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5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3주차(89-91문답)

참된 회심은 성신의 주권과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하고 아무리 효과적으로 설교한다 해도, 그 자체만으로는 죄인을 회심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설교를 들을지라도 성신께서 활동하셔야만 비로소 사람의 마음은 변화합니다. 이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중생’입니다. 죄로 죽었던 사람이 영적으로 살아나면 삶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발견합니다. 새로 알게 된 값진 삶을 살고 싶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당연히 예전에 즐기던 죄들은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10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3월 24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3주차(89-91문답)

아담은 죄를 지음으로써 영적인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의 후손인지라 예외 없이 영적인 죽음의 상태로 태어납니다. 영적으로 죽은 우리는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기는커녕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릴 마음조차 품지 않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성신의 능력으로 회심을 하게 되면 새로운 자아가 살아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즐기던 삶이 이후로는 죄를 혐오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를 기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 로마서 5장 1절과 2절, 11절, 로마서 6장 13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3월 23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3주차(89-91문답)

신자가 되기 전에는 죄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옛 자아는 죄를 즐기고 죄로 가득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가 있게 되면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이 일어납니다. 죄를 지을 경우 마음이 괴롭고, 들킬까 봐 두려움을 느낍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참된 회개는 이전에 즐겨 행하던 죄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토록 열심을 내던 죄의 삶에서 완전히 돌아서는 것입니다. 요엘 2장 12절과 13절, 사도행전 2장 36절로 38절, 고린도후서 7장 10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3월 22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3주차(89-91문답)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심은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만으로는 참된 회심이 아닙니다. 지은 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면서 대가로 처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회심이 아닙니다. ‘convert’라는 단어의 어원은 ‘돌아오다’라는 라틴어입니다. 참된 회심은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서 우상을 떠나 참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절과 10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참된 회심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행동하는 것을 통째로 바꾸는 것입니다. 회심하게 되면 죄로 물든 상태에서 사랑했던 것을 하찮게 여기고 완전히 다른 것을 원하게 됩니다. 로마서 6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신자가 된다는 것은 옛 자아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2021년 3월 21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3주차(89-91문답)

[제88문] 사람의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대답]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롬 6:4-6; 고전 5:7; 고후 7:10; 엡 4:22-24; 골 3:5-10). 

우리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선행이 본질적인 것이라는 데 대해 살펴보았는데, 문답 제88, 89, 그리고 90번에서는 그렇다면 죄인인 우리의 입장에서 어떻게 완전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즉, 우리의 선행의 근원에 대해서 배웁니다. 기독교인의 삶 속에서 선행의 근원 혹은 뿌리는 성신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되어진 변화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성신의 내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마음의 변화에 관한 진리를 가르칩니다.

오늘날 교회들 중에서 개종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가진 경우를 봅니다. 예를 든다면, ‘개종한 사람들’을 많이 얻기 위한 성과를 위한 목적으로 ‘복음적인 모임’ 혹은 ‘부흥회’를 개최하는 교회들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통상, 소위 ‘복음주의자’들은 ‘부흥적 설교’를 선포하기 위해 이곳 저곳의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이러한 모임에서의 설교자들은 보통 성경에 관해서는 매우 적은 분량을 가지고 제멋대로 말하는 반면, 반대로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이야기나 그들의 감정을 고양시키는 음악을 집중적으로 쏟아내게 됩니다. 모임에서 이야기주의 식의 강론을 마치고 나면, 설교자는 의례껏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흥분해 있는 것을 포착하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자신과 함께 기도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이들을 즉각 개종자라고 선포하면서 교회원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하지만, ‘개종자’로 불리는 이 사람들이 실상은 구원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은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에게 복음이 올바르게, 그리고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부흥회가 끝나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복음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십중팔구 자신들의 옛적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이렇게 돌아가는 사람들이 다음 해에 다시 동네를 찾아오는 새로운 부흥사에 의해 또 다시 ‘재개종자’가 되곤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이는 잘못된 개종인데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복음이 성경으로 확실하게 설교되지 않았고, 둘째, 설교자가 자신의 의지로써 상대방의 개종을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고, 셋째, 개종자 편에서도 자신의 의지로써 스스로 개종되는 능력을 발휘한 격이기 때문이고, 넷째, 죄인인 그들이 강대상으로 나와 기도한 사실 그 자체에 근거하여 자신들이 개종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고, 다섯째, 성신에 의한 참된 개종자는 결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기 마련인 때문입니다.

