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9월 15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6주차(16-19문답)

누군가 인간들이 지은 죄값을 대신하여 지불하려는 이가 있고 그것이 성립되려면, 그 누구는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신분이라는 전제가 먼저 충족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진실로 의로우시며 털끝만큼도 죄가 없는 분이라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참된 하나님이시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되시는 분이 아닐 것 같으면, 고작 인간에 지나지 않는 존재가 감당하기에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라는 것은 실로 너무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곧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지신 온갖 능력을 동일하게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하게 인간이 되시고자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되, 죄를 전혀 모르시고 죄와 전혀 상관없는 의로우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성질이 전혀 다른 두 존재의 본성을 동시에 가진 분은 예수님을 제외하고 전 우주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그대로 지닌 채 인간의 본성도 취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죄와 그에 마땅한 처벌을 능히 감당하시고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을 획득해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3장 10절로 12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14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6주차(16-19문답)

악한 인간들의 죄값을 대신 치를 분은 유례가 없는 특별한 분이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참 인간이셔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서는, 그분께서도 그 죄를 진 자들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동급의 신분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필요로 합니다. 인간을 대신해서 죽으시려면 당신 스스로 먼저 인간이셔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으로만 인간처럼 보이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나 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백 퍼센트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둘째로, 온전한 인간의 신분이로되 진실로 의로우셔야 할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하여 털끝만큼의 죄도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희생으로는 본인의 죄값만을 치를 수 있을 뿐, 다른 이들을 위한 죄의 대가를 지불할 여력은 전혀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치러야 할 죄값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지은 죄의 빚을 해결해주시기 위하여 우리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완벽한 인간의 신분이 되기를 자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똑같이 취하셨지만 그것은 우리가 타고난 악한 본성과는 달랐습니다. 본래가 죄 없이 태어나신 그 분은 죄를 모르는 그 의로우심을 생이 끝날 때까지 유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7절과 7장 26절로 27절을 읽어보십시오.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러줄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은 죄 없는 인간뿐입니다. 전 우주를 통틀어 죄 없는 인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2020년 09월 13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6주차(16-19문답)

[제16문] 중보자는 왜 참 인간이면서도 의로운 분이셔야 합니까? [대답] 하나님의 의는 죄지은 인간이 죄의 대가를 치르기를 요구하나(사 53:3-5; 렘 33:15; 겔 18:4, 20; 롬 5:12, 15; 고전 15:21; 히 2:14-16), 누구든지 죄인인 사람으로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값을 치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시 49:7-8; 히 7:26-27; 벧전 3:18). 

제16문답에서는 왜 구원자가 참 사람이며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제14문답과 제15문답에서 인성과 신성 두 인격을 모두 겸비해야 하는 구원자의 자격에 대해서와 왜 꼭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미 배웠습니다.

여기서는 제14, 15문답에서 배운 것들에 더하여 우리의 대속자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지녀야 하지만 죄성은 지니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자는 일반적인 아담의 후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전 15:22)고 했는데,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은 모두 죄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아담 안에서 반복되는 삶을 사는 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죄가 없는 분은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성이 아담의 죄와 부패로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성신에 의해 처녀의 몸에 잉태되셨습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신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이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고 했습니다. 우리의 중보자의 처녀의 몸에서의 거룩한 수태와 탄생은 기독교의 근본 진리로서 사도신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제35문답).

우리의 구원자께서는 진짜 사람이 되셨습니다. 천사가 우리의 대리자가 되는 것은 가능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사의 본성은 죽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면으로, 동물의 경우 영혼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영적인 징계를 받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의로운 사람이시므로, 그렇게 우리의 주님은 죄가 없으시고, 어떠한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는 완전하고도 절대적으로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의 완벽한 인간 본성(육체와 영혼)은 다른 죄성을 지닌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만족에 의해 사용되었습니다.

