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21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5주차(37-39문답)

하나님의 법을 어긴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그 저주를 받음으로써 그 저주를 없애러 오셨습니다. 물론 그분은 단 한번도 죄를 범한 적이 없습니다. 저주 받으실 때 정해진 방법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나무에 달리는 것을 의미하며 율법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셔야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형이야말로 그분이 받으셔야 했던 유일한 처형방법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로 13절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1월 20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5주차(37-39문답)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할 때 유다 총독은 본디오 빌라도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 예수님을 범법자로 취급해야 했던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범법자가 아니었습니다. 빌라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의 대적자들이 너무나 집요하게 예수님을 죽이라고 억지를 부렸기 때문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끌고 가 십자가 처형을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3절로 16절을 읽어보십시오.

물론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이었고 공평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빌라도 이전에, 심지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세상의 재판관인 빌라도가 예수님을 죄인 취급할 때 예수님은 우리 대신 그 자리에 서서 범법자로서 선고를 받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27절로 28절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1월 19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5주차(37-39문답)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통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만 했던 영원한 벌에서 우리 몸과 영혼을 자유롭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죄로 우리가 자초한 벌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꺼이 주시기로 한 모든 은혜 또한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결코 받을만한 자격이 없던 은혜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의를 얻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순종만을 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향유할 수 있었던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죄 때문에 잃었는데 예수님이 그것을 되돌려 주신 것입니다. 한 아이가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는 행사장에서 고리던지기를 해 곰인형을 꼭 얻고 싶어합니다. 그 아이는 너무 어려 고리를 던져 목표물을 맞출 수 없습니다. 당연히 곰인형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큰오빠는 그 방법을 잘 알고 있고 곰인형을 얻은 후 동생에게 줍니다. 이제 그 인형은 동생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큰오빠와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하신 일의 일부분을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로마서 5장 15절로 19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1월 18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5주차(37-39문답)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수세기 동안 그들의 왕이 될 ‘다윗의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게 될 거라고 약속하신 바 있었으니까요. 특정한 한 ‘다윗의 아들’이 완벽한 공의와 진리로 다스릴 것이라 하셨습니다. 다윗 이후에 온 여러 선지자들도 이러한 약속을 반복했습니다.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를, 특정한 ‘다윗의 아들’이 그 어느 아들보다 더 위대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 이 약속들을 이뤄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중요한 이유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어야만 하는 것을 포함해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로 33절, 로마서 1장 1절로 4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1월 17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5주차(37-39문답)

지상에 존재한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죄에 대한 진노가 임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실 때, 특히 십자가 위에 계실 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께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성자이므로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세상 모든 죄인들의 죄를 갚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받을 때 그분의 백성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자에게 일정 수의 사람들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로 39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백성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행하러 오셨습니다. 그 필요한 일에는 그들의 죄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이 떠맡는 것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라 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양이라 부르셨습니다. 그의 양들을 위해 죽으실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절 14절로 15절을 읽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백성들의 죄의 대가를 지불할 모든 일을 하셨을 뿐 아니라 그분께서 얻어 주신 구원을 백성들이 확실히 받을 수 있도록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신을 주시고 성신은 그들에게 영적인 삶을 주십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회개하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020년 11월 16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5주차(37-39문답)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면 우리는 보통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십자가야말로 확실히 예수님께서 가장 커다란 고난을 받은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살기 시작할 때부터 고난을 받았습니다. 성자 하나님으로서 항상 무한하시고 아버지와 함께 영광 속에서 살아오신 분이 인간이 되셨을 때 처음 한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안에서 아주 작은 아이로서 인간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피조된 육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성자 하나님으로서는 커다란 낮아짐의 단계였고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해가면서 다양한 정도의 고난을 경험합니다. 다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배고프기도 하고 목마르기도 하고 피곤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슬픔에 젖기도 하고, 자신에 관해 나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때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바쁘거나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 외로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죄 때문에 겪어야 하는 고통을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이런 감정들을 직접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정은 가난했으므로 그로 인한 문제들도 겪으셨습니다. 갓난아이였을 때 그분의 침대는 말구유였습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역시 가난했고 집을 소유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고통 외에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문제도 갖고 계셨습니다. 죄가 없으셨으므로 죄인들 사이에서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친구들조차,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죄짓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구원을 주러 오셨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분을 배척했고 미워했습니다. 죄도 없이 고발당하고, 고문당하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육신의 고통도 겪으셨지만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갖고 계시는 분노와 심판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모든 고통을 진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감사하는 일 뿐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4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1월 15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5주차(37-39문답)

