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06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44주차(113-115문답)

[제113문] 제10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로서는 아주 작은 욕망이나 생각을 최소한이라도 마음에 품지 않는 것이고, 항상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모든 죄를 미워하고 모든 의를 좋아하는 것입니다(시 19:4; 139:23-24; 롬 7:7).

혹시 신앙고백문답의 십계명에 관한 설명이 상당히 색다른 것처럼 느껴집니까? 신앙고백문답의 설명이 십계명에서 거론한 문제들을 직접 거론하지 않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까? 이는 제113문답은 이웃의 집이나 아내나 노예들이나 ‘무엇이든지 이웃에 속한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율법의 계명들을 향해서도 우리의 마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겠는가를 가르치려는 때문입니다. 즉 “탐내지 말지니라”라고 한 계명은 직설적으로 우리의 마음, 내면의 욕망을 겨냥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모든 것은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먼저 마음으로부터 솟아 올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부터 쭉 이어져 나온 아홉 가지의 계명을 읽으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모든 확장된 순종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관심 가지시는 것은 실제적인 행위라는 데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이제 제113문답은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과도 같이(롬 7:7), 십계명은 모든 계명들에 있어서 영적이며 마음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 진리를 다시금 강조하셨는데(마 5:20-48), 십계명은 마음이 정결해야 할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과 우리 이웃에 대한 실천적인 사랑을 요구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은 자신들의 외형적인 순종을 자랑하였습니다. 따라서 마음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분개했습니다. 자연인은 비롯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다른 율법들을 지키는데 관심 갖는다 할지라도, 십계명을 필두로 한 자신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정욕들을 무시하려 합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십계명은 거짓 종교와 우리의 이웃 및 이웃의 집, 그리고 이웃의 재산을 해치는 외적인 여러 종류의 죄들의 원천인 마음의 정욕을 정죄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라고 한 말씀이 공연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 14절은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죄의 첫 출발은 마음의 욕망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그리하여 다음 단계의 외형적인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십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영적 생명으로서 살 것과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영적으로 만족하기를 명령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을 기꺼이 주고 싶어 하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취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행여라도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는 온 마음으로 모든 죄를 미워하고, 그리고 온 마음으로 모든 의로움을 즐겨야 합니다.

그러면 이 계명은 우리에게 모든 상황 하에서의 욕망을 전체적으로 금지합니까? 욕망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갈망한다는 의미로 읽을 경우라면 대답은 아니요 입니다. 우리로서는 계속 갈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재산을 상대로 할 경우 우리의 갈망은 합법적이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상대방이 자진하여 우리에게 팔고자 하는 만큼, 우리도 자진하여 합당한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령, 이웃의 아내를 갈망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죄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제7계명을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에서 ‘욕망’이라는 단어는 악, 곧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불법적인 갈망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와 그리고 주님 앞에서 부당하게 탐내지 않는 기독교인으로서 만족해야 하는 생활 원리를 간단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항상 만족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은 유일하게 마음대로 행동하는 분이시오 통치자시로되, 항상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주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 삶의 주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심에 있어서 충분히 지혜로우시고 무한히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사랑은 완벽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영적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을 보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고 사실상 불신앙입니다. 사실 원칙상으로 보자면 우리는 그 무엇도 받을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나름대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심으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인한 만족은 우리로 하여금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고, 감사와 찬양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항상 불만에 차 있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고,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아차 순간에 하나님의 계명을 손쉽게 범합니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소유했다는 것은, 무엇 하나 더 필요한 것이 없을 만큼 완전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6, 8)라고 하고, 또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3:5)라고 선포합니다.

[제114문]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이라면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대답] 아닙니다.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 세상에 살 동안에는 이러한 순종을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전 7:20; 롬 7:14-15; 고전 13:9; 요일 1:8, 10). 하지만 그들은 굳은 결심으로 하나님의 일부 계명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에 따라 살기 시작합니다(시 1:2; 119:5-6, 106; 롬 7:22; 요일 2:3).