[제17문] 중보자는 왜 동시에 참 하나님이셔야 합니까? [대답] 그의 신성의 능력으로(사 9:6; 롬 1:4; 히 1:3),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신 4:24; 시 130:3; 나 1:6) 그의 인성에 짊어지시며(사 53:4, 11; 요 10:17-18), 또한 의와 생명을 획득하여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위함입니다(사 53:5, 11; 54:8; 요 3:16; 행 20:28; 고후 5:21; 벧전 3:18).

제17문답은 제14문답에서 우리의 구원자는 하나님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해서는 안 될 필요성에 관해 진술한 진리를 반복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대리자로서의 구속주는 비록 죄가 없다 할지라도 또한 엄청난 화로서의 하나님의 진노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는 참 인성을 가진 하나님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참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님과 함께 영원토록 전능하신 삼위일체의 제2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임에 다름이 아닙니다. 오늘날 현대주의자들과 많은 이단들(여호와 증인, 크리스챤 싸이언스, 몰몬교 등등)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을 부인하는 것은 사실상 적그리스도요 버림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라고 한 말로써 시작합니다. 물론 ‘말씀’이라는 단어는 14절의 설명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말씀’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 하나님 및 성령님과 함께 하십니다(3-10절). 그러면서 볼 수 없는 분이신 하나님을(18절), 보이는 하나님으로서 ‘선포(계시)’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이어야만이 하나님을 보일 수 있습니다.

아들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간 본성의 결합을 ‘성육신(하나님께서 육체가 되셨다)’이라고 칭합니다. 이 두 본성의 결합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신비이지만,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것이 실제로 발생하였다고 믿는데, 만약 우리가 구원 받았다면 그렇게 되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회의 처음 몇 세기 동안, 몇몇 영향력 있는 교사들이 우리 주님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성에 대한 잘못된 관점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관점은 주로 네 가지였는데, 교회는 회의를 열어 이들의 주장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들의 관점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리안주의(Arianism). 아리우스는 예수는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가장 위대한 분이시지만, 정작 하나님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했습니다.
  2. 아폴리나리안주의(Apollinarinism).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지 참 인간은 아니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3. 네스토리안주의(Nestorianism). 네스토리우스는 예수님에 대해 두 본성(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니신 분으로서 보지 않고,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하나님과 인간)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개별성을 부인했습니다.
  4. 유티키안주의(Eutychianism). 유티키스는 예수는 한 인격으로서 오직 한 본성만을 지녔고, 이 한 본성은 하나님과 사람이 혼합된 것이어서 신성이 충만한 것도 아니요 인성이 충만한 것도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부인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 분이시며, 서로 다른 두 개의 본성,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본성(신성)과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본성(육체와 영혼)을 지니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성경이 우리의 주님에 대해 이런 분이시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비록 궁금하긴 하지만 호리만큼의 의심도 없이 믿습니다. 궁금증을 갖는 것과 의심하는 것 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본성은 예수님의 인적 본성에 능력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성으로서 하나님의 혹독한 진노 아래 고통을 받으실 수 있으셨으며, 그럴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미움이나 반감을 전혀 갖지 않으셨습니다. 믿는 자들 모두가 받아야 하는 지옥의 모든 징계를 대신 받으시는 동안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완벽하게 사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인간 본성으로서 하나님의 한없는 진노의 고통을 감내하였던 이것은 신적 본성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과 그의 말할 수 없는 고통 문제와 관련하여 오직 최소한의 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누구도 우리의 구원자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받은 고통만큼의 고통을 받거나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셨기에 그 모든 고통을 견디실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완벽한 삶과 죽음의 완벽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의와 생명이 우리를 위해 지불되었습니다.

[제18문] 그러나 누가 참 하나님이시며(렘 23:6; 말 3:1; 롬 8:3; 갈 4:4; 요일 5:20) 동시에 참 인간이시고(눅 1:42; 2:6-7; 롬 1:3; 빌 2:7; 히 2:14, 17; 4:15) 의로우신 그 중보자이십니까(사 53:9, 11; 렘 23:5; 눅 1:35; 요 8:46; 히 4:15; 7:26; 벧전 1:19; 2:22; 요일 3:5)? [대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니(마 1:23; 눅 2:11; 요 1:1, 14; 14:6; 롬 9:5; 딤전 2:5; 3:16; 히 2:9), 즉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분이십니다(고전 1:30; 고후 5:21). 