성경이 개종에 대해 가르칠 때에는 항상 성신께서 죄인의 마음에 신령한 생명과 복음을 믿는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미 선택된 데 따라 그처럼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원리를 주목하라고 합니다. 죄인의 죽은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 놀라운 역사는 결코 복음을 전하는 사람 자신이 발휘하는 인간적인 감정과 의지를 앞세운 설득에 따라 되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도 스스로의 의지로써는 개종될 수 없는 법입니다(요 1:13).

신약성경은 우리의 죄된 본성에 대해 ‘옛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롬 6:6; 엡 4:22; 골 3:9), 이는 아담으로부터 물려 받은 원죄가 우리의 영혼 전체를 물들여 놓았기 때문입니다. ‘옛사람’ 혹은 ‘죄된 본성’은 성신께서 우리의 영혼을 회복 혹은 개심시키기 전까지 철저하게 인간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신의 능력을 힘입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엡 4:24; 골 3:9). 즉, 새로운 영적 생명은 성신에 의해 주어지는데, 복음의 진리가 이해시켜 주듯이, 성신님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돌이키던지 혹은 개심하는 원인이 되어 옛사람을 벗어버리게 해주십니다.

인간의 영혼이 개종되는 형식은 두 부분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이 단어는 옛 사람을 죽이는 성신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신령한 슬픔 중에 죄로부터 돌이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 믿음입니다. 이것은 죄인의 용서와 구원을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인을 ‘살게 만듦’ 혹은 ‘새로운 사람으로 되살아 나게 했다는 것’을 굳게 신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두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두 문답에서 더 배울 것입니다.

[제89문] 옛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하나님을 진노케 한 우리의 죄를 마음으로 슬퍼하고 더더욱 미워하고 피하는 것입니다(시 51:3-4, 17; 욜 2:13; 롬 3:13). 

제89문답과 90문답은 개종의 두 번째 부분인 회개와 믿음 또는 ‘옛 사람 죽이기’ 와 ‘새 사람을 살리기’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먼저 개종에 대한 일체의 논의는, 성신으로 개종된 마음, 즉, 되살아난 선행의 근원을 보여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회개, 또는 죄된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사람의 영혼 구원에 꼭 필요합니다. 죄인은 자신의 죄된 본성으로써 철저하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미워하고, 동시에 사탄과 그의 방식을 사랑하는 사악한 권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신과 교제하는 사람이 되게 되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는 이러한 죄의 능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신의 사역으로써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이러한 일을 부단히 진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중생하여 다시 살아나는 그 순간부터 성도의 마음은 죄의 능력에 대항하는 반응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참된 회개의 세 부분은, 첫째, 죄를 깨닫고(롬 3:20b), 둘째, 가슴으로 느끼는 슬픔으로서 죄를 미워하고(고전 7:10), 셋째, 죄로부터 돌아섭니다(롬 8:13; 골 3:5-10). 이러한 회개에 관해 중요한 진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라고 했고, 임금으로 높아지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셨도다”(행 5:31)라고 했습니다. 둘째, 회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식에 입각하여 확고하게 살아나가는 경험입니다. 성도의 영혼에서는 매일매일 거룩한 전율과 죄를 혐오하는 것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죄는 직접적으로 성도의 하늘 아버지이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회개는 완전해야 합니다. 회개의 모든 요건이 성도의 마음 속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성도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을 배워야만 합니다. 성도는 마땅히 죄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자신의 죄가 넘치는 데 대해 슬프다고 탄식하면서도, 정작 여전히 죄 가운데서 산다면, 사실상 자신의 회개가 거짓이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넷째, 회개는 계속되는 경험입니다. 은혜와 지식 안에서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회개는 더 깊어져 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은 왜 신앙고백문답이 죄에 대하여 더욱 더 돌아서야 한다고 말하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임시적으로 존재하는 동안 죄 많은 육체로써 살아온 죄의 성향에 의한 옛 사람의 행위들을 죽이는 회개의 삶을 살기에 결코 그치거나 지쳐서는 안됩니다.

이 문답에 있어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신앙고백문답에서 사용한 단어 ‘죽다’는 ‘죽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란 모름지기 현재 상태에 옛 사람 ‘죽이기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죄가 스스로에 죽기를 바라보면서 뒤로 물러서 있지만은 않습니다. 이생에서 죄를 완전히 쳐부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성도는 옛 사람을 더더욱 죽여 나가는 일을 위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옛 본성 역시 본능적으로 사탄을 섬기려고 항상 우리의 새 사람과 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90문] 새사람으로 다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마음으로 즐거워하고(시 51:8, 12; 사 57:15; 롬 5:1-2; 14:17),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롬 6:10-11; 갈 2:19-20). 

