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9월 05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4주차(9-11문답)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에 대한 대가로 내리시는 처벌, 곧 육체와 영혼에 가해지는 끝없는 고통이라는 것은 언뜻 보기에 너무 과한 처사로 보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형벌이라니요? 이것은 특정 악행에 대한 대가로 가해질 수 있는 형벌들 중에서 가히 최고형입니다. 그 까닭은 사람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거스르고 도전한다는 의미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누구나 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자이십니다. 만일 당신이 맏형의 말에만 거역을 했어도 꾸중을 면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 사람이 맏형이 아닌 아버지였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형에게 불순종했을 때보다는 훨씬 큰 곤혹을 당하지 않을까요? 그것은 가정에서 큰형보다 아버지의 권위가 훨씬 더 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유 위에 최고의 권위자이십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 불순종을 행사할 권리는 없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우리는 모든 좋은 것으로 우리를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데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로부터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배척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구원의 길마저도 거부하는 죄인들을 최고형으로서 다스릴 것을 요구하기에 정의는 정의답습니다. 시편 2장 1절로 6절과 로마서 2장 4절로 5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04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4주차(9-11문답)

하나님은 분명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덕에 죄인은 마땅히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언제나 모든 죄를 예외 없이 처벌하셔야만 하는 것이죠. 어떻게 그런 양면성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에게는 자비로우신데 죄 자체는 반드시 벌하셔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위대하시고 지혜로우시며 또 전능하셔서 죄는 벌하시면서도 동시에 죄인들에게는 자비를 베푸시는 방법을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해놓으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심판 받게 하실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허락하신 길은 유일하게 그것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방식의 구원을 거부하는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견뎌야 하는 것은 순전히 자기들의 몫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19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03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4주차(9-11문답)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인자하시지만 또한 만유의 공의로운 심판자이십니다. 만일 재판정에서 판사가 혐의가 확증된 살인자를 풀어준다면 아주 잘못된 일이겠죠. 그런 의미에서 보건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만유의 심판자께서 죄를 묵인하신다면 그보다 더 부당한 처사도 없을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은 물론 나아가 온 세상에까지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저주는 인류가 자행한 죄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현시대에서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자기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심각한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들은 때로 죄를 짓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그렇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면서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는 우리에게 내리신 최악의 형벌 중 하나입니다. 가책을 느낄 줄 모르는 무딘 양심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전환할 기회를 점점 상실시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주는 부담을 떨쳐보려고 온갖 시도를 하곤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농담을 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고민하기를 거부하며, 여전히 육체의 본능을 따라 쾌락위주의 삶을 유지해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날과 죄에 대한 진노를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그때는 회개해봤자 이미 너무 늦을 것이고, 그들에게 주어질 형벌은 여전히 호되며 끝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로마서 1장 28절로 32절과 요한계시록 6장 15절로 17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02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4주차(9-11문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분노하시고 죄를 짓기 때문에 진노하십니다. 우리가 타고난 죄성을 인하여 분노하시며 일상에서 자행하는 죄 때문에도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일컬어 진노의 자식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종말의 때에 임할 심판에 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천국에 펼쳐져 있는 책들을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의 모든 행위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해 죽음에서 깨어난 자들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책에 기록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심판 받았습니다. 책에 기록된 대로라면 그들은 전부 불구덩이에 던져지고도 남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환상 속에는 위안이 될만한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바로 ‘생명의 책’이라는 또 다른 책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생명의 책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앞의 책에 자신들에 관한 내용이 어떻게 기록되어있든지 상관없이 불구덩이에 던져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구원으로 인한 기쁨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의 타고난 악한 본성과 결과적으로 따라붙는 죄의 행태들은 원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 역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20장 11절로 15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01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4주차(9-11문답)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교회 안의 가난한 자들을 고루 도울 요량으로 성도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맡기곤 했는데, 그때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들의 땅을 판 돈 중 얼마를 감춰 놓은 채 일부만 내놓았으면서도 전부를 그렇게 한양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죽이신 후 뒤따라 삽비라 역시 죽여버리셨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징계였습니다.