제15-17문답에서처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해 내기 위한 대체자의 자격이 무엇인가를 잘 살펴볼 때, 우리는 구속자의 정체성을 잘 알게 됩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2000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구원의 중보자입니다. 이 질문에서 강조되는 세 가지 문제를 주목합시다.

 첫째,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거저 주신바 되셨습니다. 이 진술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에게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실 의무가 결코 없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단지 사랑과 자비만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유명한 구절인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는가를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도다!” 로마서 5:8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만이 아들을 무상으로 내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아드님께서도 우리의 구원주가 되시기 위하여 자원하여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2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다”고 선포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갈 2:20; 요일 3:16).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죄인들 쪽에서 주님을 원하거나, 주님을 요청하거나, 주님을 받아들일 만했거나, 주님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라고 한 바와도 같았습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벽하게 구속되었고 의로워졌습니다. (이 진술을 제30문답과 비교해 봅시다!) 그리스도는 완전하고 충분한 구원자이십니다. 마치 예수님의 구속사역이 부족한양 무엇 하나라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택 받은 각인을 위해 하나님의 의를 충분히 만족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고, 그리고 구원주의 죽음과 부활의 값이 지불됨으로 우리를 위한 영생이 사지게 되었습니다. 회개와 믿음조차도 승천하신 영광의 주님에 의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행 5:31; 엡 2:8).

셋째, 중보자는 오직 한 분이십니다. (이 질문의 표현을 주목합시다!) 정통(참된) 기독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요,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으로 믿어 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신비를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리스도께서는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임을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가리키실 때, 항상 ‘나’라고 하셨지 ‘우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번 학습에서 보았듯이, 거짓 선생 네스토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는 두 사람이라고 가르침으로 혼란을 일으켰는데, 따라서 교회는 이 문제에 대하여 심도 있게 의논한 끝에, 최종적으로 네스토리우스가 잘못되었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칼케돈 신조’를 작성했습니다(AD. 451). 이 유명한 신조에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관계성에 대해 진술한 바를 찾아보는 것은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제19문] 우리는 이것(18문답의 참 중보자 인식)을 어디에서 압니까? [대답] 거룩한 복음에서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복음을 처음에 낙원에서 친히 계시하셨고(창 3:15), 후에는 족장들과(창 12:3; 22:18; 26:4; 28:14; 49:10) 선지자들을(사 42:1-4; 43:25; 49:6; 52:13-53:12; 렘 23:5-6; 31:32-33; 미 7:18-20; 요 5:46; 행 3:22-24; 10:43; 롬 1:2; 히 1:1) 통해 선포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제사들과 다른 의식들로써 예표하셨고(레 1-7장; 골 2:17; 히 10:1, 7), 마지막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해 완성하셨습니다(롬 10:4; 갈 3:24; 4:4-5; 히 1:1-2).

