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7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1주차(54-56문답)

[제54문] ‘거룩한 보편의 교회’에 관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대답]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10:11; 엡 4:11-12; 5:25-26) 세상의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시 71:17-18; 사 59:21; 고전 11:26) 모든 인류 가운데서(창 26:4; 사 49:6; 롬 10:12-13; 계 5:9) 영생을 위하여 선택하신(롬 8:29-30; 엡 1:3-5, 10-14; 벧전 2:9) 교회를(시 111:1; 행 20:28; 딤전 3:15; 히 12:22-23)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요 17:21; 행 2:42; 고전 3:16; 엡 4:3-6, 13) 그의 말씀과 성신으로(사 59:21; 롬 1:16; 10:14-17; 엡 5:26) 자신을 위하여 불러 모으고 보호하고 보존하심을(시 129:4-5; 마 16:18; 요 10:16, 28) 믿습니다. 나도 지금 이 교회의 살아 있는 지체이며(고전 12:27; 벧전 2:5) 영원히 그러할 것을 믿습니다(시 23:6; 요 10:28; 롬 8:35-39; 고전 1:8-9; 벧전 1:5; 요일 2:19).

이 질문은 사도신경의 아홉 번째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보편의 교회’라고 한 이 부분에 대해 어떤 번역은 “나는 거룩한 교회를 믿사오며”라고 했고, 또 다른 번역은 “나는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회(Catholic)’라고 한 단어는 ‘우주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모든 시대를 걸쳐 발견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주적인 보편의 교회이로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같지는 않습니다.

이 조항은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지, 조직이나 교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눈에만 정확하게 보이는 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함을 받고 성신과 말씀에 의해 모여진 남녀노소로 이루어진 위대한 몸으로서의 이 교회는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습니다. 우리가 개혁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지만, 더불어 신실한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한 몸의 일원이라는 것도 역시 중요합니다. 그러면, 참된 영적 교회의 특성을 주목해 봅시다.

첫째, 참된 교회는 하나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인류까지 그리스도의 몸은 오직 하나입니다. 둘째, 참된 교회는 거룩합니다.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은 주님께 속해지도록 죄로부터 분리됩니다. 셋째, 참된 교회는 우주적입니다(공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인종이나 나이와 상관없고, 나이, 교단 소속 등과도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원칙적으로는 비록 하나의 참 교회만이 있고, 한 복음만이 있고, 한 믿음만이 있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많은 교회 조직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지역 교회들은 누가 속해 있는지 알 수 있기에 눈에 보이는 교회라고 하고, 누가 속해 있는지에 대해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시는 교회에 대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참 교회라고 지칭합니다.

눈에 보여지는 교회들은 결코 완전하지 않고, 게다가 일부 교회의 경우 복음에서 완전히 떠나 있기까지 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무형의 교회)에 속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교회에는 속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지역 교회(유형 교회)에 속해 있지만, 모두가 참되이 믿는 자는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무형의 교회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고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이 양쪽의 회원이 되어야 합니다.

[제 55문] 우리는 ‘성도의 교통’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대답] 첫째, 신자는 모두 또한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합니다(롬 8:32; 고전 6:17; 12:12-13; 요일 1:3). 둘째, 각 신자는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고전 12:21; 12:31-13:7; 빌 2:2-5). 

‘성도의 교제’는 사도신경에서 교회에 대해 언급하는 아홉 번째 기사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는 성신으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로 구성된 ‘살아 있는 몸’입니다. 살아 있는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믿는 자들이 상호 간에 영적인 교제를 즐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름지기 성도라면 예외 없이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한 영적 가족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공동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영적인 소망을 공유하였고, 그에 따라 같은 목표를 위해서 함께 일하면서 살아 갑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 고향을 고대합니다.