고라과 다단, 아비람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이들은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대항하여 반역을 조장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서 불길이 솟구쳐 나와 반역자들의 일부를 소멸하더니, 이어서 대지가 갈라지면서 나머지도 전부 집어삼켜버렸습니다(민 16장).

노아에 관한 이야기라면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지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이 오직 악하기만 한 데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시어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멸망시키셨습니다(창 6-9장).

우리는 이렇게까지 엄하고 강력한 하나님의 형벌을 그리 자주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분께서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많은 시간 동안 잊고 지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의 폭발은 결코 비정상적이거나 유별난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형벌들은 죄를 향한 하나님의 확고하시고 변함없으신 진노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실례들입니다.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와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죄를 미워하시고, 언제나 그러하시며, 죄에 관한 한은 예외 없이 엄중하게 분노하신다는 사실을 늘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나훔 1장 2절로 8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31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4주차(9-11문답)

교사가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가르쳐준 적도 없는 고등 수학을 숙제로 내주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부모라고 마켓에 가서 우유 좀 사오라면서 심부름을 시킬 때에 면허도 없는 10살짜리 자녀에게 자동차 열쇠를 건네주겠습니까? 우리 사람으로서도 그러할진대 하나님께서는 대체 왜 율법에서 우리가 행할 수도 없는 것들을 지키도록 요구하셨을까요? 부당하다고 생각되진 않나요?

하지만 하나님의 요구와 위의 예문과는 사실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5학년짜리 아이에게는 원래부터 고등학교 수학을 풀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10살짜리 아이 역시, 운전면허를 가져본 적조차 없었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처음 인간은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필요한 모든 능력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별 생각 없이 하나님 대신 사탄에게 순종하기를 선택함으로 한 순간에 그 자격과 능력들을 포기해버리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그런 어리석고 사악한 선택으로 인하여 그들은 인간을 위해 준비해두신 하나님의 좋은 선물들을 자신에게서는 물론 후대의 사람들에게서까지 빼앗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담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우리들조차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탄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훌륭한 창조물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지만 사람들은 고의적으로 그것을 외면합니다. 죄악된 인간들은 율법에 순종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그들 스스로가 죄악된 선택을 한 결과인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8절로 23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8월 30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4주차(9-11문답)

[제9문답] 하나님께서 사람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의 율법으로써 요구하신다면 이것은 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대답]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율법을 행할 수 있도록 창조하셨으나(창 1:27; 2:16-17;), 사람은 마귀의 꾐에 빠져 고의로 불순종하였고(창 3:4-6, 13; 요 8:44; 딤전 2:13-14), 그 결과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도 하나님의 처음의 선물들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롬 5:12). 

이 질문에서의 핵심은, 사람은 하나님께 어떠한 참된 복종도 가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하나님은 사람에게 완벽한 복종을 요구하신다고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내가 당신께 드릴 수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한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성경은 율법을 통하여 인류에게 여전히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것을 요구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2:36-40에서 율법사에게 율법의 대강령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말씀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라고 하신 바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전적부패에 사로잡혀 있는 죄인들에게 온전한 사랑과 순종을 요구하실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전적인 책임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학생이 시험을 치르는 날 고의로 학교를 빠졌다면, 낙제를 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선생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의 모든 후손은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이므로, 하나님의 동일한 요구는 그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빠져 있는 전적부패의 원인은 에덴 동산에서 누리던 의를 저버리고 죄로 떨어져버린 데 따른 것으로, 즉 타락의 결과입니다. 아담은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능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따라서 그는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영적 능력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태초의 에덴 동산에 있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시 아담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무엇을 하였든지 그 결과는 그의 후손인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더욱이 아담의 불순종은 무지나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매우 고의적인 것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아담이 스스로 자초한 원죄의 흉악한 결과는 여지 없이 우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책망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온전히 사랑하고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의무에서 빈번히 실패하는 것은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10문답]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순종과 반역을 형벌하지 않고 지나치시겠습니까?  [대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죄와 자범죄 모두에 대해 심히 진노하셔서 그 죄들을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의로운 심판으로 형벌하실 것입니다(창 2:17; 출 20:5; 34:7; 시 5:4-5; 7:11-13; 나 1:2; 롬 1:18; 5:12; 엡 5:6; 히 9:27).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고 선언하셨습니다(신 27:26).