제19문답에서는, 구세주는 어디에서 보여지셨는지, 다시 말하자면 그분이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지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오직 한 곳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집니다. 성경은 ‘복음’을 구원의 ‘복된 소식’으로서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자신이 베푸시는 사랑을 인간에게 가르치시기를 기뻐하시는데, 그러한 가르침을 계시라고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에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는 두 가지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반 계시입니다. 이것은 창조물인 자연에서의 하나님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우주는 “그의 손으로 하신 일”입니다(시 19:1). 그리고 우주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지혜와 능력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하늘, 별, 지구, 바다, 나무, 풀, 동물 등등과 더불어 특별히 사람의 존재는 창조주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모든 사람은 자연에서 하나님과 대면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 예배와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롬 1:19-20). 우리가 세상(과학 등등)에 대하여 공부할 때, 사실은 하나님에 관한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과학 선생님이 이러한 부분에 대해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둘째, 특별 계시입니다. 자연이 하나님을 계시하고는 있지만, 자연을 공부함으로써는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아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창조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관한 메시지는 오직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특별 계시’라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그리고 자연 계시까지 포함하는 우리의 최종적인 지식의 근원입니다. 특별 계시인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실천에 대한 유일한 기준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의 전체 성경은 예수님에 관하여 선포해줍니다. 제19문답은 구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입니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그리고 그곳에서조차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에서 그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불렀고, 그리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이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이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족장들(문자적으로 옛적 아버지들)’은 창세기에서 거론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 그리고 유다의 후손으로서 오실 구원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시대 때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힘입어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좀 더 추가적인 내용들을 말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구약성경에서 성경을 기록한 마지막 선지자였으되,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사람들에게 제시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신 제사법과 관련한 많은 희생제물과 의식을 통해서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하여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되는 양과 염소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희생제물로 내어 놓으실 구속주를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왕들은, 역시 장차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 그리고 왕으로서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구약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은 처음에는 아주 간단하고도 적은 분량이었지만, 갈수록 더 많은 정보들이 제공됨으로써 최종적으로 구약시대를 마치는 시점에서는 ‘특별 계시’가 되는 위대한 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구약 특별 계시가 목표한 바의 성취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준비되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를 보내셨습니다(갈 4:4).

이 아주 긴 가르침은 성경의 영감에 관한 작은 설명 없이는 아직 끝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진짜 말씀으로서의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1. 성경이 스스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고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한 표현과 그와 비슷한 표현들을 읽습니다. 누가복음 1:68-70, 디모데후서 3:16, 그리고 베드로후서 1:21 등도 역시 구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말씀하셨습니다(마 4:4; 요 10:35).
  3.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임하고 나면 신약 성경을 기록할 초자연적인 능력을 받게 될 것이라고 그의 사도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요 14:26; 15:26-27)
  4.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고전 2:13; 살전 4:8).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권위와 성경의 권위는 동일합니다. 성경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결코 틀리지 않고(충분히 신뢰할만하다), 오류도 없다(실수가 없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전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성경 자체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성령께서 영적인 마음과 이해와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고전 2:14).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과 완벽한 말씀이라고 말하려면, 처음 주어진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들을 참고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다양한 성경 번역들은 비록 아주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대단히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2020년 09월 11일(FRI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5주차(12-15문답)

우리는 하나님께 진 빚을 스스로 갚을 수 없고 이 세상에 우리를 위해 대신 그 빚을 갚아줄 수 있는 피조물도 없는 것이라면 대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디선가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내야만 할 것입니다. 중보자는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두 사람이나 두 그룹 사이에 등장합니다. 중보자는 양편의 이해관계를 되도록 최대한 충족시킴으로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를 필요로 합니다. 이 중보자께서 우리 죄의 빚을 모두 청산해준다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자는 막강한 불행과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의 단절이 빚어낸 엄청난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그 중보자와 구원자는 유례가 없이 특별할 것입니다. 유일무이해야 합니다. 그는 의롭고 참되며 결코 죄를 지어본 적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또한 세상 그 어떤 피조물보다 강해야 하니 참된 하나님이시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훑어봐도 그런 중보자와 구원자를 우리는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런 분을 준비해두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 20절로 23절을 읽어보십시오. 결국 “예수”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처럼 아기로 태어나신 참 인간이시자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2020년 09월 10일(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5주차(12-15문답)

