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6일(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1문답

제4계명은 "명하신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라고 함으로써 계명 그 자체를 지키지 않는 것을 엄중히 금합니다. 혹시라도 어제 주일을 범하지는 않으셨겠지요? 마치 기도가 신앙의 호흡이듯이 성도로서 주일은 지키는 것은 신앙의 생명 그 자체와도 같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신앙이 보이듯이 주일을 지킴으로써 자신에게 신앙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온갖 거리들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주일을 등한시 하게끔 미혹합니다. 하지만 정말 부득이한 일이 아니고서는 성도라면 반드시 주일을 지키면서 공예배를 드려야 하고, 함께 구원을 받은 성도들과 말씀을 높이며 교제해야 합니다. 홀로 있는 그리스도인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정말 부득이 한 일에는 어떤 경우들이 해당되겠습니까?

2019년 9월 15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1문답

[질문] 제4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제4계명이 금하는 것은 명하신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주의하게 이행하는 것이며(겔 22:26; 말 3:1), 게으르거나 그 자체로 죄악적인 일을 하거나(겔 23:38; 행 20:7, 9) 또는 세상일과 오락에 관련된 불필요한 생각과 말을 함으로써 그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사 58:13-14; 렘 17:24-27; 암 8:4-6).

제61문답은 전적으로 제4계명을 더럽히는 행위를 금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지난 번에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대변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주일에 다른 지체들과 함께 예배당에 모여 공적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없이는, 다른 기타의 것들을 신앙의 요소로서 주장하는 것은 별반 큰 의미가 없다고 한 바를 상기하면서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도는 주일에는 ‘하라’고 ’명령된 의무’를 온전히 이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행하되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특별히 ‘부주의하게 이행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수반된 데서도 명확합니다. 성도가 주일에 공적 예배를 드리고 기타 필요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교회가 제정한 도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선한 의무이자, 자신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경향은, 성도가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에 여러모로 힘들어지는 상황을 여기저기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성도는 직장 동료의 혼인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핑계로 주일의 예배의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가 하면, 혹은 건성건성 예배에 참석한 후 서둘러 예식장으로 달려가기에 바쁩니다.

예배 자체에서의 ‘부주의한 이행’ 문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시작할 경우, 그곳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이루지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물론 예배 의식 전체와 관련해서 그런 것이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말씀의 순수한 선포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 내내 마치 부흥회와 같이 천박한 인간의 종교심만이 고양된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내내 예배를 집례하는 담당자들은 물론이고 청중들 모두가 최고로 고양된 경건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주의한 이행 또는 습관적이며 형식적으로 일관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대놓고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을 각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둘째, 게으름 역시 무시 못할 원수로 작용합니다. 한 주간 직장이나 일터에서 시달리고 나면 육신이 피곤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기를 귀찮아 하면서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기에 바쁜데, 여기에 TV 같은 데서 자신이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경기나 기타 프로그램을 방영할 경우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아예 예배를 불참하기가 쉽습니다. 요즈음은 무슨 국가 자격증 시험 같은 것이 대체적으로 주일에 실시되는 까닭에,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셋째, 아예 ‘그 자체로 죄악된 일’을 자행하는 경우도 혹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필 주일을 골라서 노골적으로 죄를 짓는 게 됩니다. 자신이 마땅히 행해야 할 적극적인 의무에 게으르고, 마지 못해 억지로 하듯이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이런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특별히 주일은 그야말로 ‘쉬는 날’이기 때문에, 평소에 동경하던 죄악,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기회로 삼는 경우입니다. 가령, TV로 건전치 못한 프로그램을 시청한다거나, 순전히 오락에 불과한 것들을 즐긴다거나, 지인들과의 자유로운 대화 분위기에서 음담패설에 빠져들거나 즐기는 등의 모습입니다.

“최대의 수비는 적극적인 공격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는 게으르고 소극적인 태도에 쉽게 스며드는 법입니다. 반면,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할 거리를 찾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적합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 적극적인 신앙에는 상대적으로 죄가 틈탈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이런 생각으로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라고 하는 존재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라고 한 외침이 어찌 공연한 한 말이겠습니까? 성도라면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신은 범사에 ‘선한 노예’라는 의식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지라도 항상 행복하고 즐겁기만 할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를 위하여 스스로 고생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자원하여 순종하는 ‘자기 희생자’로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신 원리처럼,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하는 만큼 오히려 상대적으로 한없이 솟구치는 행복만을 맛보기 마련인 때문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을 드높이기 위하여 제정된 날을 도리어 자신의 죄를 즐기는 날로 변질시킨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죄된 행위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호리 만큼인들 잠식하지 않도록 각별히 깨어 있으십니다.

