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5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베드로후서 3:18을 읽어봅시다. 성도가 칭의될 때에, 그리하여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고 신분상으로 거룩하게 되는 현상을 가리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에서 계속 자라가는 일도 성도에게는 중요하고 항상 필요합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하여 이 일이 잘 진행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은혜는 단순한 신앙적인 느낌이나 감정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감동이나 감화 정도로만 은혜를 생각한다는 것은 사실상 성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는 명백히 권능이요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이기고 다스리는 실제적인 경험, 또는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엄연한 실력인 것입니다. 최근에 은혜에서 자랐다고 볼 수 있는 경험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2019년 3월 24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질문]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대답]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롬 5:5; 8:35, 38-39) 양심의 평안과(롬 5:1) 성신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롬 14:17) 은혜의 많아짐과(잠 4:18; 벧후 3:18)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것(견인)입니다(렘 32:40; 요 10:28-29; 빌 1:6; 벧전 1:5; 요일 5:13).

제36문답의 주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끝 부분에서 “...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 더욱 그러한데, 사실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견딜 수 있게끔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도르트 회의가 작성한 칼빈주의 5대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제17장에서 3개조를 통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습니다.  다소 특이한 것은 대신앙고백문답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제79문답 같은 곳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는 다루었습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고, 따라서 “그것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을 누리는 권리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사랑에 따른 것으로, 사실상 ‘은혜 언약’의 핵심 사상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거나 그처럼 받은 구원을 중도에 상실함이 없이 안전하게 영화의 단계까지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도 자신이 발휘해내는 의지랄까, 계획이랄까, 능력이랄까 여하튼 이런 데만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은혜 언약에 따른 것이고, 성도가 자신의 생애 속에서 이것을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모든 현실에 대해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로써 설명하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과 그들에게 견인을 주시려는 작정과 언약, 그로 말미암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떨어질 수 없는 연합,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보좌에서의 하나님께 올리는 끊임없는 간구로 말미암아 한 번 받은 영단번의 구원에서 결코 이탈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견인의 역사가 경험적 차원에서는 성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신의 신비한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즉 성신께서는 성도 속에 거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공효가 끊임없이 약동케 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신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성도는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안잔하게 보존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로 말미암은 양심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큰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가운데서도 때로는 많은 혈기와 죄와 유혹에 빠져 성도로서의 생명력이 약해지기도 하고, 심하면 아예 없는 것같은 상태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않고,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내포하고 있는 원리(은혜 언약)와 효력(성신의 역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바대로, 성신께서 성도와 늘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기 때문에, 어느 순간엔가 다시금 침체를 벗어버리고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딘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현실화시켜 보자면, 은혜를 의지하여 끝까지 분투하고 투쟁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일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도는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일종의 꼭두각시 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만의 의지와 노력에만 맡겨질 수 없는 것은 그럴경우 백전백패하리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성신께서 단순히 도우신다는 정도로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또 다시 기독교의 신비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성신께서는 항상 ‘자기 은닉적’으로 역사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실례를 들어봅시다. 한 일꾼이 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자갈 투성이라서 씨앗을 뿌릴 수 있을 만큼 깊이 파서 옥토를 만드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이때 성신께서 일꾼보다 몇 발자국 앞에서 먼저 일구어 놓은 후 살짝 덮어놓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꾼은 신기하게도 밭이 잘 일구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절로 힘이 나 더더욱 열심히 일구어 나갑니다. 그러한 중에 나름 힘든 곳과 조우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해나온 실력이 관성의 법칙과도 같이 작용하여 결국에는 딛고 전진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로 입양되고, 거룩해진 신분을 이 땅에서 누리는 존재들입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양심에 평안이 깃들고, 성신으로 말미암은 기쁨으로 충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때로는 환난에도 직면케 되지만, 능히 인내에 인내를 거듭함으로써 연단을 이루어 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개인적인 도덕성 함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또한 그래야만 성신의 역사에 성립된 증거가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2019년 3월 23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은 성도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세상을 거역하고 싶어합니다. 세상의 특징은 욕심(탐심)입니다(약 1:15).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 이 세대는 당시와는 몰라보게 다를 정도로 더더욱 사악해져 있습니다. 사방에 널려 있는 노래방들, 모텔들, 성매매 전단지들, 음란한 영화들, 잔인한 폭력을 미화시키는 온라인 게임들, 동성애의 커밍아웃 기타 등등. 더욱 놀라운 것은 짝퉁 교회들의 범람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일에는 닭장 속의 닭처럼 사육당하는 그런 교회로부터 나와 참된 교회를 이루는 일도 포함됩니다. 당신은 지금 교회에서 양육을 받으십니까? 혹 사육을 당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019년 3월 22일 (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거룩을 이루시지만, 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면서 순종을 원하십니다. 그에 따라 성도는 죄된 습관을 깨트리고 거부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룩에서 자라가게끔 주신 다양한 수단에 집중해야 합니다. 가령, 성경 읽기, 기도, 설교 듣기, 선행 기타 등등입니다. 빌립보서 2:12-13을 읽어봅시다. 지금 당신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주시니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혹 그것이 스스로의 종교 감정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2019년 3월 21일 (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칭의와 양자(입양)처럼 거룩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영 단번에 일어난 일이로되, 세 번째 요소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면서 앞의 두 요소를 활성화시켜 줍니다. 이것은 성도의 생명력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구현해 내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갈라디아서 5:22-23을 읽어보십시다. 여기에 나오는 아홉 가지 덕목들은 사실은 다른 종교들이나 여타 도덕 단체들도 비슷하게 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그렇게 하는 동기와 목적 및 수단과 방법  등에서 확실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신의 열매'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이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도덕주의와 혼동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거룩과 순전히 인간이 스스로 추구하는 선행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있습니까?

