원한 우리의 제사장이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이 진리가 우리에게 구원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십니까? 그에 대한 증거를 무엇으로, 또는 어떻게 제시하시겠습니까? 당신의 그러한 증거가 참되다는 것은 또한 어떻게 혹은 어떤 방식으로 증명되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