우리 스스로 죄의 빚을 청산하여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희망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혹시 우리를 위해 빚을 대신 갚아줄 수 있는 누군가, 어떤 피조물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과연 누가, 아니면 어떤 것이 그래 줄 수 있을까요? 첫째로, 그는 인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를 위함이니 인간의 처벌이 요구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한 가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죄짓기를 하루 종일, 매일같이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진 빚을 갚고 다시 그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만 합니다. 각자 저마다 치러야 할 죄의 빚이 있는 상태로 서로가 서로의 빚을 갚아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 만약에 완벽하게 의로운 어떤 사람 하나가 있어 우리의 죄값을 치러줄 것을 제안했다고 쳐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무한하며 끝이 없습니다. 그분의 능력도 무한하며 한계가 없으십니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무게를 결코 감당치 못합니다. 오히려 그 무게에 짓눌려 궤멸되고 말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모든 빚을 온전히 다 갚지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을 때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자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면전에 서 있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 시편의 저자도 기록하기를, 만일 우리에게 우리의 죄값 그대로 하나님의 형벌이 임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6장 1절로 5절과 시편 130편 3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09일(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5주차(12-15문답)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데 요구되는 대가를 자기가 먼저 나서서 온전히 다 치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다고 봐야겠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진 빚을 어떻게 하면 우리 스스로 갚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제13문답에서 “우리는 스스로 그 값을 치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결단코 그럴 수 없으며 도리어 우리는 하루하루 그 빚을 늘려만 갈뿐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죄를 짓는 것이 가능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은 원한다면 하나님께 반역할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주셨었습니다. 그들이 원한다면 그들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타락 이후 인간은 달라졌습니다. 이제 인간에게 죄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선택의 여지조차도 주지 않습니다. 이제 사람은 본성부터 악해져 버렸습니다. 감히 죄 없는 삶 같은 것은 꿈도 못 꿉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13문답에서 우리는 날마다 빚을 증가시키기만 할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 죄인의 안목이나 기준으로 판단하는 선하고 옳은 일이라는 것에는 어쩔 수 없이 죄가 틈타있기 마련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 수준의 의라고 해 봤자 구역질 나도록 더러운 옷과도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진 빚을 다 갚을 희망이 전무한 우리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다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희망 역시도 전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이사야 64장 6절로 7절과 로마서 3장 19절로 20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08일(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5주차(12-15문답)

법정에서 일단 죄인의 범행이 확증되어 판결을 받게 되면 그는 벌금형이나 감옥형 또는 두 가지 다에 처해지게 됩니다. 법을 어긴 사람은 그에 합당한 형을 선고 받겠거니와, 한 푼의 부족함도 없이 전액의 벌금을 납부하고, 마지막 남은 일분 일초까지도 옥살이를 다 채우기 전까지는 결코 정의가 정당하게 실현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조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당신의 명령을 어김으로 먹지 말라고 하신 과일을 먹는다면 그들은 무조건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롬 6:23). 육신과 영혼의 죽음,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죄에 관한 하나님의 온당한 판결입니다. 대가는 완전히 치러져야 합니다. 제12문답에서의 답변 내용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중에서도 한줄기 희미한 빛의 위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어떤 대가는 분명히 치러져야 하되, 우리 스스로가 못한다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이루어져도 된다고 한 것입니다.

즉, 만일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처벌을 대신 받아줄 사람만 있다면, 우리는 형벌을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기 수백 년 전의 사람이었던 이사야 선지자는 당시로서는 자기 자신조차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때부터도 이미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처벌을 감당하실 그 누군가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사 7:14).

2020년 09월 07일(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5주차(12-15문답)

어쩌면 이 세상에서 최고로 중요한 질문과 대답이 제12문답일 수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인간의 처지에서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러한 형벌을 벗어나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깨닫는 것이야 말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제12문답은 단순히 육신이 죽고 사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영원한 삶과 죽음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통상 아무래도 악한 일보다는 선한 일을 많이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수단이 되어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곤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죄값과 그에 따른 형벌에 대해 아예 문제삼지도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심리에는 비록 인간이 악을 행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어련히 용서해주시겠거니 하는 생각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용서하긴 하시니까요.

모세가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기를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당신의 이름을 선포하시면서 또한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부정과 위반과 죄를 용서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또한 덧붙이시기를 “결코 벌을 면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자신의 의가 온전히 만족될 것을 요구합니다. 인간이란 자신들이 이미 지은 죄와 앞으로 여전히 짓게 될 일체의 죄가 충분히 처벌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출애굽기 34장 5절로 8절을 읽어보십시오.

