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해설과 묵상

금주에는 “제1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한 말씀을 보면서, 핵심적으로 하나님보다도 다른 것에 더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백히 금하신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사회 구조부터가 우리의 정신을 홀딱 빼앗으면서 온갖 잡다한 것들을 하나님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를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으려면 성도로서 취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자세부터 확고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금 자신의 신분을 재확인하면서, 그러한 자로서의 기본적이면서도 강력한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는 수단을 활용하십시다. 즉 내일의 교회 공예배에 참석하여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경배하십시다. 그렇게 하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세상이 감히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그러한 새 생명의 활성화가 자기 속에서 불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런 셈입니다.  

 

2022년 7월 1일(FRI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해설과 묵상

현대인들의 우상들 중에는 단연 재물이 으뜸을 차지할 것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털어 일종의 진리(?)처럼 자리잡고 있는 사실입니다. 요즈음은 계산 기술의 발달 덕으로 돈으로써 돈을 사고파는 ‘돈 직거래’가 왕성해 지고 있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성도라면 ‘하나님'과 ‘돈(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진리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태복음 6:24을 읽어봅시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붙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재물(돈) 둘 간의 상호 배타성이 눈에 들어옵니까? 그렇다면 마치 우리네 교회 성장의 원동력처럼 자리잡고 있는 기복주의와 상급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2022년 6월 30일(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해설과 묵상

열왕기하 17:33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진실성은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할 때에 성립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현대인들의 우상은 가히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룻밤 주기로 눈부시게 발전하는 기술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서 다분히 우상이 될만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와 같은 것들을 주시지만, 어리석게도 인간은 기술 그 자체를 의지하고 심지어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지금 당신에게서 가히 우상 노릇을 하고 있는 기술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022년 6월 29일(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해설과 묵상

갈수록 ‘나홀로 족’이 늘어만 가는 추세입니다. 이는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 관계도 허물어지고 있는 데 대한 반증이겠습니다. 혹 ‘이기심’이 혼자 사는 사람의 성향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겠습니까? 백퍼센트라고는 확신치는 못해도 대체적으로는 그럴 것입니다. 인간은 애초부터 더불어 살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서로 섬기고 용서하는 삶의 토대 위에서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진실해지는 법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도 진지해지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지 말고, 먼저 상대방에게 다가가십시다. 그러한 실력으로써 하나님께도 담대히 나아가십시다. 우리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공효를 힘입어서 말입니다. 교회의 지체들과 일체로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2022년 6월 26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해설과 묵상

[제47문] 제1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제1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심을(시 81:10-11) 부인하거나(시 14:1), 그러한 분으로 경배하지 않거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며(롬 1:20-21), 또한 오직 그분께만 드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다른 자나 다른 것에게 돌리는 것입니다(왕상 18:21; 왕하 17:33; 겔 8:16-18; 마 6:24; 롬 1:25).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 제47문답의 핵심은 제1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을 제한시키는 바에 대한 것입니다.  즉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한 제1계명 본연의 명령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정확하게 고찰할 것과 그렇게 깨달은 바대로 적극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제1계명 자체의 부정적인 특성상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의당히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성도에게서 이런 경우는 곧잘 일어나곤 합니다. 가령, 회사에서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때마침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제가 화제로 떠오르면서 주로 비판적인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늘어놓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 스스로 기가 꺾이면서 그만이나 비록 소극적이긴 하겠지만 하나님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유복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잘 자란 한 청년이 이제 나이가 차게 되어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서 훈련을 잘 받고 씩씩한 군인이 되어 자대에 배치되었는데 보직이 행정병이었으므로 군대 사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네댓 명의 고참 행정병들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는데, 아뿔싸 희한(?)하게도 그들 모두가 불교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행정병이었던지라 인사 기록부를 통하여 이제 막 합류한 신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서는, 사실상 ‘불신앙의 무서운 죄악’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그러한 고약한 신고식을 받기로 작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뜩이나 처음 대하는 고참들 앞에서 차려 자세로 꼿꼿이 선 채 잔뜩 주녹들어 있는 이 가여운 신참이 들으라는 듯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을 마치 구호처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고참병은 ‘하나님을 모독한 자기의 말’을 그대로 복창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청년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해나가노라면 이와 같은 상황을 몇 번은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혹은 처신할 것이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부인하거나 …”라고 했을 때, 그렇게 부인해서는 안 되는 당위에 직면해 있는 ‘우리’란 과연 어떠한 존재들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광되고 축복된 신분이 베풀어지기 위해서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이 대가로 지불되었습니다.  그러한 희생의 터 위에서, 이제 공의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육신의 아버지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아버지가 되시사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느라 하루 하루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하나님을 “... 그러한 분으로 경배하지 않거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에 걸리게 되는 상황이란 명백히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그러한 분’이라고 했을 때, 이는 ‘권능의 하나님’이신 것과 ‘은혜의 하나님’이신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가리킨다는 것을 염두에 두십시다. 권능의 하나님이신 특징은 시대를 초월하지만, 은혜의 하나님이신 특징과 관련해서는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하시고, 구약시대에는 출애굽 사건 안에서 그러하십니다. 그런데 은혜란 어떠한 경우에도 진공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것일 수 없고, 공의와 그로 말미암은 정죄라고 하는 상대적 개념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렇게 될 때라야 만이 비로소 은혜의 진정한 가치와 능력도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게 되는 법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라고 외친 데서도 명확합니다. 