제9문답에서 보았듯이 죄에 대한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어떤 면으로도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제10문답과 11문답에서 배울 것은 ‘죄의 결과’에 대한 것입니다. 죄의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징벌입니다. 제10문답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아주 불쾌하셨다’는 것과 그에 따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어지는 제11문답에서는 하나님께서 왜 그다지도 불쾌하셨는가 에 대한 설명인데, 곧 하나님의 공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의로운 본질과 그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는 모든 죄에 대해 형벌을 내리심으로써, 자신의 완벽한 의와 거룩이 명예롭게 되는 것을 요구합니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 행위이고, 하나님께서는 이 반역에 대해 완벽한 증오로써 싫어하십니다. 죄는 하나님 통치에 대한 반역이요 공격이기 때문에 마땅히 처벌되어야 합니다.

제10문답에서는, 첫째, 하나님은 어떤 죄를 처벌하시는가, 둘째, 하나님은 언제 죄를 처벌하시는가를 배웁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죄인입니다. 우리의 부모인 아담으로부터 상속받은 천성적인 죄의 본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악한 본성은 하나님의 미움을 초래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 있어서의 죄로 인해 역시 죄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부패한 마음에서 나오는 썩은 열매들입니다. 이렇게 두드러지게 구별되는 죄된 행동들은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저주를 받기에 합당합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중적으로 죄인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언제 심판하십니까? 신앙고백문답은 지금 당장에도 받고 이어서 영원한 지옥에서 계속해서 심판을 받는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서 살아갑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병, 고통, 전쟁, 사고, 재해(홍수, 불, 토네이도, 기타 등등), 기타 또 다른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과 그와 같은 악이 초래하는 모든 것들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것들은 이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지는 명백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되는 때에 영원한 징계를 받기 위해 지옥에 보내져 끊없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 하면서 고통스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8:12; 13:42, 50).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의 처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제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이를 내세우고 의지하는 사람들조차 누구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책에 따라 판단컨대 타락한 상태에서의 죄인들의 행위는 결코 받아 들여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11문답]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자비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대답]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한 분이시지만(출 20:6; 34:6-7) 동시에 의로운 분입니다(출 20:5; 23:7; 신 7:9-11; 히 10:30-31). 죄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엄위를 맞서 짓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는 이 죄에 대해 최고의 형벌, 곧 몸과 영혼에 영원한 형벌을 내릴 것을 요구합니다(나 1:2-3; 마 25:45-46; 살후 1:8-9).

신앙고백문답 제11문답을 통해서는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 배웁니다. 오늘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이유들 중의 하나로, 하나님은 사랑이 많은 분이시므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결코 지옥으로 떨어트리는 징계를 가하지 않으신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자기자신만의 거짓된 희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이 당연하지만, 또 다른 속성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을 취소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죄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워 필히 징계를 받게 하십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시다면 하나님은 거룩하시지 않고 정의로우시지도 않고 공정하시지도 않게 됩니다. 하지만 명백히 하나님은 하늘의 아버지로서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동시에 어떠한 죄도 눈감지 아니하시는 지극히 엄위한 분이기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보다 지옥의 심판에 대해 더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는 성경구절들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죄를 눈 감아주는 거짓 설교자들을 더 신뢰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는 분이시라는 말을 할 때에 얼마나 정확한 의미로 그렇게 하는지를 정리해봅시다. 먼저, 하나님은 죄를 지은 죄인이라면 반드시 심판한다는 의미입니다. 죄는 인간에게서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을 떠나 그 자체만이 심판을 받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신다고 가르칠 때, 그것은 그러한 죄를 지은 죄인을 미워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우리의 모습이 이러하므로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이에서 능히 용서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드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반복하거니와, 우리는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처하게 되었고 이어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지옥은 각기 다른 단계의 징계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이유는 각 개인마다 각기 다른 분량의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눅 12:47-48). 그러나 죄가 크든 작든 또는 많든 적든 간에, 죄를 범한 죄인들인 한 예외 없이 지옥에서 받아야 하는 형벌에 대해서는 입으로는 도저히 표현키 어려울 것입니다.

