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7일 (THUR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주차 (1~2문답) 묵상

우리가 예수님께 속한 자들이 맞는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과거에 우리를 위해 행하신 두 가지 놀라운 사건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값을 완전히 치르신 것이고, 둘째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근거하여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구속사에 성실하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놀라운 일들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는 우리를 마치 눈동자와도 같이 살피시고 지키고 계십니다. 결국에는 그분만이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그 어느 것 하나 그분의 통치아래 있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좋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들만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하시고, 그에 근거하여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의로우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보심으로, 다시금 우리를 온전히 사랑하게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슬프거나 안 좋은 일들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약속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러한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필시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된 것임을 기억하라는 데 있습니다. 그토록 슬프고 상처가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게 하지도 못하고, 그리하여 우리를 영원히 멸망토록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1절과 27절로 29절, 그리고 로마서 8장 28절을 읽어보십시오.

2017년 7월 26일 (WEDN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주차 (1~2문답) 묵상

신실하신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많은 일들을 볼 때에,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의 다른 모든 필요들 역시 충분히 공급하실 것이라는 데 호리만큼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갖은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본래 죄인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종류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죄를 묵인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심판자의 자리에 계십니다. 일단 죄인 한은 반드시 벌하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질이 얼마나 나쁘든, 죄가 얼마나 많든 지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 그 자체로 결점이 없이 완전하시고, 죄를 모르시는 오직 단 한 분이셨던 까닭에, 그분의 죽음은 인간이 마땅히 겪어야 하는 심판으로서의 죽음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피는 참으로 어마어마하게 숭고한 가치를 가진 것입니다. 로마서 5장 6절로 9절을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죄인이라서 문제가 되는 또 한 가지는, 우리를 증오하는 사탄이 바로 죄인의 통치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구원하실 때에 사탄의 왕국으로부터 빼내어 당신의 빛의 왕국으로 옮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드리고 있는 사탄의 권세를 차단하십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을 읽어보십시오. 이렇듯 우리의 가장 절망적이었던 문제마저 이미 다 해결해주신 예수님이시므로, 삶의 이런저런 크고 작은 어려움들 가운데서도 언제나 우리를 돌보아주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어떻게 감사한 삶을 살아야겠습니까?

2017년 7월 25일 (TUES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주차 (1~2문답) 묵상

당신은 누구에게 속해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당신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속해 있다면, 당신 자신에게 무엇이 최선인지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 또한 당신의 몫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신변의 안전 문제도 결국 자기 자신이 보장해야만 합니다.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이나 수단 역시도 스스로 찾아내야만 합니다. 그러니, 사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만 속해 있다는 것이 이렇게나 불쾌하고 무서운 부담 그 자체라는 것에 대해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일단 우리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러한 부담은 훨씬 덜해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발적인 순종으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해 있던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내하시기까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그분께서 친히 피를 흘려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심으로 우리를 사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때 실로 필요에 합당한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으므로, 우리가 또다시 죄로 인해 멸망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분에 넘치는 크신 사랑으로써 자기 백성을 양육하시는 분의 보살핌 안에서, 사나 죽으나 우리의 몸과 영혼은 늘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3절과 고린도전서 6장 19절로 20절을 읽어보십시오.

2017년 7월 24일 (MO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주차 (1~2문답) 본문

당신은 한 번이라도 “만약에 ...?”라고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크게 잘못된다면? 만약 나의 건강이 심각한 수준으로 좋지 않을 뿐 아니라 더 나아질 가망성마저 없다면? 만약 나의 가정에 또는 부모님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다면? 기타 등등이 있겠죠.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온갖 종류의 나쁜 일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안 좋은 일이란 것들이 겹치고 또 겹쳐서 최악의 상황이 찾아왔을 때조차도, 우리가 충분히 위로 받을 수 있을만한 무언가가 있기는 한 걸까요?
시편 46편에서 저자는 “만약에 ...?”라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지진으로 땅이 뒤틀리고, 산이 흔들리면서 심지어 바다 한 가운데 빠진다면, 그러한 난리(?) 속에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극도의 상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힘이 되실 것이요, 최악의 고통 중에서도 만날 수 있는 도움이 되십니다.
현재의 어떤 어렵고 힘든 고난이나 미래의 삶에 대한 염려마저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를 위로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은 아무런 염려 없이 세상을 대면할 수 있다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즐기기란 정말 불가능합니다. 시편 46편 1절로 3절을 읽어보십시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1주차 (1~2문답) 본문