[제37문] “고난을 받으사”라는 말로 우리는 무엇을 고백합니까? [대답]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사셨던 모든 기간에, 특히 생의 마지막 시기에 모든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몸과 영혼에 짊어지셨습니다(사 53:4, 12; 딤전 2:6; 벧전 2:24; 3:18). 그분은 유일한 화목제물로 고난을 당함으로써(사 53:10; 롬 3:25; 고전 5:7; 엡 5:2; 히 9:28; 10:14; 요일 2:2; 4:10), 우리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저주로부터 구원하셨고(롬 8:1-4; 갈 3:13; 골 1:13; 히 9:12; 벧전 1:18-19),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의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요 3:16; 6:51; 롬 3:24-26; 고후 5:21; 히 9:15; 10:19).

신앙고백문답 제37문답부터 39문답까지는 우리 주님의 인성의 두 번째 단계를 설명합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주님께서 겪으신 고난입니다. 이 문답과 함께 우리는 사도신경의 네 번째 단락의 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 지옥에 내려가시고.” 우리는 신앙고백문답 제44문답까지에 걸쳐 신조의 이 네 번째 단락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막중한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고난이 무엇인가를 대충 압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질병으로 인한 고난의 침대에 누워 있었던 기억을 생각하면서 엄청난 분량의 육체적 고난에 관하여 진절머리를 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육체적 고난 못지않은 극도의 정신적 고난을 경험하는데, 그들의 생활 속에 침투한 비극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인하여 심지어 자살하기까지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주님의 생애는 전생애 동안 육체는 물론이고 특별히 영혼도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이러한 고난은 자신에게 정해진 결정적 희생의 시간이 오기까지 엄청나게 커갔습니다. 최종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의 영혼은 거의 부풀어 터질 듯했습니다(눅 22:39-46). 주님의 육체는 채찍에 맞으셨고, 십자가에 달리되, 손과 발은 못에 박혀, 그야말로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으리 만큼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모진 고난에 처해지신 예수님의 고난은 그야말로 전적으로 무고한 것이어서, 고난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 의당히 받는 고난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이 모든 고난을 겪으셔야 했습니까? 신앙고백문답의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첫째, 그가 받으신 고난은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가 예수님의 육체와 영혼에 직접적으로 가해졌습니다. 둘째, 하지만, 그가 받으신 고난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순전히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전혀 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들의 모든 죄값에 대해 예수님께 대신 형벌을 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과 죽음을 대신 담당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이 되어 주셨음에 따라 두 가지 놀라운 축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했습니다. 첫째, ‘영원한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는 완벽한 구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 의, 그리고 영생’ 등이 저주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든 인류’라고 한 데 대해서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신앙고백문답에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당신께서 선택하신 자신의 교회만을 위해서 구원 계획을 갖고 계시다는 데 대해 여러 번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선택 받았던 선택 받지 아니했던지 상관없이,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제물이었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여기서 ‘모든 인류’라는 표현은 시대 전체를 관통하여 택함 받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앙고백문답의 나머지 부분에서 과연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지가 아주 확실해집니다. 은혜와 의와 생명을 선물로 받은 ‘우리를 위하여’이지, 그렇지 아니한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대가 때문에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일부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면서, 결국 모든 인류에게 구원이 임한다고 하는 ‘우주적 속죄’를 가르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왜 잘못되었습니까? 요한일서 2:2에서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제38문] 그리스도님은 왜 재판장 ‘본디오 빌라도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대답] 그리스도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세상의 재판장에게 정죄를 받으셨으며(마 27:24; 눅 23:13-15; 요 18:38; 19:4, 11), 이로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사 53:4-5; 고후 5:21; 갈 3:13).