이 ‘모임’은 ‘교제’ 혹은 ‘친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로지 성도들만 해당됩니다. 여기서 ‘성도’란 순전히 ‘거룩한 자’라는 의미인데 결국 참된 그리스도인을 가리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 안의 유명한 몇몇 사람만 특별히 성도로 세워진다고 가르치지만,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해 성도라고 지정합니다(고전 1:2). 이 문답은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믿는 모든 자들은 그리스도의 은사와 복을 함께 나눕니다(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으로서의 영적 능력). 둘째, 우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축복을 전달하려 할 때에 이 은사를 사용합니다. 가르치는 은사든지, 음악적 은사든지, 지도력 은사든지, 재물을 버는 은사든지, 격려하는 은사든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기타 등등의 은사를 우리가 각자 독특하게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은사와 재능을 그리스도님과 동료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도사린 죄는, 다른 사람을 향해 방해하든지 미워하든지 괴로움을 주든지 시기하든지 교만하든지 이기적이든지 기타 등등으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챙기게 하여 이 교제를 반대하고 헤치는 거리들을 찾게 합니다. 그러나 성신께서는 평화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서 사랑을 계속하고,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는 일을 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지상에서의 우리의 행복은 같은 지체된 다른 성도들과의 참된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데 의존되어 있습니다.

[제 56문] ‘죄 사함’에 관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대답]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시 103:3, 10, 12; 렘 31:34; 미 7:19; 고후 5:19) 우리가 일평생 싸워야 할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롬 7:23-25)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셔서(롬 3:23-24; 5:18-19; 고후 5:21; 요일 1:7; 2:1-2) 결코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십니다(요 3:18; 5:24; 롬 8:1-2).

우리는 이제 사도신경의 열 번째 기사인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에 도달했습니다. 먼저 우리의 죄가 용서함 받았다는 이 사실은 얼마나 흥분되는 진리입니까? 그런데 무엇이 죄입니까? 우리는 앞서 신앙고백 제2문답과 제4문답을 통해서 무엇이 죄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죄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완전히 지키는 데서 실패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가 처해 있는 비참한 모습, 더 자세히 말하자면, 우리의 죄와 죄로 인한 부패를 우리에게 똑똑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죄에 거하게 될 경우 당연히 유죄 판결과 그에 따른 심판을 받을만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 받기 전에는 분명히 이러한 처벌을 받고야 말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도처에서 이러한 처지에 있는 우리들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죄에 대한 용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우리로서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용서’라는 말의 좀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용서 받은 사람이라면 그에게서는 더 이상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의 죄나 혹은 그의 악행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약 당신이 그를 상대하면서 이전의 죄들에 대해 계속 말한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닌 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기 않겠다’라고 선언하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고 있는 우리의 죄를 책망치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단 한 번의 용서로, 항상, 또는 평생 용서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죄인으로 판결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거론하는 두 종류의 죄는, 첫째, 우리의 직접적인 행동에 의한 죄(생각, 말, 행동)와, 둘째, 그러한 죄를 낳게 하는 우리의 죄악된 본성(우리의 부패, 타락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 있는 악한 성품은 하나님을 미워하게 한다는 데서 두드러진 특징을 드러냅니다. 그러한 악한 마음을 가진 것만으로도 유죄 판결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시게도 우리의 사악함 자체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인으로 만드는 모든 죄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신데 어떻게 정당한 징계를 내리지 않고 죄인을 용서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부상합니다. 먼저 원칙적인 대답은,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의 죄책에 대한 징계를 당연히 내리셨는데, 이때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를 징계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우리에 대한 징계를 오직 예수님께서 제거하게 하신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성취’만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사실과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용서하시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실로 우리 중에 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까? 확실히 모두 다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해당됩니다. 지금 당신은 어떻습니까?

 

2020년 12월 26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0주차(53문답)

하나님의 은사는 기독교적 환경에만 있으면 자동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출석한다고,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덩달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몇 마디 했다고 해서, 그리스도에게 결신하라고 할 때 손을 들어올린 것으로, 그런 것으로 구원이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신의 능력에 의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성신을 받아야 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공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확신은 성신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절로 6절, 요한복음 7장 37절로 39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2월 25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0주차(53문답)

누군가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을 경우 용기를 발휘하기는 훨씬 더 쉽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혼자라면 훨씬 더 힘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긴 해도 그가 항상 내 곁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니, 사실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국 헤어지기 마련입니다. 절친한 친구가 떠나가고 가족과도 헤어집니다. 어떤 부모들은 이혼해 따로 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나 먼저 죽어 하늘나라로 가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도 질병과 고난을 겪습니다. 때로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날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성신 하나님께서는 항상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걸 알고 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성신께서는 신자들 각인의 마음에 영원히 계시니 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요한복음 14장 16절, 17절과베드로전서 4장 14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2월 24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0주차(53문답)