2020년 09월 06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05주차(12-15문답)

[제12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가 일시적인 형벌과 그리고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대답]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창 2:17; 출 20:5; 23:7; 겔 18:4; 히 10:30).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죄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사 53:11; 마 5:26; 롬 8:3-4).

성경이 인간에 대하여 유죄 선고로만 끝내지 아니하였고, 그에 따라 신앙고백문답도 제11문답만으로 끝내지 않은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 신앙고백문답의 두 번째 주제 부분인 죄와 유죄 선고로부터의 인간의 구원이라고 하는 복된 소식과 복음에 관하여 공부할 것입니다. 신앙고백문답 제73문답의 질문에 따르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구속의 본질과 구속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예비된 구속을 어떻게 믿음을 통해 받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제23-58번문답)’으로부터 복음이 무엇인지를 핵심적으로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위대한 진리인 ‘믿음에 의한 칭의(제59-64번)’에 대해 세부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구원의 길에서 우리를 유지하시고 지키시고 힘을 주시는 의미로, 교회의 매고 푸는 권세와 성례(세례와 성만찬)에 대하여 설명을 듣게 됩니다.

제12문답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기까지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배웁니다. 인간의 구원이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완벽한 공의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십니다. 결코 인간의 죄를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제11문답의 질문에서 설명했듯이 하나님의 공의와 징계는 인간의 죄를 철저하게 심판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이곳 제12문답은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의 필요성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즉 우리의 죄에 대하여 충분한 징계를 가하시는 데 따른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입니다. 이처럼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에게 구원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질문은 그렇다면 “이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데 있는 것이겠습니다. 누가 그리고 무엇이 죄인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떠맡고 나아가 피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형벌은 확실하고, 현세(지상의 세계)와 영원한 심판(미래의 지옥) 두 곳에서 요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과연 어떻게 해야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만이 이에 대한 대답을 내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1:7-8을 보십시다.

[제13문답]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대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킬 뿐입니다(욥 9:2-3; 시 130:3; 마 6:12; 롬 2:4-5).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의 총애를 누리고 하나님과 함께 지내기에 합당하게끔 우리를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반드시 만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는 모든 죄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죄를 그냥 관대히 봐주신다면, 그때에는 하나님 스스로가 정의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가치 없게 되고 맙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만족이 어떻게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면하게 됩니다.

제13문답은 “우리 스스로가 이 엄청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하는 데 대한 물음인데, 대답은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속죄 혹은 스스로의 구원이란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떤 죄인이든지 하나님께 자신의 죄값을 지불해야 하지만, 사실은 지옥의 영원한 심판 밖에는 달리 지불할 방법이 없습니다. 만에 하나로 혹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온전히 또는 충분하게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를 다시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죄를 증가시킨다는 사실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두 번째로, 하나님을 향한 완벽한 사랑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도 우리로서는 만족을 드릴 수 없는데, 이유는 인간의 마음은 부패해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각 인간으로서는 단 하루라도 죄스러운 생각과 표현 그리고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인간은 살아가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대한 완벽한 사랑의 표현을 요구 받고 있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두 가지 사실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구속을 성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정리하자면, 첫째, 우리의 모든 죄는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제11문답). 둘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매일의 용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다시 자신의 죄를 날마다 증가시킵니다.

결국 이 질문과 대답은 선한 일을 성취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주변의 모든 종교 형태를 정죄합니다. 그리고 소위 죄인의 ‘선한 일’이라고 평가되는 것들도 엄밀히 말해서 실제로는 선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과거의 죄와 죄책들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선한 행위가 자신을 천국으로 들어가게 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기대가 무너져 지옥에서 영원토록 처벌받아야 하는 실상 앞에서 억장이 무너질 것입니다.

[제14문답]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자가 있습니까? [대답] 단 하나도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겔 18:4; 히 2:14-17). 둘째,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짐을 감당할 수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시 49:7-8; 130:3; 나 1:6; 히 10:4). 