죄인은 자신에게 임하는 형벌의 날에 대해 ‘바깥 어두운데’라고 표현되는 이 장소에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8:12).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진노만이 맹렬히 나타날 것입니다. 그곳은 죄인들의 양심의 증거와 하나님의 율법의 정죄로 인한 영원한 고통의 세계인데, 심지어 구더기조차도 죽지 않는 그런 풀무불과도 같습니다(마 13:32; 막 9:48; 계 20:12). 진실로 지옥은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매우 두려운 곳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라도 그곳에 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도 경고할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십시다.

2020년 08월 29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3주차(6-8문답)

로마서 8장 1-2과 에베소서 2장 8-10을 읽어보십시오. 비참하고 암담하기만 했던 이번 주의 신앙고백문답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담겨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죄로 물들었고, 애초에 죄인인 상태로 태어났으며, 모태에 있을 때부터 부패하였고, 오직 온갖 악에만 치우쳐 있어서, 온전한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완벽한 불능의 상태였지만, 성신을 통해 거듭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위로에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해주시려고 성신님을 보내신다는 부분이 핵심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죄 중에 죽어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제 성신을 통하여 거듭나게 되면 선물로 새 생명을 받고 소생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고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됨은 물론, 그분께 넉넉히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의 자녀로 뒤바뀌게 됩니다. 인간이 이 땅에 사는 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기는 불가능하겠으나, 그럴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신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감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부여 받았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당신의 생명이 지금 천상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 그래서 그 생명력이 당신의 인격적 활동을 통해서 구현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믿음이란 이 문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2020년 08월 28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3주차(6-8문답)

잠언 17장 3절과 창세기 6장 5절을 읽어보십시오. 겉모습을 두고 비교할 때에 다른 사람에 비하면 내 자신이 꽤나 괜찮아 보일 때가 가끔은 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비록 결코 대놓고 살인을 한적은 없을지라도, 얼마든지 내 맘 깊은 곳에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상태조차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발적으로 선한 일도 수행하고 희생마저도 감내한다 해도, 그것이 정말 이웃의 행복만을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동기의 순수성까지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기도 중에 우리 마음에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거나 내심 기도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바램이 잠깐 드는 것조차도 하나님께는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선행을 하는 것 같아도 그 와중에 우리도 모르게 틈타는 죄된 생각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 헤아리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문답은 말하기를, 우리는 지극히 작은 선이라도 지극히 작은 점의 점만큼도 행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중에도 여전히 악에 치우쳐있고 악에 이끌리는 것을 우리 자연인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악은 마치 자석처럼 우리를 잡아당깁니다. 게다가 우리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어합니다. 슬프지만 바로 이것이 타락이 초래한 비참한 결과입니다.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지내셨던 예수님을 제외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누구도 예외 없이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선이라면 지극히 작은 점만큼도 행할 수가 없는 회생불능의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다행인 일은,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원한 타락과 그로 말미암은 영원한 심판을 그냥 놔두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마음 놓고 악을 행하도록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만약 그러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이미 오래 전에 그들이 사는 세상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들도 괴멸시켜버렸을 것입니다. 그랬음에 틀림없습니다.

2020년 08월 27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3주차(6-8문답)

타락의 결과 중 하나로 인간의 본성이 더럽혀진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의 본성이란 그것을 그것답게 하는 특성입니다. 가령, 멍멍 짖어 댄다거나,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 토끼와 같은 약한 것을 보면 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개에게 있는 본성입니다. 닿는 것마다 적실 수밖에 없는 것은 물의 특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당시 그들의 본성은 선하고 거룩하며 의로웠습니다만, 타락한 후부터 그들의 본성은 여지없이 악하기만 합니다. 그들에게는 선보다 악을 택하는 것이 차라리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더 불행한 일은, 그들이 타락한 본성이 그들의 자손과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영원히 대물림 하게 될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면 그때에 비로소 선택할 수 있도록, 일단은 중립의 상태로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악에 치우친 성향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태생부터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모태에서 잉태되는 순간부터 이미 부패한 상태인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과 이사야서 53장 6절, 시편 51편 5절을 읽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