2019년 9월 14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개혁교회 성도라면 교회 생활에 치열해야 합니다. 이 치열성에는 함께 연합되어 있는 지체들과 공예배를 드리는 것이 주된 핵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셔서 인간을 면류관으로 세우시면서 최초의 가정 공동체 교회를 세우실 때부터 심중에 품으신 거룩한 뜻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셔서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주셨고, 일하는 재미와 보람을 주셨으며, 남녀 간에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안식일을 지킴으로 하나님께서 들어가신 안식과 그로 말미암은 행복에 참여할 수 있게 하셨는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개인의 입장에서 독립적으로 누리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서로 연합하여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경우 교회 지체들과의 친화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2019년 9월 13일(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이사야서 58:13-14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대해 당신의 '성일'이라시면서 '오락을 행치 말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오늘날 오락이란 흥겹게 노는 유흥까지도 포함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대부분의 교회들이 오후에 일찍 일정을 마치게 됨에 따라 저녁 시간 전에 귀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시간에 젊은 이들이 컴퓨터로 게임 프로그램을 즐긴다면 명백히 오락일 것입니다. TV로 연속극을 시청한다거나 노래 경연 같은 것을 즐기는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무엇이 금지되었고 무엇이 허락되었는가를 따지는 율법주의자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얻어주신 자유를 혹여 방종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되겠습니다.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가정답게 저녁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2019년 9월 12일(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자리가 사실은 대놓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리가 되는 경우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일(안식일)의 예배 의식이 본래의 의미나 취지대로 진행되지 못할 경우 즉각 그렇게 되고 맙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설교해야 하는 목사가 성경은 봉독했지만 정작 설교 내용은 세상 이야기로 일관한다거나 성도들 또한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듣듯이 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놓고 모독하는 자리가 될 것임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없는 경우가 정말 적지 않습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2019년 9월 11일(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안식일(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 중의 최고는 예배에 있다고 한 바를 계속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말씀 선포 또는 말씀 듣기입니다. 선포하는 목적과 듣는 목적은 전적으로 '순종'에 있습니다. 성도가 잘 순종할 수 있으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목사의 말씀 선포를 하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데살로니가전서 2:13을 읽어봅시다. 물론 더 앞서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설교자 편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설교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포되는 내용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말씀주의가 아닌 담화주의(이야기주의)가 팽배한 것이 작금의 모습입니다. 성도라면 능히 말씀주의와 담화주의의 차이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당신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2019년 9월 10일(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성도가 세상과 구별되는 외적 표지는 단연 주일을 지키는 데서 찾아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말만 되면 의례껏 산과 바다로 나갑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다 못해 잉여가 쌓이는 데서 생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겠지만, 이제는 일종의 생활 관행으로까지 자리잡게 됨에 따라 심지어는 빚을 내면서까지 해외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생활의 여유 또는 행복이라는 미명 아래 사실상의 사치와 방탕이 활개치고 있고, 그로 말미암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으로 말미암은 사탄의 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와 성도는 더더욱 주일 하루를 온종일 하나님께 드리는 데 힘을 쏟아야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동시에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2019년 9월 9일(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제60문답의 핵심은 주일(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초기에 교회가 출범할 즈음에는 부득불 안식일과 주일이 혼용될 수밖에 없었겠지만, 신약성경의 기록 및 보급과 함께 구약의 안식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에 대한 진리가 더더욱 명확해짐에 따라, 최종적으로 안식 후 첫 날이 '주의 날'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 주의 날에는 예배가 핵심 행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인 인간의 입장에서 창조주께 대한 경배란, 결국 어떤 형태로든지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로되, 그것의 절정은 하나님께 대한 알현 혹은 직접 뵈옵고 큰 절을 올리는 형식일 수밖에 없을진대, 이로 말미암아 지금처럼 '예배'라고 하는 일정한 체제에 따른 '의식'으로 확정되게 된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께 드릴 수 있는 경배에 대한 표현 방식들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2019년 9월 8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질문] 안식일을 어떻게 거룩히 지킬 수 있습니까? [대답] 우리는 그날 종일을 거룩하게 쉬고, 다른 날에는 해도 정당한 세상일과 오락까지도 쉬고(출 20:20; 16:25-28; 느 13:15-22; 사 58:13-14), 또한 그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예배드리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출 20:8; 레 23:3; 시 92:1-3; 눅 4:16; 행 20:7). 다만 불가피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행할 수 있습니다(마 12:1-13).