2019년 3월 20일 (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비록 거듭난 우리이지만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따금식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향하려는 마음 역시 계속 약동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단히 거룩해지려는 모습입니다. 에베소서 4:22-24을 읽어봅시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이 잘 구별되십니까? 그러면 새 사람을 입는 모습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한 25-32절을 읽어봅시다. 이러한 모습을 벗어날 경우에 성신께서 근심하신다고 했는데(30절), 이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입니까?

2019년 3월 19일 (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과 모양에 따라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아담의 죄된 형상으로 태어납니다.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다시 만드시는 일입니다. 죄는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어하는 자아를 가졌습니다. 새로운 자아는 점점 강해지고, 죄된 자아는 점점 약해집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때때로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처럼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죄된 습관을 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거룩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셨으니 마치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24을 읽어보십시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더더욱 굳은 결심과 의지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써야하지 않겠습니까?

2019년 3월 18일 (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먼저 고린도전서 6:11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러나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것들 중 하나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특별한 것을 위하여 따로 구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피를 지불하셨는데, 그에 따라 당신의 거룩하심과 같이 우리도 거룩하게 하셨는데 이 일은 우리가 구원 받을 때 단 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인격이 점차적으로 변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인격의 변화란,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따라 죄성은 점점 줄어들고 거룩한 삶은 점점 증거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결코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다가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게 됩니다. 지금 당신의 삶은 하나님께로 향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한 삶에 있어서 확실하게 발전하고 있습니까?

2019년 3월 17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5문답

[질문] 거룩하게 하심이 무엇입니까? [대답] 거룩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고(겔 36:27; 빌 2:13; 살후 2:13),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온전히 새사람이 되고(고후 5:17; 엡 4:23-24; 살전 5:23),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됩니다(겔 36:25-27; 롬 6:4, 6, 12-14).