제14문답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속죄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에 관한 또 다른 질문에 대해 대답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전 질문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면 우리를 위해 대리자가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신앙고백문답에서의 ‘피조물’이란, 하나님 자신이 아니요,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어떤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반복하지만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첫째,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범한 죄로 인해 형벌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만약 어느 한 인간이 지은 죄값을 대신하여 다른 어떤 피조물을 징계한다면,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의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게다가 여기에는 사람보다 못한 천사와 동물은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천사는 몸이 없고 동물은 영혼이 없는데, 이 둘 모두가 형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참된 인간만이 죄인인 인간의 온전한 대리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켜줄 만한 대리자 자격을 온전히 갖춘 사람이란 결코 없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예외 없이 자신부터가 죄인이고, 그리하여 자신이 지은 죄값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런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릴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부터도 해결할 수 없는 법이므로, 여분의 공적을 쌓을 수도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공적이 모자라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넘겨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없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이러한 새로운 인간이 지옥에서 받아야 할 당신의 형벌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더 대답은 “아니요!”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할지라도, 한 순간이라도 죄 아래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죄에 빠지지 않아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질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형벌은 그를 죄인이 되게 하는 자에게 집행해야 하는데, 그러면 그는 스스로 형벌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것 외에도, 그처럼 완벽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직 다른 한 사람만을 대신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의 대리자는 될 수 없습니다.

아주 명백하게, 우리 스스로 성취할 수 있다거나 혹은 다른 피조물에 의해 구속을 받는다는 희망은 결코 없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심판을 대신 감당할 수 없고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사랑을 떠맡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는 참으로 희망이 없습니다. 인간의 죄와 완벽한 순종의 책임이 고려된 하나님의 완벽한 의가 만족되도록,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을 계획해 낼 수 있다면, 오직 하나님 한 뿐이십니다. 이 방법은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보상의 죽음으로 내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제15문답]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중보자와 구원자를 찾아야 합니까? [대답] 참 인간이시고(고전 15:21; 히 2:17) 의로운 분이시오(고후 5:21; 히 7:26)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난 분이십니다(사 7:14; 9:6; 렘 23:6; 요 1:1; 롬 8:3-4).

제15문답과 16문답 그리고 17문답은 우리를 대신할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 있는 대리자는 정확하게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가르칩니다.

제14문답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죄인을 위한 대리자는 스스로가 완전해야만 합니다. 게다가 그러한 대리자는 피조물보다 더 우월하여야 하며, 동시에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대리자는 초자연적인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결코 한 번도 보여진 적이 없는 유일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구속자는 인류의 어떤 능력과는 확연히 다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공급되어야만 합니다. 인류는 하나님의 의 앞에서 단 한 명의 죄인의 몫만이라도 대신할 수 있는 대리자를 낳지 못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면한 우리의 문제에 아주 적합한 대리자로서 하나님과 사람 두 본성을 지닌 중보자를 구원자로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제18문답은 이 구원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확인합니다.

우리가 나머지 신앙고백문답과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서 사용된 두 개의 단어에 대한 설명이 좀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중보자’와 ‘구속자(또는 구원자)’입니다.

첫째, 중보자에 대해서입니다. 중보자는 서로 다른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둘을 상호 간에 화해시키는 일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라고 선포합니다. 구약성경에서의 선지자들, 제사장들 그리고 왕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자로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죄를 제거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시는 것을 통하여 홀로 우리를 하나님께 데려가시고 하나님을 우리에게 오게 하시는 참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불과했습니다(히 8:6; 9:15; 12:24).

둘째, 구속자에 대해서입니다. ‘구속자’는 노예나 포로의 몸값을 지불하고 풀어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유월절 희생제사의 피를 지불하시고 동시에 당신의 강한 권능을 통하여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속하셨습니다(출 6:6; 15:13).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값을 지불하심으로 죄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그의 피는 우리의 구원을 샀습니다(엡 1:7). 그러나 그 값은 하나님의 의에 지불된 것이었지 사탄에게 지불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세주는 중보자이신 동시에 구속자이십니다. 그는 이러한 엄청난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셨고, 그에 따라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심에 있어서 신인(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의도적으로 행동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