제114문답과 다음 제115문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관한 두 가지 결론을 갖게 됩니다. 문답 114번은 율법에 대한 순종 요구에 직면해 있는 기독교인의 본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은 어떤 단계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7절은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는 개심하거나 중생한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들을 지킴에 있어서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마음이란 상대방을 ‘완전히 사랑하고’ 죄를 ‘완전히 미워하는’ 그러한 ‘완벽한 순종’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문답 4번과 5번 그리고 113번을 보십시오). 하지만 중생한 하나님의 성도는 여전히 ‘옛 사람’인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은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제60문답에서 분명히 말한 것과 같이 여전히 항상 모든 악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설혹 거룩하다고 알려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완전한 순종과 관련해서는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도들은 물론이고 지금 성화를 부단히 추구하는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성을 가지고 있어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노아의 술 취함, 욥이 자신의 출생을 저주한 것(욥 3:1-2), 다윗의 간음과 살인에 대한 행동(삼하 11장),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부끄러운 부인(눅 22:54-62), 그리고 죄의 내재에 대한 바울의 고백(롬 7:21) 기타 등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비록 기독교인이 마음에 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계속해서 여러 가지 종류의 죄를 범한다 할지라도(요일 1:8),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성도라고 불러주시고, 결코 죄인으로 여기지도 않으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함께 하는 거듭난 사람은 신실함과 완전한 순종을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순종에 대한 다음의 사실에 주의하십시다.

첫째, 진지한 목적입니다. 거룩한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하고자 하는 깊고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외형적인 의를 보이는 것으로 만족하는 바리새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말대로 참 신자는 마음으로 깊게 하나님을 바라는 영혼의 고통이라는 의에 주려 있습니다(시 42:1).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했습니다(빌 3:14). 달리는 경주자의 마음에는 오직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한 가지 생각만이 팽배해 있듯이, 참 기독교인은 그의 축복의 근원이신 구세주께 범사에 순종하기 위하여 모든 것들을 옆으로 제쳐 놓습니다.

둘째, 온전한 순종입니다. 참 신자는 하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골라 선택하거나, 또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들만을 선별적으로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예외 없이 모두 지키는 것입니다. 신실한 성도라면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지키고 싶어 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합니다. 모름지기 성도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사로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성향에 따라 자신의 말씀이 선별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기독교인의 순종은, 비록 그것이 완벽한 순종이 아닐지라도, 전체에 대한 순종을 필연적으로 포함합니다.

셋째, 하지만 완전주의자인 것은 아닙니다. 이 문답을 다루는 김에 거짓 가르침인 ‘완벽주의’ 혹은 ‘완전 성결’ 혹은 오늘날 기독교인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은혜의 두 번째 사역’ 같은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종교개혁 당시에는 초기 재침례교파와 그리고 후에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레에 의해 가르쳐졌습니다. 오순절 교회들 역시 ‘완벽주의’를 가르칩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 입증을 위하여 마태복음 5장 8절, 빌립보서 3장 15절, 요한일서 3장 6절과 9절 그리고 5장 18절 등을 사용함으로써 성도의 영혼은 완벽하게 성화되고 죄짓는 일을 끝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한 연합 복음주의 형제 교회의 목사가 편지로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은 신성한 은혜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웨슬레인의 거룩 체험장으로 인도하시고 난 3년 후 ... 나는 1949년 8월 6일에 정결한 마음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 갑자기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 위에 부으셨습니다. 밀려오고 또 밀려와 내 속으로 머리로부터 발까지 들어갔습니다. 나의 눈은 순식간에 눈물로 가득했습니다.” 이와 같은 유의 간증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합니까?

첫째, 기독교인들이 가끔 경험하는 ‘죄 씻음’, 그리고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완전하게 제거된 ‘감정적인 경험’ 같은 것들은 사실 객관적으로 증명된 것이 아닙니다.