지난 56, 57, 58, 59문답에서는, 옛적 사람들이 안식일을 주의 날(Lord’s day)로 대신한 것은 안식일의 모형이 우리 주님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our Lord)에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했기 때문으로, 즉, 그림자였던 의식을 고수하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제 칠일에 대한 지정은 폐지되었지만, 이레 가운데 하루를 정하는 것은 남아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허접한 거짓 선지자들(the false prophets)의 주장이라면서 단호히 배척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주장은, 단순히 유대인들을 반대하기 위하여 날만 변경했을 뿐이고 여전히 그 날을 거룩하다고 생각하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지키는 미신적인 안식일 준수 행위는 여전히 이사야가 했던 책망을 받아 마땅하다고 일갈했습니다(사 1:13-15; 58:13).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이 문제 앞에서 칼빈은 역시 말하기를 “유대인들에게는 전형적으로(typically) 전달되었던 진리이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림자 없이 진리 그 자체로 제시되니,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를 고집하지 말고,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미신이 없는 것이니,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것도 상관없다”(의역)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정신은 일단 그 날 하루를 종일 쉰다는 토대로부터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소신앙고백문답은 “불가피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명백히 해놓았습니다.

먼저, 하루를 쉰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이는 한 주간 동안 전개되어 나온 일체의 세상살이를 위한 일들을 실제로 중지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 앞에서 현대인들은 산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가령, 국가 실시하는 여러 가지 자격증 관련 시험들이 대체적으로 주일에 시행됩니다. 인생사에서 몇 안 되는 중대사일 수 있는 혼인 예식들도 주로 이 날에 집중되어 있어서, 불가불 다양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상황에서 그들의 초청을 외면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기타 사회 생활과 경제 활동의 다양성은 주일에도 우리를 일터로부터 쉽게 돌아서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 하나하나에 양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서의 안식일 준수란 먼 옛날의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 뻔합니다.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성도가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의 모든 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요 그러한 가치에 실제로 성립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설혹 여러 가지 소소한 신앙적 덕목들에 많은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정작 주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는 이 중요한 실질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의 가치는 잠시 잠깐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내 허공에서 사라져버리는 연기와도 같습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서 앞의 세 계명이 부정 명령 형태를 취하는 것과는 달리 마지막 네 번째에 위치한 안식일 준수 명령은 긍정 명령 또는 적극적인 명령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바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쉰다는 것은 다른 소중한 일을 적극적으로 달성하기 위함 때문입니다.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려는 명백한 목적 때문에 그처럼 쉬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성도들은 삼삼오오 예배당으로 모여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드리는 예배에서 한 몸으로 연합합니다. 이 예배 공동체는 피차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한 데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결원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불구의 예배’가 되고 만다는 것은 뻔한 상식입니다. 성도들은 모름지기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서로 지체를 이루어 굳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렇게 연합되어 있는 사실은 예배 의식을 통해서 그 모습을 가장 충만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 날에 “주께서 성신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줍니다. 성신님의 자유로운 역사는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데서 충만할 수 있는 법이므로, 일상상의 성경 읽기는 물론이고, 예배 의식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설교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자신의 뇌리에서 깨달음이 되어 전인을 지배하려 할 때에, 단순히 종교적 감동으로 치부치 아니하고, 성신님의 주도적인 일하심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라면, 그는 구속사의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주일에 성도들 각인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대역하고, 천상의 일들을 경건하게 명상하면서, 자신의 신앙의 모태인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실로 성도는 경건이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교회의 각종 모임에 부지런히 출석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증진시키게 해주는 외부의 수단들(those external aids)을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19년 9월 7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9문답

구약성경에는 안식일에 대한 언급이 대단히 많습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는 단 9번만 등장합니다. 그에 더하여 안식일을 지켰다는 말은 아예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주일을 지킨 것입니다. 주의 날로서 보낸 것입니다. 성도는 주의 날의 공적 예배를 통해서 역사의 종말에 완성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앞당겨 예비적으로 맛봅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의 임재는 사실이요 실제입니다. 약속해 주신 말씀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내포된 신학적 의미가 이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네 성도로서는 예배자가 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요, 받은 구원을 더더욱 확증하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토요일입니다. 아무쪼록 내일의 예배를 사모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혹여 예배 불참을 부추기려고 이렇게 저렇게 속삭이며 유혹하는 사탄의 꾀임이 있다면 단호히 대항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