비교적 짧은 신조에 속하는 사도신경에는 하나님 외에 두 사람의 이름을 더 거론합니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와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왜 이같이 대역죄인의 이름이 거론되었습니까? 이유는 이렇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거짓으로 예수님을 모함하여 고소했을 때, 예수님의 재판에 책임을 진 재판장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황제 시저가 임명하였는데, 따라서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빌라도가 주관한 재판의 배후에는, 사실상 세상 정부의 권위와 하나님 자신의 권위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거짓 증언들을 들게 되었을 때,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무죄와 결백을 선언했습니다(눅 23:4, 14; 요 19:4). 세상 정부의 권한과 판단으로도 예수님께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이 명백히 선언된 것이었습니다. 그런 결정은 뒤집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범죄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빌라도는 결국에는 예수님을 범죄자처럼 다루어 병사들에게 넘겨버렸습니다(눅 23:24-25). 그래서 세상 권력은 예수님께는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로마 정부의 권력 뒤에는 사실상 하나님의 권세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롬 13:1-2).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결백을 빌라도를 통하여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당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의 구속을 위한 죄를 품고 있으셨기 때문에 빌라도를 통하여 사형을 선고 받게 하셨습니다. 당시 빌라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결백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의 전도된 행동은 아주 ‘사악한 범죄’였던 것입니다. 결국 당시 세상의 대표이던 로마 정부가 예수님을 죽인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신 스스로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임에 다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가해진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재판, 즉 결백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정죄를 받으심으로써 이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예수님을 정죄함으로써 이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39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신 것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이므로(신 21:23),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이 내게 임한 저주를 대신 받은 것이라고 확신합니다(갈 3:13). 

이 질문은 더 나아가서 신앙고백문답 제38문답에서 제시한 생각을 설명하는데,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닌, 법적 사형집행 방식인 십자가형이어야만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에 못박혀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십자가형(두 개의 나무를 못으로 박아 십자가를 만든)으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을 때, 그러한 형식의 사형집행은 구약의 저주를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21:22-23에 의하면, 치욕을 가하기 위해 범죄자의 시신(유대인의 사형집행은 돌로 죽이는 방식입니다)을 나무에 매달았습니다. 그러한 방식은 사람들에게 그가 법을 어긴 대가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육체는 치욕을 당하시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그 위에 임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하는 모든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자신이 스스로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빠져 죽으시던지, 아니면 독이 든 음식에 의해 죽으시던지, 혹은 늙어서 죽으시던지, 또는 다른 방법으로 자연사하셨다면, 그러한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징계인 하나님의 저주가 될 수 없었습니다.

참고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게 명백히 죽음의 형벌을 집행하신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날 사형 제도는 비도덕적이므로 확실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바보 같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2020년 11월 14일(SATUR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4주차(35-36문답)

죄인이라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희망이란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향해 반역을 저지른 피조물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 곧, 우리에게 영원토록 행복하고 거룩한 인생을 보장해주었을 그 단 한가지를 지키는 것조차도 우리는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진노를 벌어들였습니다. 더욱이나 한심한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태를 바로잡거나 잘못을 돌이키고자 하는 욕구조차도 없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증오하고, 반역과 무모함, 무관심 등으로 일관하며 만족한 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파멸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과연 어떠한 처방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던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했던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처지인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계획은 오직 무한한 지혜의 소유자이신 하나님만이 마련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온갖 불의와 타고난 죄성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우리를 당신께로 되찾아오시려는 하나님의 확고하고도 단호한 의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어 당신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놀라운 계획을 성취하시게 됩니다. 곧, 그리스도를 통하면 우리 삶에 드리워진 온갖 문제의 근원이었던 죄가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식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로 21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1월 13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4주차(35-36문답)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신으로 잉태되신 그리스도의 탄생이란 우리에게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우리로서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이셨고 실제로 참 인간도 되셨기에 우리를 위한 중보자의 조건을 전적으로 완벽히 갖추셨습니다.

우리로서는 결코 살아낼 수가 없는 삶, 바로 하나님을 향한 한결같은 순종의 삶이란 것을,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능히 살아내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가 진 빚이었으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갚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셨기에 그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셔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죄의 형벌은 곧 죽음을 의미했는데,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신 죽어주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지었던 죄의 빚을 말끔히 청산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으로 인해 궤멸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신의 능력 안에서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깊이 통탄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잔존해있는 하나님께 대한 증오를 사랑으로 변화시켜 주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완벽하신 중보자이십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4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11월 12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4주차(35-36문답)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우리와 형제가 되고 싶으셨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하고 한계가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지만 자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며 무한하시고 또 전능하신데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들이며 전적으로 철저히 타락한 반면 예수님은 완벽하시며 죄가 없기까지 하십니다. 그런 분께서 어찌하여 우리의 형제가 되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는 대체 어떠한 이유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고 싶어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달리 우리의 지혜로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랑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형제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으신 참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게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된 것을 대신하여 감당해 주시는 것은 오직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가능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예수님과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는 길도 유일하게 그것뿐이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한가지 사실만 제외하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되는 죄의 본성이 예수님에게는 없으셨고, 이후의 생애 속에서도 단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7절로 18절과 4장 15절을 읽어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