셋째, 이제 마지막으로 “… 또한 오직 그분께만 드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다른 자나 다른 것에게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림만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네가 행하고 있는 신학의 목적과 내용의 건전성을 돌아보게 하는 좀 더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전한 신학이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목적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러한 내용을 구성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에게 중심을 두는 신학은 이미 건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실로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사상과 그것의 실제적인 구현이 결여 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되지 못하고 단지 신학에 머물러 버릴 수밖에 없어서 스콜라주의(지식주의)가 되고 맙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제47신앙고백문답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입술로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되어야 하고, 그렇게 고백하는 바의 진실성에 따라 실제적인 경배를 드림으로써 영화롭게 해드려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경배와 영광을 다른 자나 다른 곳에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2022년 6월 28일(TUES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해설과 묵상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과 그로 말미암은 궁극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상상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지 말라!” 하나님의 계명의 첫 음성인 제1계명의 중심 사상입니다. 마치 자식이 부모를 떠나 사는 것이 그러하듯이, 피조물이 조물주를 저버리고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는 말로써 이러한 모습을 단호히 정죄합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2022년 6월 27일(MON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해설과 묵상

불신자들은 믿지 않겠지만, 신자들로서는 오늘날과 같은 문화와 문명의 획기적인 발전 및 경제의 풍요로움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시는 데 따른 것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로서 더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섬깁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아니 매우 모순되게도 반대라는 것이 대체적인 경향입니다. 어리석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 그 자체에 탐욕된 나머지 급기야 그 모든 것들의 공급자이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가 건네주는 반지 그 자체에만 기뻐하는 연인이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신명기 32장 15절을 읽어봅시다. 지금 혹 당신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2022년 6월 25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6문답 해설과 묵상

금주에는 “제1계명이 우리에게 명하는 것은, 하나님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로되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고 인정하며, 그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영화롭게 하라는 것입니다”라고 한 말씀에 함축되어 있는 다섯 가지 의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각기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둘째, 그렇게 살펴본 것들이 ‘나' 자신에게 끼친 실제적인 변화 또는 영향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면 무엇이며, 없다면 왜 그렇습니까? 

 

2022년 6월 24일(FRI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6문답 해설과 묵상

십계명 중의 제1계명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다섯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이 문제는 이미 제1문답에서 선언적으로 살펴본 바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한 바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들이 있겠는가에 대해 진취적으로 논의해봅시다. 

 

2022년 6월 23일(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46문답 해설과 묵상

넷째,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인정한다면 ‘그에 합당한 경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경배한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와 방법은 이렇게 저렇게 다양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총체적으로는 ‘예배 행위'에서 가장 실효적이고 충만케 될 것입니다. 물론 그냥 예배가 아니라 ‘올바른 예배'입니다. 이사야 45:20-22과 요한복음 4:24을 읽어보고, 올바른 예배를 위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