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7문답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었을 때 슬픔이 엄습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과 영원토록 함께 하고 싶어하기 마련인 때문입니다. 특히 피를 나눈 가족 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이것을 갈라 놓습니다. 이 죽음은 원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죽음은 원래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한계가 아니었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인간의 죄가 초래한 것입니다. 여하튼 죽음이야 말로 인간에게 가장 극악스러운 천적이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2:15을 읽어봅시다. 이처럼 죽음이란 실제로 인간에게 얼마나 두렵고 또 두려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서 풀려나는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까무러칠 만큼 놀라운 일입니다. 지금 잠깐 멈추어 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께 감사의 고백을 기도로써 드려보지 않으시겠습니까?

2019년 3월 31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7문답

[질문] 신자가 죽을 때에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유익을 받습니까? [대답] 신자는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히 12:23)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시 73:24-25; 눅 16:22-23; 23:43; 고후 5:6, 8; 빌 1:23),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살전 4:14)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쉽니다(욥 19:26-27; 사 57:1-2; 단 12:2; 요 5:28-29; 행 24:15).

제37문답은 인생사에서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외이지만 말입니다. 곧 죽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인생의 역사만큼이나 사람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히 2:15)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 가령 플라톤은 사람의 최고선(the chief good)은 신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럴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성도는 죽을 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됩니다. 육체는 땅에 묻혀 썩겠지만, 영혼은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가지 성도의 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데 대해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성도는 죽는 즉시 자신의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간다는 데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 하신 말씀(눅 23:43), 그리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기도한 스데반의 경우에서, 그리고 빌립보서 1:23과 요한계시록 6:9-10을 통해서 정확하게 진술되었습니다.

먼저 성도의 죽음은 죄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즉 성도들의 경우에서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러나 성도의 죗값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님에 의해 이미 치러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적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삯’ 또는 ‘대가’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일 수 없습니다. 진실로 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두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저주로 연상되는 것이로되,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저주로서의 죽음은 어떤 성도들에게도 관계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실로 바울은 감격에 겨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도다”(갈 3:13)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는 자들의 죽음은 그의 영혼이 천국으로 인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하이델베르크 제42문답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라고 물은 후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죄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실로 육체적 죽음에 의해 성도는 이 죄된 세상과 죄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영광으로 옮겨집니다. 성경은 성도가 죽음을 통해 육체를 떠나는 것에 대해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의미이고(고후 5:6-8), 따라서 죽는 것은 성도에게 유익이라고 확실하게 가르칩니다(빌 1:21).

그러므로 사람이 죽게 되면 그의 영혼은 죽은 육체와 함께 무덤 속에서 ‘잔다(sleeps)’라고 가르치는 제7일 안식교를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여호와 증인 여타 다른 종교집단들의 가르침을 철저히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 쓴 첫 번째 책에서 당시 유행하던 ‘영혼 수면설’의 오류를 성경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배척했습니다. 영혼수면설의 배후에는 영혼멸절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존재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진리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우리는 성도이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실제로는 축복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죄된 육체의 상태로서 영원히 살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도다! 지금과도 같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실 지옥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그 자체만의 모습으로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에게서의 죽음의 실상이 상기한 바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는 육체적으로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다음 세대들이 계속 지상에서 살게 될 것인데,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때에는 그들은 죽음을 겪을 필요가 없을 것이고 다만 죽음을 통과한 자의 모습으로 홀연히 변화되기만 할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면 우리부터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살전 4:17).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여 영생의 부활을 향해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라면 진정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니 칼빈에 의하면 이 목표를 갈망하지 않는 것은 태만의 죄이기까지 합니다. “... 실로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말못하는 피조물들까지도 새롭게 되기를 갈망하니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한 것입니다.

