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23일(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3문답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모습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이 아니라 쓰는 데 있어서도 극도의 공경심을 표했다고 합니다. 오늘날 70인 역(LXX)이라고 알려져 있는 성경(구약 히브리어를 당시 보편의 언어인 헬라어로 번역)을 번역할 때에(기원전 3세기), 번역자들은 여호와나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경우 지금까지 사용하던 붓을 버리고 새로운 붓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에서는 그러한 방식도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신 데 대한 순종의 한 방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 자그마한 액자와 같은 장식품 같은 것을 만들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겨 넣는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2019년 7월 22일(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3문답

소문답 제53문부터 56문답까지는 제3계명에 대한 신앙고백을 다룹니다. 핵심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존중에 관한 것입니다. 사실 이 주제는 오늘날 우리에게서 별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거나 사용하는 정도에 따라 그에 대한 친근감 혹은 존경심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동양 문화에서는 상대방이 자기보다 높을 경우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을 예의로 여깁니다. 하지만 서양 문화에서는 친근감을 표현하기 위하여 상배방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럴지라도 자기보다 아주 높다거나, 실제로 상대방을 높이려 할 경우 이름만을 부르지는 않습니다. 결국 이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겠습니다. 제3계명을 조용히 암송해 보십시다.

2019년 7월 21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3문답

[질문] 제3계명이 무엇입니까?  [대답]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헛)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헛(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입니다(출 20:7; 신 5:11).
제53문답은 십계명의 세 번째 항목을 다룹니다. 이 셋째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의 위엄이 우리에게서 거룩히 받들어지기를 원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무시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성도라면 모름지기 이유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오용하거나 남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대로 범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경건하게 경외하도록 열성과 주의를 다해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신비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할 때에 항상 경외심을 품어야 하고, 그에 따라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신앙적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칼빈은 특별히 세 가지 점을 준수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제56문답 참조). 첫째,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생각과 입술의 표현은 항상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나타내야 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의 위엄에 부합해야 하고, 하나님의 엄위를 찬양하는 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존귀한 신비들을 야심이나 탐욕 또는 대화 중의 재미를 위하여 사용하는 등등의 경솔하고, 패악하고,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인간들이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그런 데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반대로 범사에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와 정의와 인애를 찬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길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망령되이 일컫는다”고 한 바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신학자들마다 적절한 해석을 내어놓고 있는데, 이들의 여러 가지 가능성 있는 해석들을 종합해본다면 한 마디로 말해서 “헛되이 일컫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의미 없이 부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당사자의 이름을 의미 없이 부르는 것은 이 세상의 관습상으로도 본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일임이 명백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일까 보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또는 헛되이 부르는 죄는 뜻밖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내건 모임에서 자행되기 쉽습니다. 그야말로 역설의 상황입니다. 가령, 찬송을 부를 때 하나님의 이름이나 하나님의 신비를 가리키는 내용에 대해, 어떠한 경외심이나 감동도 없이 말 그대로 그냥 노래로 취급해 버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는 기도 시간에, 하나님의 이름을 습관적으로 부르는가 하면, 무엇인가 필요하다면서 구하는 바로 그 시간조차도 사실은 아무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대한 애절한 마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다만 자기 자신의 종교적 감정만 고양된 것입니다. 또는 교회에서 회의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회의를 내내 주관해주십사 하는 기도로써 시작했으면서도, 그러한 간구에 걸맞지 않은 태도로 일관하고, 그 결과 전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배치되는 안건을 의결하는 경우는 더더욱 심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경우가 적지 않지만, 그런 정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일종의 장식(?)처럼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태도, 즉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데 대해 명백히 ‘죄’로 정죄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실 우리는 무의식 중에 이 셋째 계명과 관련하여 참으로 많은 죄를 짓는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문제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이 문제 앞에서 주의에 주의를 기울이고 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령,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불신자들은 “옳다, 잘 걸렸다!” 하는 심보로 대놓고 하나님을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하는 식이었는데, 물론 이는 순전히 그네들 식의 잘못된 신관에 의한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 역시도 잘못된 신관을 가진 것이겠습니다. 여기서 ‘잘못된 신관’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구원론 자체부터가 잘못되기 때문에, 즉, 십계명이 선포될 때에 제시된 전제, 곧 머리말에서 선언된 ‘구속사’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거나 왜곡되었으므로, 셋째 계명을 거스르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도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이름을 부르거나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달력이나 액자 같은 것을 버젓이 걸어 놓는데, 정확히 말해서 이는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장식품으로 이용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실제로 망령되게, 즉 헛되게 사용하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조용히 자신의 마음을 들여도 보십시다. 과연 나는 매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가? 그렇다는 데 대한 증거가 있는가?

2019년 7월 20일(SATUR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2문답

지금까지 49, 50, 51, 52문답이라고 하는 범선을 타고 우리가 항해한 바다는 '예배'였습니다. 예배의 바다를 항해하면서 많은 것들을 만나고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더더욱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이 예배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당신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가 일어난 것은 무엇입니까? 변화가 일어나기는 했습니까?

2019년 7월 19일(FRI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2문답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주권자시요, 소유주이십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칭호는 이외에도 많이 있는 것이 당연하고, 특별히 창조주시라는 용어는 그러한 많은 칭호들을 대표합니다. 하지만 이 두 호칭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라고 하는 실질을 이끌어내기에 가장 적합합니다. 당신은 주권자시라는 칭호와 소유주시라는 칭호의 보다 확장적인 의미를 이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확장된 의미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같이 해 보십시다.