제1문답: 살든지 죽든지 간에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대답: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요(고전 6:19-20), 살아서나 죽어서나(롬 14:7-9) 몸과 영혼이 나의 신실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했습니다(고전 3:23; 딛 2:14).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위하여 자신의 보혈을 충분히 치르셨고(벧전 1:18-19; 요일 1:7-9; 2:2) 나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요 8:34-36; 히 2:14-15; 요일 3:1-11).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마 10:29-31; 눅 21:16-18) 그러한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심으로써(요 6:39; 10:27-30; 살후 3:3; 벧전 1:5), 참으로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하여 합력하게 하십니다(롬 8:28). 나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신으로써 나에게 영생을 확신시켜 주시고(롬 8:15-16; 고후 1:21-22; 5:5; 엡 1:13-14), 이제부터는 나로 하여금 전심으로 기꺼이 그리고 신속히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롬 8:1-17).

제2문답: 이 위로의 기쁨 중에서 살고 죽기 위해서 당신은 무엇을 알아야만 합니까?

대답: 세 가지인데, 첫째, 나의 죄와 비참함이 얼마나 큰가(롬 3:9-10; 요일 1:10), 둘째, 나는 나의 모든 죄와 비참함으로부터 어떻게 자유케 되는가(요 17:3; 행 4:12; 10:43), 셋째, 나는 그러한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가 등입니다(마 5:16; 롬 6:13; 엡 5:8-10; 딤후 2:15; 벧전 2:9-10).

2017년 7월 22일 (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 제107문답에 대한 오늘의 묵상

'아멘'은 지금까지 기도한 내용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리라는 소원과 확신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에서의 정의는 좀 더 깊습니다. "아멘은 '참되고 확실하다'는 의미로, 내가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참으로 갈망하는 것보다도 더 확실하게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라고 했습니다(129문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터인데, 이는 주기도문은 칼빈이 터툴리안을 인용하여 정의했듯이 '합법적인 기도(lawful prayer)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간절함을 앞세워 마구 쏟아내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주기도문의 정신과 내용에 일치시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멘.

2017년 7월 21일 (FRI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 제107문답에 대한 오늘의 묵상

예로부터 방언 또는 소위 방언 기도의 진위성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기도란 마치 신앙의 호흡과도 같다고 볼 때, 이 문제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확정 짓는 일의 사활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만일 주기도문의 정신와 사상으로써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설혹 방언과 같은 신비한 태도로서 기도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또는 반대로 주기도문의 정신과 사상으로써 기도하는 사람으로서 과연 방언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기나 하겠습니까? 실제로 역사적 개혁주의 교회의 신앙고백들 중에는 방언 기도를 인정하는 것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의 무게를 실감하십니까?

2017년 7월 20일 (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 제107문답에 대한 오늘의 묵상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에서 '영광'이라고 한 단어는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만 본연의 가치가 나타나게 되는 매우 독적점인 용어입니다. 물론 그럴지라도 이 영광은 인간 편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이것을' 인간 편에서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행위도 비로소 가능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이것을 참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시켜야 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에 있게 됩니다. 그야말로 티끌만큼이라도, 인간에게도 적용되거나 인간이 차지하게 된다면, 이 영광을 아버지께 온전히 돌려드리는 일은 실패하고야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그리고 모두 돌려드립니까?

2017년 7월 19일 (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 제107문답에 대한 오늘의 묵상

주기도문 마지막 간구에서 '권세'라고 한 단어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먼저는 영적 권능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는 죄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자신의 지체를 더 이상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아니하고, 오직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죄의 왕노릇하는 권세보다도 은혜의 왕노릇하는 권세가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이후로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모습으로서 시간 세계 구석구석에서 흑암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뭇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구원해 내고 있습니다(골 1:13-14). 다음으로 하나님 나라는 궁극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죄와 악의 세력을 심판하는 데서 권세의 극치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이 나라의 현재적 확장과 궁극적 완성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높여드리는 기도야말로 기도의 최고봉이 아니겠습니까?

2017년 7월 18일 (TUES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 제107문답에 대한 오늘의 묵상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에서 '나라'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세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아버지께 속한 나라, 즉 하나님께서 절대적 선한 군주로서 통치하시는 나라인 것이고, 어떠한 경우에도 중단되거나 단절되지 않으면, 어떠한 세력도 그리고 어떠한 식으로든 훼방을 놓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의당히 이러한 나라의 충만한 출현과 영원한 발전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도는 모름지기 이 나라의 백성으로, 이 나라가 소유한 모든 축복을 영원무궁토록 향유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사실상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라고 하신 바와 맥을 같이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