 

2019년 3월 30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이 한 주간의 신앙고백은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것'이라고 한 대답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옷깃을 다시 한 번 여미게 합니다. 무릇 뼈대 있는 가문의 사람이라면, 그야말로 사소한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가문을 욕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강직함이랄까, 자부심이랄까, 당당함이랄까 여하튼 자신의 품위 유지에 있어서 지조와 절개가 있기 마련입니다. 모름지기 성도란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로 입양되고,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하나님의 자녀다운 기개로, 범사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양심의 평안을 누리고, 성신 안에서의 기쁨과 은혜의 많아짐을 누리면서, 어떠한 유혹이나 시험 앞에서도 은혜 가운데 끝까지 견디기 마련이겠습니다. 빌립보서 1:6을 읽어본 후, 당신을 구원의 완성의 날까지 견인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2019년 3월 29일 (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혹 요즈음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신앙의 힘으로 잘 버티고 있는 중은 아니십니까? 베드로전서 1:5을 읽어봅시다. 여기서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란, 지금 우리에게 임한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날을 가리킵니다. 무릇 하나님의 자녀는 이 기간 동안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무궁한 능력을 힘입어 보존됩니다. 우상숭배로 뭉쳐진 과거의 로마 카톨릭 교회로부터 지금과도 같은 참된 교회를 구해낸 종교 개혁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성도의 견인'이라는 주제의 신앙고백으로서 정리하였습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보배로운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성경 구절을 두 서너 개 더 제시해 보시겠습니까? 그런데 이곳에서 베드로는 성도를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베풀어질 때에, 당사자에게는 어떤 특이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2019년 3월 28일 (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저 멀리서 돋는 해는 떠오를 수록 점점 더 빛을 강하게 비췹니다. 그처럼 무릇 성도 속에는 새 생명이 약동하는 법이므로,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고, 그러므로 내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 마련이겠습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부르든, 거룩함의 진보라고 부르든, 중요한 것은 실제로 계속 자라가고 있느냐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라면 예외없이 '영적 성장의 학교'에 입학시켜 양육시키십니다. 이때 사용하시는 선생들도 다양하고(관계) 교육하시는 방법들도 다양합니다(환경). 그러나 목표 한 가지 만큼은 변함없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 방식인 교회, 바로 이 교회가 더더욱 교회다워지는 데 기여케 하시는 일입니다. 이때 자신이 직접 골을 넣는 것보다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그렇게 할 수 있게끔 기여하는 것을 더 소중히 보십니다. 요한일서 3:16-20을 읽고, 혹 자신의 마음에 책망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살펴보십시다.

2019년 3월 27일 (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의 모습에 대해 새로운 기술혁명의 시대였다고 평가할 것이 확실해 보일 정도로, 하룻밤 사이에 놀라운 기술이 다시금 뒤집히는 그런 시대가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가상현실, 인간복제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는 더 이상 낯설지 않으리만큼 익숙한 용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신기한 기술을 환호하면서 즐기는 동안, 상대적으로 자신의 중요한 인식 기능이 마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필연성과 그 후에 있을 심판의 당위성에 대한 망각입니다. 로마서 14:17을 읽고, 무릇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기술의 유혹)이 아닌 의와 평강과 희락(성신의 인도)이라고 한 진리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신기한 기술을 교회들조차도 성신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현 시대에, 자신에게서는 어떻게 좀 더 구체화되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보십시다.

2019년 3월 26일 (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사람은 대체적으로 윗사람이 아랫 사람인 자신을 헌신적으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의 근거는 상대방이 베풀어주고 있는 실제적인 사랑입니다. 그처럼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의 입장에서 누리는 큰 유익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고, 그로 말미암은 안전감과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난 명백한 '판결'이므로 향후 성도가 어떠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단코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도가 죄에 반복적으로 떨어진다 할지라도, 이 판결은 취소되거나 변개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험상으로 확실히 성도는 습관적이고 고의적인 죄에는 빠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는 성도는 이미 벌써부터 하나님과 화평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의 선언을 염두에 두고, 이 진리가 자신에게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있는지 고백해 보십시다.

2019년 3월 25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베드로후서 3:18을 읽어봅시다. 성도가 칭의될 때에, 그리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고 신분상으로 거룩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에서 계속 자라가는 일도 성도에게는 중요하고 항상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이 일이 잘 진행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은혜는 단순한 신앙적인 느낌이나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감동이나 감화 정도로만 은혜를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상 성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는 명백히 권능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이기고 다스리는 실제적인 경험, 또는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엄연한 실력인 것입니다. 최근에 은혜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는 경험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2019년 3월 24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질문]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대답]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롬 5:5; 8:35, 38-39) 양심의 평안과(롬 5:1) 성신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롬 14:17) 은혜의 많아짐과(잠 4:18; 벧후 3:18)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것(견인)입니다(렘 32:40; 요 10:28-29; 빌 1:6; 벧전 1:5; 요일 5:13).

