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0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033문답 해설과 묵상

[제33문] 의롭다 하심이 무엇입니까?  [대답] 의롭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고(롬 3:24), 이로써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시 130:4; 롬 4:6-8; 고후 5:19) 우리를 자기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 주십니다(고후 5:21).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일이고(창 15:6; 롬 4:6, 11; 5:19),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행 10:43; 갈 2:16; 빌 3:9).

제33문답은 ‘칭의’에 관한 주제입니다. 칼빈은 이 칭의 주제를 시작할 때에 다음과 같은 논지를 폈습니다. “지극히 관대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오직 믿음으로써 그를 붙잡고 소유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중의 은혜를 받게 된다. 첫째, 칭의인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 화해됨으로써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심판자가 되지 아니하시고 반대로 아주 너그러우신 아버지가 되신다. 둘째, 중생인데, 그리스도의 영(성신)에 의해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열망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칼빈은 칭의를 중생과 연결시켰다는 점이고, 또한 중생을 성화와도 연결시킨 점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서정을 각 단계별로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소신앙고백문답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이해함에 있어서 조직신학 체계처럼 각 단계를 세밀히 이해하는 것은 나름의 유익이 있습니다.  실제로 칼빈도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루었습니다. 대신 주의해야 할 것은 적용에 있어서는 구원의 각 단계를 철두철미 순서적으로 대입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한 자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효력 있는 부르심’과 이곳의 ‘칭의’, 그리고 다음에 다루게 될 ‘양자 입양’ 및 ‘성화’ 등은 각 단계가 세밀하게 순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대체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난다거나 그에 따라 각 단계가 다른 단계와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적용과 경험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서, 앞에서처럼 칼빈은 칭의와 중생과 성화를 하나의 개념으로서 다루었던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을 전제하고, 칭의는 기독교에서 신앙이 가능하도록 지탱해 주는 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칭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알게 해줍니다. 칭의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처럼 칭의는 우리의 구원을 세우는 토대가 됩니다. 그에 따라 칭의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 곧 “하나님의 목전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to be justified in the sight of God)”는 표현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은 불법을 미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인 동안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은혜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인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혹여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진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의롭다함을 받는데,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자면,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의 용서를 베푸사 의인으로 받아주시는 것이로되,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의의 전가(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를 통하여 그렇게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다시 이 칭의를 용어가 아닌 내용상으로 살펴본다면 이렇습니다. 칭의는 용납(acceptance)이고(엡 1:5-6; 롬 3:24),  의의 전가(the imputation of righteousness)이고(롬 4:6-7),  죄책의 반대(opposed to judicial guilt) 개념이고(시 32:1-2),  하나님과 화해됨인(to be reconciliation) 것입니다(고후 5:18-20). 결론적으로 칭의는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의 어떤 것과도 별개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되는 것입니다(롬 5:19).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칭의와 관련하여 우리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비할 데 없는 선, 곧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으로서의 ‘신비로운 연합(the mystical union)을 전제하는 문제입니다. 즉, 우리는 멀리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과 하나가 되는 방식으로 그의 의를 받는데, 동시에 이것은 영원한 영적인 유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유대를 통하여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심으로 그와 함께 의의 교제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항상, 그리고 한결 같이 ‘믿음에 의한 의’를 가르칠 때에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게 합니다.

끝으로, 문답 끝부분에서 “...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라고 한 부분을 정확하게 확인해 두겠습니다. 이상 살펴본 내용을 고려한다면, 항간에 구원파 같은 이단이 또는 일부 선교회들에서까지 잘못 가르치고 사용하는 방식과도 같은 ‘믿음으로’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즉 지난 번에도 제32문답 말미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신앙주의’ 또는 ‘간단 신앙주의’는 개혁교회의 칭의론이 내포하고 있는 깊고 오묘하고 숭고한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가히 이단적일 수 있을 정도로 잘못된 칭의론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주의는 현대 교회 안에도 광범히하게 퍼져 있으므로, 차제에 이 문제를 정확하게 깨닫고 잘 정립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Posted in 오늘의 신앙고백묵상.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