인생에서 겪는 그토록 많은 슬픔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진리로 말미암아 충분한 위로를 얻습니다. 성신은 복음의 진리를 우리가 즐겨 위로를 받게 해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잠시만 받는 고통이라는 것도 일깨워줍니다. 로마서 8장 14절로 17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중보 기도도 해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과 27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고통의 때에 희망을 품고 즐거워하도록 하십니다. 로마서 5장 2절로 5절을 읽어보십시오. 잠깐, ‘위로’라는 단어는 ‘강하게 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힘들 때 성신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셔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소명의 삶을 지속하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사도행전 9장 31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2월 23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0주차(53문답)

성신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공유하도록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모든 것을 성도에게 적용하셔서 그의 것이 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막힌 귀를 열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해주십니다. 감겨진 마음눈을 뜨게 하셔서 죄와 비참함을 보게 함으로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권능을 보게 해주십니다. 죄로 죽은 나를 살리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게 해주십니다. 나를 그리스도께로 연합시켜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축복을 내 것이 되게 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 요한복음 3장 1절로 8절, 에베소서 1장 3절, 13-14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2월 22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0주차(53문답)

복음을 통해 우리는 성신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로되 믿는 사람 각자에게 임하시는 분이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성신이 ‘내게 개인적으로’ 오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인데, 성신을 주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접붙여 주십니다. 따라서 성신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소유하게 될 것임을 보증하십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과 22절을 읽으십시오. 성신은 우리 안에 거하시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이라고 하는 비싼 값을 주고 산 바 된 존재라는 걸 일깨워줍니다. 성도는 “몸과 영혼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과 20절을 읽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 분은 내 심령에 성신을 보내셨습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2월 21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0주차(53문답)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온 성신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해보건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지만 세 위격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분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성부, 성자처럼 성신도 시작과 끝이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십니다. 성부, 성자와 동등하십니다. 초대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소유를 팔아 사도들에게 주면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도록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나니아는 땅을 팔아 일부만 베드로에게 주면서 전부라고 속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일부를 감췄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너는 사람을 속인 게 아니라 성신님을 속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린 성신이 성부, 성자와 똑같은 하나님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 5장 1절로 6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2020년 12월 20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20주차(53문답)

[제53문] 성신께 관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습니까? [대답] 첫째, 성신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창 1:2; 마 28:19; 행 5:3-4; 고전 2:10; 고전 3:16; 6:19). 둘째, 그분은 또한 나에게도 주어져서(고후 1:21-22; 갈 4:6; 엡 1:13) 나로 하여금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하게 하며(요 16:14; 고전 2:12; 갈 3:14; 벧전 1:2) 우리를 위로하고(요 15:26; 행 9:31)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요 14:16-17; 벧전 4:14). 

이제까지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하나님과 아들과 그리고 우리의 구속을 다루는 기사 2번부터 7번까지 설명을 끝마쳤습니다(신앙고백문답에서 문답 29-52). 신앙고백문답의 여덟 번째 기사에서는 성신과 성화에 대해 말합니다. 지금까지 신앙고백 2-7문답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제 아래 전개되어 왔듯이, 사도신경(기사 8-12번)의 나머지 분량도 성신의 주제 아래 숙고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신앙고백문답 제53번은 여덟 번째 내용인 “성신을 믿사오며”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합니다. 여기서는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성한 삼위에 관한 두 가지를 고백합니다.

첫째, 성신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영원히 공존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신앙고백문답 제25문답을 다시 한 번 읽고 연구해 본다면 본 문답에 대해 큰 도움을 받게 될 됩니다. 우리는 성신님을 ‘그것’(가령, KJV이 로마서 8:16에서 그렇게 번역했듯이)이라고 불러서는 결코 안됩니다. 물론 성부나 성자에게도 ‘그것’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성신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모든 신성의 특성을 동일하고도 완벽하게 지니셨습니다.