2019년 7월 18일(THUR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2문답

시편 100편은 다섯절밖에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한 소유자가 되신다는 사실과 그러한 분께 대한 우리의 태도를 아주 훌륭하게 선포해 줍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1절).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2절).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절).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찌어다(4절).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5절)."  이 시편의 각 구절의 사상을 압축해볼 경우 핵심 주제는 무엇입니까?

2019년 7월 17일(WEDN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2문답

'예배'라는 주제가 가르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주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소유주시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유하시는 것 간에는 천양지차, 곧 하늘과 땅 사이와 같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얻으려는 필요를 위해서이지만, 하나님은 소유하신 것을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사실이 그러할지라도 이 둘 간의 천양지차를 하나로 합치시켜 주는 신비한 주제가 있는데, 곧 '구원'입니다. 실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하나되듯이 그처럼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을 견고히 유지시켜주는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 단연 으뜸은 '예배'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확대시켜 설명해 보시겠습니까?

2019년 7월 16일(TUES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2문답

시편 96:10은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찌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찌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통치하심이 '만민에 대한 공평한 판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십니까? 공평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야말로 진정한 주권자이시요 천하의 통치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해 주권자라는 칭호를 드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은 궁극의 그 날에 '상선벌악'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데 대한 굳센 신뢰입니다. 실로 부패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굳게 서 나가고 있는 것은, 주권자께서 자신의 백성이 단아하고 고요한 중에 안정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주권자의 통치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섭리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다 하는 말과 연결시킬 수 있겠습니까?

2019년 7월 15일(MO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2문답

소신앙고백문답에서 십계명에 대한 제2계명의 주제는 '예배'인데 49, 50, 51문답에 이어 제52문답도 이 주제를 계속 이어갑니다. 이 예배라고 하는 주제가 상기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주권자시라는 데 따른 것입니다. 주권자라는 표현은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존엄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이러한 지위에 계시는 이유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의당히 창조주를 경배해야 합니다. 시편 95:6을 읽어봅시다. 이 단계에서 참으로 감사한 것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지막지하게 지배하시는 독재자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친근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케 할만하지 않습니까?

2019년 7월 14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2문답

[질문] 제2계명을 지킬 이유로 이어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제2계명을 지킬 이유로 이어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권자이시고(시 95:2-3, 6-7; 96:9-10) 우리의 소유주이시며(출 19:5; 시 45:11; 100:3; 사 54:5), 친히 정하신 대로 경배받기를 열망하신다는 것입니다(출 34:14; 고전 10:22).

제2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신앙의 건강성 유지에 상당한 도움이 됩니다.  일부 성도들 중에서는 십계명을 단순히 말 그대로 ‘계명’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로 말미암아 무거운 짐 또는 억지로 마지 못해서 지는 짐과도 같이 되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십계명이 각 요소들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도 하는데, 여기 제2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와 같은 내용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교통 법규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듯이, 우리네 신앙생활도 십계명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요구됩니다.

제2명은 혹자가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신개념을 갖는 것과 그로 말미암아 그렇게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행위를 금하신 것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신앙적 행동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되, 대체적으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 자기 방식으로 하나의 상을 그려내 보려는 그 자체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데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이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종교의 씨앗이 있어서 부득불 신앙심을 발휘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행 17:24-31), 그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 보여주신 바에 대한 지식(계시)이 부족하거나 정확하지 못하면, 자기의 심정에 좋고 편한 대로 신앙 형태를 생각하고 그에 따른 행동을 하기 마련이므로,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우상숭배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때에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일종의 형상을 만드는 행위이고, 그것을 하나님인양 생각하게 되는데 따라, 가장 순결하시고 본질상으로도 영이신 하나님을 그야말로 썩어질 금수나 심지어는 버러지 같은 형상까지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릇된 신앙심과 그릇된 신지식이 외적인 형태를 취하려 할 때에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제2계명을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를 부려먹거나 우리로부터 노동력을 짜내는 그런 냉혹한 주권자이신 것이 아니라, 가장 참되고 가장 복되고 가장 합당한 것으로서, 당신의 백성을 양육하시는 그런 차원에서의 주권자이십니다. 이 사실은 십계명이 선포될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속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천명하신 때부터 전제되었습니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신 자비로우신 창조주로서의 주권자이십니다.

다음으로, 앞의 이야기가 다시금 강조되는 형식인데, 곧 하나님을 ’우리의 소유자’이시라고 하신 점입니다. 이 사실은 상당히 중요한데, 본디 우리 자신에 대한 소유권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장된 의미로 확정되었습니다. 즉 일상적 주종 관계로서의 소유가 아니라, 구원론적인 연합으로서의 일치를 위한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1555년 8월 8일자로 칼빈이 피터 마터에게 한 다음과 같은 편지의 내용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도록 자라갑니다. 그분은 자신의 영을 우리와 공유하시고, 이로써 성령의 감춰진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것이 되십니다. 신자는 그들이 부름 받는 시점부터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갖게 됩니다. 이 교통 속에서 날마다 자라게 되는데, 이러한 성장은 그들 안에서 커가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비례합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이러한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소유이자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었고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자이므로, 내적인 경외심 외에 외부적으로 어떠한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경배 받는 방식에 대해 ‘자신이 친히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모에게 효도할 때에도 자기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부모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올바르듯이, 그런 차원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개다가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가장 좋은 예배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가르침 받은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필요하고, 나아가 이것은 거룩한 의무이기까지 합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자신의 방식을 앞세우는 것은, 독선이자 이기주의일 뿐이지, 결코 사랑과 섬김이 될 수 없습니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하나님께서 규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한정하신 바대로 드리는 것”일 때 성립된다고 한 개혁교회의 예배 원리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에 단연 첫 번째는 하나님은 형상이나 형체가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