둘째, 성경은 대부분의 거룩한 사람들조차도 여전히 죄로서의 옛 사람에 사로잡혀 있다고 확실하게 가르칩니다.

셋째, 요한일서 1장 8절에 의하면, 사도 자신을 포함하여 죄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매일의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매일의 용서를 위해 기도할 것을 가르칩니다(마 6:11-12). 완벽주의자들은 죄를 올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들은 탐욕과 영적 교만에 대하여 얕보는 성향을 지적하는 십계명을 잊은 것입니다.

넷째, ‘완벽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성구들은 사실 완전하게 죄 없음을 증명하는 구절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성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완전과 그리고 우리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우리의 몸과 영혼의 완전한 성화를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과 5장 18절은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습관적으로 행하지 않고 그것 안에 거하기를 즐겨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즉 그가 아예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솔직한 성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리고 날마다 좀 더 순종하고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자신의 거룩한 상태에 만족하여 머무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의에 대한 그의 유일한 변명은 자신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의 변함없는 슬픔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하는 것입니다.

[제115문] 이 세상에서는 십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엄격한 십계명 설교를 요구하십니까? [대답] 첫째, 평생에 걸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을 더욱 알게 되고(시 32:5; 롬 3:20; 요일 1:9),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죄와 의로움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마 5:6; 롬 7:24-25). 둘째,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목적지인 완전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더 변화되기를 끊임없이 노력하고 하나님께 성신의 은혜를 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고전 9:24; 빌 3:12-14; 요일 3:2-3). 

제92문답부터 시작한 하나님의 계명의 결론인 이 제115문답은 기독교인의 경험에서 율법의 두 가지 측면의 기능에 대해 말합니다. 믿음의 자녀들이 앞서 유죄를 선고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바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율법은 계속해서 그렇게 정죄 받은 죄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갈 3:24).

죄인을 위해 진실인 것은 성도를 위해 진실인 것과 같습니다. 율법은 항상 우리의 죄에 대하여 가르치고, 그리고 진정한 용서를 위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계속 인도합니다. 율법의 첫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기에 얼마나 부족한가를 우리에게 부단히 깨우쳐 주려고 하나님의 거룩한 요구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롬 3:23).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구원의 수단으로 삼게 하시려고 율법을 내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더럽고, 오염되고, 그리고 죄 많고, 그리고 매일 영적인 씻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약 1:23). 그러므로 씻음은 율법(거울)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그리고 그분의 성신으로부터 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딤전 1:8)고 말합니다.

첫째, 율법의 첫 번째 용도를 정의해 보겠습니다. 율법의 첫 번째 용도는 우리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에서 빈번히 나타나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묵상할 때에, 우리의 잘못 행하는 무능력만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 자의적으로 실패하는 태만의 죄까지도 발견하게 해줍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둘째, 율법의 두 번째 용도에 대해서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불신자 아닌 믿는 자의 삶 속에서의 율법의 두 번째 용도는 매우 긍정적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완전하길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독교인의 목표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실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구속하신 목적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롬 8:29)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바울과 함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도 같은 수준으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생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여하튼 간에 이 생을 살아갈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합니다. 신앙고백문답은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제공하는데, 그것은 열심히 하나님의 성신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살게 해주십니다. 오직 성신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소망하고 힘입을 때라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 수 있습니다(롬 8:3).

정리하자면, 우리는 기독교인의 경험 속에서 율법의 두 가지 용도를 봅니다. 부정적으로는,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주고, 완전치 못한 상태임을 보게 해줍니다. 긍정적으로는, 율법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 곧 주님께서 거룩하신 것과도 같이 죄 없는 거룩함, 하나님의 무한한 의의 완전한 목표를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벧전 1:15-16).

하나님의 율법을 기억하는 것은 계속 필요한 일입니다. 율법은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져야 하고, 회중 속에서 지속적으로 읽혀져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항상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와 엄중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Posted in 오늘의 신앙고백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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