둘째, 성신님의 주된 사역에는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부분이 있습니다(제24문답 참조). 이 말의 의미는, 성신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덕을 개개인에게 적용시키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점에서 과거의 중요한 역사를 검토해 보는 것은 개혁된 신앙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앞서 1618-1619년에 이곳의 주제인 성신의 은혜와 능력을 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혁주의 교회들의 총회가 네덜란드의 도르트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이 ‘도르트 총회’는 (우리가 앞서 제30문답 토의에서 보았던) 신학자 알미니우스(James Arminius, 1516-1609)의 잘못된 가르침을 정죄하였습니다.

알미니우스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주장하기를, 하나님의 은혜와 성신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졌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들이거나 안 받아들이는 문제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면서, 당시 네덜란드의 개혁 교회 안에서 활발한 가르침을 전개했습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베풀어진다는 것이고, 그리고 성신님은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렇게 많은 사역을 베풀지 않으신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들 모두에게 주어진 은혜와 의지를 사용하여 성신의 사역에 협력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성신께서 베푸시는 일정한 능력과 죄인들의 의지가 합쳐질 때에 가능하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개혁된 교회의 믿음의 선진들은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비성경적이라고 보아 단호히 정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대안으로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를 성경적 진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선택된 죄인들을 위한 특별한 소명과 특별한 은혜에 대해 가르쳤는데,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성신께서 무한하신 능력으로 그들에게 임재하신다고 했습니다. 성신께서는 선택된 자들을 개심시키고, 그들의 의지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향할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십니다. 성신께서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성도가 거역할 수 없도록 불가항력적이며 은혜로운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성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케 하시는 것입니다.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를 가르치는 성구들은 많습니다. 다소의 사울과 빌립보의 루디아의 경우는 전형적인 실례입니다(행 9:1-6; 16:14). 그리고 요한복음 6:37; 사도행전 13:48; 로마서 8:29-30; 에베소서 2:1, 5-10; 빌립보서 2:13 등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도르트에서 모인 개혁주의 교회들의 총회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제기한 다섯 가지 항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정죄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성경적 선언’ 혹은 ‘다섯 가지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제정했습니다.

  1. 전적 타락
  2. 무조건적 선택
  3. 제한 속죄
  4. 불가항력적 은혜
  5. 성도의 견인

오늘날 이 문서는 ‘도르트 신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진리는 참으로 중요하고 유익하므로 성도라면 예외 없이 정확하게 공부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훗날 이 다섯 가지 교리에 대해 ‘칼빈주의 5대 교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물론 존 칼빈은 이미 54년 전에 죽었으므로(1564년) 도르트 총회에 참석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의 신학은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주권을 잘 고백한 신학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 알미니안주의 신학이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받아 들여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참으로 우려할만한 상황인데 이는 구원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철두철미 ‘인본주의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53번 문답으로 돌아가겠는데, 핵심은 성신께서 선택된 각인에게 개별적으로 베풀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성신께서는 참 믿음의 끈 역할을 하셔서 성도와 그리스도 간의 연합을 이루십니다. 바로 이 ‘신비적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모든 구원의 은덕들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은덕의 혜택에는 갈라디아서 5:22-23의 목록에 있는 ‘성신의 열매들’도 포함됩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 8:9). 그러므로 기독교 신자에게서의 성신은, 그를 성화시키시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원인이 됩니다. 실상이 이러하므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신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엡 4:30)고 한 명령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2020년 12월 19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9주차(50-52문답)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선택된 자들을 모두를 무덤에서 불러 일으켜 하늘의 기쁨과 영광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당연히 죄인인 나 자신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어려운 지상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실상 현재 받는 고난은 잠시뿐이라고 선포합니다.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실 영광 때문에 넉넉히 견딜 수 있게 해준다고 합니다. 우리와 우리 주위에서 그러한 소망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커다란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고난은 참으로 짧은 시간이고,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누릴 기쁨과 영광을 생각할 때 사소하고 무시할 만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 5장 9절로 11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2월 18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9주차(50-52문답)

우리에겐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박해자들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린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심판을 받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죄인이고 나도 예외는 아닙니다. 나는 매일 죄를 짓습니다. 마음 안에 죄성이 숨어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것에 대해 고민되지는 않습니까? 신앙고백문답은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자로 믿는 믿음이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선포합니다. 성경도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심판하러 오실 분이 모든 심판과 형벌을 스스로 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롬 8:1). 갚아야 할 아무런 빚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갚으셨으므로 이제 그 문제는 종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4절, 디도서 2장 13절과 14절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