제36문답의 주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끝 부분에서 “...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 더욱 그러한데, 사실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견딜 수 있게끔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도르트 회의가 작성한 칼빈주의 5대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제17장에서 3개조를 통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습니다.  다소 특이한 것은 대신앙고백문답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제79문답 같은 곳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는 다루었습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고, 따라서 “그것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을 누리는 권리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사랑에 따른 것으로, 사실상 ‘은혜 언약’의 핵심 사상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거나 그처럼 받은 구원을 중도에 상실함이 없이 안전하게 영화의 단계까지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도 자신이 발휘해내는 의지랄까, 계획이랄까, 능력이랄까 여하튼 이런 데만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은혜 언약에 따른 것이고, 성도가 자신의 생애 속에서 이것을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모든 현실에 대해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로써 설명하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과 그들에게 견인을 주시려는 작정과 언약, 그로 말미암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떨어질 수 없는 연합,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보좌에서의 하나님께 올리는 끊임없는 간구로 말미암아 한 번 받은 영단번의 구원에서 결코 이탈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견인의 역사가 경험적 차원에서는 성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신의 신비한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즉 성신께서는 성도 속에 거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공효가 끊임없이 약동케 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신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성도는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안잔하게 보존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로 말미암은 양심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큰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가운데서도 때로는 많은 혈기와 죄와 유혹에 빠져 성도로서의 생명력이 약해지기도 하고, 심하면 아예 없는 것같은 상태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않고,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내포하고 있는 원리(은혜 언약)와 효력(성신의 역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바대로, 성신께서 성도와 늘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기 때문에, 어느 순간엔가 다시금 침체를 벗어버리고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딘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현실화시켜 보자면, 은혜를 의지하여 끝까지 분투하고 투쟁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일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도는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일종의 꼭두각시 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만의 의지와 노력에만 맡겨질 수 없는 것은 그럴경우 백전백패하리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성신께서 단순히 도우신다는 정도로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또 다시 기독교의 신비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성신께서는 항상 ‘자기 은닉적’으로 역사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실례를 들어봅시다. 한 일꾼이 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자갈 투성이라서 씨앗을 뿌릴 수 있을 만큼 깊이 파서 옥토를 만드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이때 성신께서 일꾼보다 몇 발자국 앞에서 먼저 일구어 놓은 후 살짝 덮어놓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꾼은 신기하게도 밭이 잘 일구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절로 힘이 나 더더욱 열심히 일구어 나갑니다. 그러한 중에 나름 힘든 곳과 조우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해나온 실력이 관성의 법칙과도 같이 작용하여 결국에는 딛고 전진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로 입양되고, 거룩해진 신분을 이 땅에서 누리는 존재들입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양심에 평안이 깃들고, 성신으로 말미암은 기쁨으로 충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때로는 환난에도 직면케 되지만, 능히 인내에 인내를 거듭함으로써 연단을 이루어 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개인적인 도덕성 함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또한 그래야만 성신의 역사에 성립된 증거가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2019년 3월 23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은 성도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세상을 거역하고 싶어합니다. 세상의 특징은 욕심(탐심)입니다(약 1:15).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이 세대는 당시와는 몰라보게 다를 정도로 더더욱 사악해져 있습니다. 사방에 널려 있는 노래방들, 모텔들, 성매매 전단지들, 음란한 영화들, 잔인한 폭력을 미화시키는 온라인 게임들, 동성애의 커밍아웃 기타 등등. 더욱 놀라운 것은 짝퉁 교회들의 범람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일에는 닭장 속의 닭처럼 사육당하는 그런 교회로부터 나와 참된 교회를 이루는 일도 포함됩니다. 당신은 지금 교회에서 양육을 받으십니까? 혹 사육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