개종의 두 번째 부분은 믿음 혹은 ‘새 사람을 왕성하게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새 사람’이란 중생에 의해 우리가 받은 새로운 영적 생명 혹은 새로운 탄생을 가리킵니다. 이 생명은 말 그대로 새롭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새로운 탄생과 함께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생한 생명을 ‘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중생한 생명력이 자신의 전체 인격으로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에는 육체까지도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 5:17).

이 ‘새 사람’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명은 은혜의 수단인 말씀, 기도, 주일 예배, 성도의 교제 그리고 성례로써 매일매일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이 새 생명의 힘은 ‘살게 만드는 존재’처럼 언급되어집니다.

사도 요한은 믿는 자의 새 생명을 ‘씨’(요일 3:9)라고 불렸습니다. 새로운 영적 생명의 씨는 ‘말씀과 성신의 물’과 ‘기도의 햇빛’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로써 계속 자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씨는 왕성하게 자라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처럼 되어야 합니다(사 61:3; 시 1:3). 신앙고백문답은 새 사람을 생존케 하는 두 부분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안에서 깊이 감명된 기쁨’입니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의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죄로 인한 슬픔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즐거움이 어떻게 같이 가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슬픔이 커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의 즐거움은 더 커집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배웠기 때문에 우리의 ‘기쁨은 더욱 충만’합니다(요일 1:4).

둘째, ‘하나님의 뜻에 따른 모든 선한 생활 양식을 따라 즐거움을 취하는 삶’입니다. 새 생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때마다 더욱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두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을 압니다. 새 생명은 선행을 생산하고, 선행은 새 생명에 힘을 줍니다. (우리는 다음 문답에서 이러한 선행들이 무엇인지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은 각도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사악한 죄인의 모습입니다. 개종하지 않은 사람의 마음은 아담의 본성인 죄스러운 옛사람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됩니다. 그는 단 한 번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을 품지 못합니다(엡 2:1; 4:22). 개종하지 못한 사람의 생명력을 가리키는 육체의 모든 일은,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데, 오직, 항상, 필연적으로 사악할 뿐입니다(롬 6:19; 8:7-8; 갈 5:19-21).

다름으로 개심한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a. 거듭난 기독교인의 마음은 그처럼 거듭났기 때문에, ‘영적 생명’과 ‘의의 새 사람’을 받았습니다(요 3:3; 엡 4:24; 골 3:10; 요일 3:9). b. 영적인 ‘새 사람’은 이제 성도의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는데, 그에 따라 본래 죄인인 ‘옛 사람’은 ‘새 사람’을 대적하여 더 싸우며 덤벼들게 됩니다(롬 7:21; 갈 5:6). c. 거듭난 기독교인의 육체와 손발의 일은 대부분 선합니다. 이는 마음이 새 사람으로 변화된 데 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코 완벽할 수는 없는데, ‘옛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부패해 있기 때문입니다(롬 6:6, 12-14; 7:19). d. 기독교인은 새 사람이 되고 난 후로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열심히 권고 받고, 그에 따른 성신의 능력으로써 옛 사람을 죽여 나갑니다. 

[제91문] 그런데 선행이란 무엇입니까? [대답] 참된 믿음으로(롬 14:23; 히 11:6)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레 18:4; 삼상 15:22; 엡 2:10)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실행한 것만을 선행이라고 하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사람의 계명에 근거한 것은 선행이 아닙니다(신 12:32; 사 29:13-14; 겔 20:18-19; 마 15:7-9).

앞서 살펴 본 선행의 근원은 성신께서 그의 속에서 사시는 개종한 마음인데, 이제부터는 이로 말미암아 표현되는 선행의 본성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선행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구원을 위해서 언약에 따른 예수님의 날을 대망하기보다는 소위 자신들의 선행이라는 것들을 더 신뢰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선행을 추가해야만 의로움이 확증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는 디도서 3:5에서 배척을 받습니다. 안 믿는 사람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을 돕고, 헌혈하고, 교회에서 헌금하는 등등의 일을 할 때 선행을 시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선행에 대한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선을 위한 일을 가르치는데, 세 가지가 진실되어야만 합니다.

첫째, 선행의 뿌리는 참 믿음이어야 합니다. 선행은 참 믿음의 결과로서만 생깁니다. 그리스도 안에 서 있는 데 대한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을 보실 때, 그 배후에 있는 마음의 자세를 항상 보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경우, 그가 그리스도를 미워한 이래로 그의 모든 행동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데 따른 반항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동료에게까지 설혹 선을 행할지라도 사실은 잘못된 동기에서만 행해지기 마련입니다.