제35문답의 주제는 거룩함, 즉 제34문답에서처럼 양자로 입양된 하나님의 백성인 까닭에 마땅히 힘써야 할 성화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은 우리 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려함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고귀한 죽음으로 우리는 모든 죄로부터 용서되었고 더불어 깨끗케도 되었습니다. 첫째, 우리의 죄로 인한 유죄로부터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칭의입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 죄의 권세로부터도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입니다.  하지만 이 두 요소는 논리적으로는 구분되어도, 경험적으로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 사실에 주목하지 않게 되면, 항간에 특별히 구원파의 경우에서 명백히 보듯이 신앙주의라는 데로 빠져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러한 모습이 제도권 안에서도 적지 않게 나타나므로 각별히 주의해야겠습니다.

우리 구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숭천하신 후, 우리의 심령에 죄의 권세를 깨부수는 성신을 선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정말 놀라운 진리입니다. 이것에 대해 ‘온전히 새 사람이 되게 하신다’고 했는데, ‘새 사람’이라는 표현은 반대편에 있는 ‘옛 사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죄의 권세에 지배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옛 사람’은 거듭나기 전의 우리를 지배하고 주장하는 죄의 권세로서, 곧 죄의 실체였습니다. 개혁교회는 인간의 상태에 대한 ‘전적부패론’을 절대적으로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옛적에 동양 철학계에서 맹자에 의해 성선설이 가르쳤고, 조금 지나서 순자가 그에 반대하여 성악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성경적 입장에서 보자면 단연 성악설이 옳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에 지배되는 존재여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결단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장사로 말미암은 성신께서 우리의 심령에 좌정하시게 되자, 그토록 기고만장하던 죄의 권세는 이제 죽은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고(롬 6:6; 갈 2:20), 그리고 함께 장사되었고(롬 6:4), 그리고 그와 함께 부활했다고 선포합니다(골 3: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그리고 부활되셨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게 됨에 따라, 우리의 삶에서의 죄의 권세와 능력이 벗겨졌고, 반대로 부활 생명으로 표현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순종하신 능력이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제35문답은 로마서 6:1-14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죄스러운 정욕과 욕구까지도 제압해주셨다는 깨닫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성도가 성신에 의해 중생될 때에, 그는 이후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순종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고, 어찌하든지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리려는 소망과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전제했듯이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리성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리적으로는 각 개념을 분리할 수 있겠지만, 경험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동전의 양면을 가를 수 있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즉 성화라는 용어는 편의상 사용하는 것이지, 우리가 실제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음으로써 의롭게 되고, 동시에 거룩하게 될 수 있는 것이지, 칭의의 문제이든 성화의 문제이든 간에, 실제로 우리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는 영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인 것이고, 이때 성화는 칭의의 토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성화는 자신에게 칭의가 일어났다는 데 대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여 자신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의 어떤 높은 정도나 고상한 특성을 들어 자신에게 칭의가 일어난 증거로는 삼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영락없이 ‘이행칭으’라고 하는 괴물을 끌어앉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금석은 이것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성도로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성화 혹은 거룩함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떠한 대단한 업적(성화)를 이룬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것’으로 돌리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 앞에서 의외로 말과 행동이 다른 경향이 교계에 팽배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진리를 말로는 수궁하지만, 실제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는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를 내세우고 높이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물어봄으로써 마치게 될 때에 이 문제는 더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성화의 선물(거룩해지려는 데 대한 소망)과 칭의의 선물(죄의 용서와 지옥으로부터의 구출에 대한 감사) 이 양면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 증거로는 어떤 것을 제시할 수 있습니까?

 

2019년 3월 16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4문답

성경이 우리를 가르치는 특별한 내용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에 있어서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는 한 의당히 하나님의 다른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가 됩니다. 또 하나의 특별한 가르침은, 의로운 삶에 있어서도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혹 죄를 범하게 되면 즉각 회개해야 하고, 다시 그것을 반복하지 않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묘사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표식으로 선포하고 있는 요한일서 3:10을 읽어보십시오. 지난 한 주간의 삶 속에서 이 두 가르침과 관련하여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습니까? 혹 있다면 또는 없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