둘째, 선행의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선행은 당신의 거룩한 법에 따라 행해진 것일 때입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선의 기준을 정하십니다. 이 기준은 다음에 공부하게 될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선행에 대한 잘못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조심해야 합니다. a. “나의 양심이 나의 길잡이다.” 하지만 성경은 말씀하기를, 사람의 양심은 사악하여 선한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합니다(딤전 4:2; 엡 4:18). b. “나의 교회가 나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계명이 교회 안에 자리잡고 하나님의 계명을 대적하는 일이 있다고 가르칩니다(막 7:7-9, 13).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제의 결혼을 금지시키고, 사순절에는 금식을 요구하는 등등의 성경에 반대되는 다른 많은 법들을 지킵니다. 물론 많은 개신교회들 역시 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가령 아주 약한 와인조차도 사악하다면서 일체의 술을 금지하는 등등으로 자신들이 만들어 낸 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에 매여 성탄절, 부활절 그리고 승천일 등을 거룩한 날로 정해 준수하게 합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거짓 신념에 따라 끔직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가능하게 합니다(요 16:2). 단순히 신실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기준만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셋째, 선행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내용과 결과를 내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삶과 활동을 위한 가장 높은 목표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구현에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이것이 진정한 의도가 되지 않는다면, 그는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선한 일의 진정성은 하나님의 목전에서만 판명됩니다. 비기독교인, 즉 개종하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불신자가 이웃을 돕는 것과 같은 표면상의 선한 행동을 할 때조차도 사실상 그들은 여전히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에 불과할 뿐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21년 3월 20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2주차(86-87문답)

죄로부터의 구원은 의(義)로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의 순종과 거룩한 삶입니다. 죄 때문에 그 목적이 방해 받았을 때 구원자를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며 흠 없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 독생자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말을 핑계 삼아 죄에 안주하고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 3절과 4절, 로마서 8장 29절, 고린도전서 6장 9절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3월 19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2주차(86-87문답)

또 다른 선행의 목적은 ‘경건한 삶으로써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적이며 거룩함을 싫어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하지만 거룩한 삶에 이끌리기도 합니다. 주위에서 매일 선행을 하며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관심을 쏟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선행을 봄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습니다. 베드로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들에게 편지합니다.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벧전 3:1). 믿지 않는 이웃이 신자라고 하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우리가 신자로서 경건한 삶을 살 때 이웃은 우리 주님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합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로 16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3월 18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2주차(86-87문답)

요한일서 3장 7절로 10절 말씀을 읽으십시오. 선행의 또 다른 목적은 ‘우리 각 사람이 그 열매로써 자신의 믿음에 확신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인 것을 어떻게 압니까? 구원하는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면서 죄를 떠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교회 가기를 싫어하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귀기를 싫어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비록 여전히 죄를 짓기는 하지만) 항상 죄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을 하고자 노력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우리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2021년 3월 17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2주차(86-87문답)

선행의 다른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찬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함을 사랑하십니다. 성경에서는 거듭 말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을 닮으려고 한다면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려야 합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신 것에서부터 시작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측량할 수 없이 커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니 우리도 거룩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질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비참할 정도로 실패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비록 죄를 짓지만 죄를 싫어하고 죄지을 때마다 용서를 구하며 더 나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갓난아이가 첫걸음을 뗄 때 모든 아버지는 기뻐합니다. 아이가 걷기를 다 배울 때까지 훈련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다 자란 아이에게 걸음마를 가르치진 않습니다. 서투른 걸음마를 하며 하나님을 향해 한걸음한걸음 떼는 것을 기뻐합니다. 온전함에서 멀지만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립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과 16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1년 3월 16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2주차(86-87문답)

신앙고백문답은 선행의 네 가지 목적을 말합니다. 우선 ‘모든 삶으로써 하나님의 은덕에 감사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신앙고백문답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주셨고 어떤 희생을 치르셨나 알게 됐습니다. 아무 자격을 갖추지 않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조차 베푸신 은혜에 한없는 위로를 받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우리는 당연히 그분이 원하는 것을 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됩니다. 일생 동안 선행을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방법입니다. 골로새서 2장 6절과 7절을 읽으십시오. 어떤 사람이 계속 죄에 머물면서 회개치 않는다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감사함이 없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있다면 신자가 아니라는 표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