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9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40주차(105-107문답)

[제105문] 제6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우리가 이웃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들을 미워하거나 해치거나 죽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창 9:6; 마 5:21-22; 26:52). 우리는 생각이나 말이나 몸짓으로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그리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을 시켜서 해서도 안 되며, 오히려 모든 복수심을 버려야 합니다(잠 25:21-22; 마 18:35; 롬 12:19; 엡 4:26).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해쳐서도 안 되고 부주의하게 위험에 빠뜨려서도 안 됩니다(마 4:7; 골 2:23). 그러므로 살인을 막기 위해서 국가는 또한 칼을 가지고 있습니다(창 9:6; 출 21:14; 롬 13:4).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의 십계명 제6번째 계명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길 것을 요구합니다. 꽤 많은 단어들로써 단순히 살인을 금하고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미가 상당히 확대됩니다. 이 계명은 우리의 이웃을 위하여 사랑을 베풀고, 여하튼 간에 ‘최대한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노력하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라도 좋은 것을 베풀라’고 요구합니다(제107문답).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제92문답), 하나님의 계명은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양면의 적용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한 계명들은 확실히 악한 행동을 직접 금지할 뿐만 아니라, 반대로 적극적인 태도와 행동도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께 순종으로 응답하는 측면입니다.

제105문답은 6번째 계명이 금하는 핵심 사상인 살인 금지를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살인의 원인 혹은 근원이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제105문답에서 살인 금지와 관하여 세 가지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이 계명은, 일부 사람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짐승을 죽이는 것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복수를 금하시는데, 혹은 다른 어떤 경우이든 간에 우리의 이웃에 대해 해로운 생각을 갖는 것을 금하십니다. 여기에는 타인을 향해 악의적인 태도로 행하는 말과 몸짓(움직임)도 포함됩니다. 그러한 중에 가장 나쁜 것은, 실제로 스스로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따라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는 행동입니다. 틀림없이 죽을 수밖에 없도록, 최전선 전투에 배치함으로써 헷 사람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던 다윗의 죄를 들 수 있습니다(삼하 11:14-17, 26-27). ‘복수의 심정’을 품는 것은 살인으로 나아가는 가장 일반적인 동기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는 가운데, 우리에게 부당한 상처를 준 사람에게 원한을 품어 기어코 그 사람을 다치게 하고 싶어하는 강력하고 교만한 욕망인 ‘보복심’을 능히 ‘죽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이웃의 생명은 항상 신성하게 간주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도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창 9:6).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의 생명까지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엄격히 금지하십니다. 그러면, 고의적인 자기 살인의 형태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자살 죄’가 있습니다. 사울 왕, 아히도벨, 그리고 유다 등이 실례입니다. 그러면 신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죄를 범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자살의 좀 더 작은 형태가 있는데, 총을 무모하게 취급한다거나, 순식 간에 위험 속으로 빠트릴 수 있음을 무릅쓰고 엄청난 속도를 내야 하는 카 레이스, 서커스와도 같은 아슬아슬한 형태의 연기들, 그리고 다르게는 위험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가끔 자신의 근무와 관련하여 위험이 포함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이 계명은 우리의 육체적 건강에 주의하지 않는 그런 정도의 무관심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그럴지라도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을 먹고, 적절히 휴식하고, 운동하고, 몸을 해치는 술과 담배를 악용하지 않고, 그리고 불법적인 마약 등등을 사용하지 않는 기타 등등은 필요한 것입니다(요삼 2).

셋째, 사람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살인할 수 있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살인자를 위하여 사형이라는 특별한 징계를 명하였습니다. 정부가 ‘사형 제도’를 제정할 경우, 이는 살인죄를 저지를 자는 죽음의 형벌에 놓여져야 한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이 의무는 창세기 9:5-6에서 확실하게 선포되었습니다. 따라서 신약에서도 로마서 13:4에서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사형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폐지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살인을 그토록 엄하게 금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앞에서도 설명하였듯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공격 행위와도 같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과 방불합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인간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이 그 생명을 도로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증오할 죄입니다.

[제106문] 그런데 제6계명은 살인에 대해서만 거론하는 것입니까? [대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을 금하심으로써 살인의 뿌리가 되는 시기, 증오, 분노, 복수심 등을 미워하시며(시 37:8; 잠 14:30; 롬 1:29; 갈 5:19-21; 약 1:20; 요일 2:9-11), 이 모든 것들을 살인으로 여긴다고 가르치십니다(요일 3:15).

매 년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죽습니다. 살인의 통계는 꾸준히 증가하는데, 인구가 늘어나는 것보다 빠릅니다. 1967년부터 1977년까지 미국에서는 살인자에 대한 사형집행이 오랜 동안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전 1930년에는 약 130번의 사형집행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미국의 대법원에서는 사형선고를 실제적으로 폐지했었습니다.

첫째, 살인의 뿌리는 미움입니다. 살인의 끔직한 범죄 행위 배후에는 진정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총의 배후에는, 칼의 배후에는, 독약 등등 배후에 있는 사실상의 살인 무기는 사람의 행동이며, 그와 같은 행동의 배후에는 욕망과 살인하려는 의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죽이고자 하는 갈망의 배후에는 시기, 미움, 증오, 복수에 대한 욕망, 기타 다른 동기들이 있습니다. 종종 강도나 기타 다른 범죄들로 인해 죽은 희생자의 사체는 공격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관되기도 합니다. 살인 죄를 다루는 재판에서, 법정은 항상 그것의 동기를 찾습니다. 왜 피고인이 피해자를 그렇게 죽여야만 했는지 밝히려는 때문입니다.

성경은 미움은 최종적으로는 살인에까지도 이르는 기본적인 동기라고 선포합니다. 인간은 모두 마음에 이러한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실상 잠재적인 살인자들이고, 그렇게 ‘위험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이웃을 미워할 경우, 그는 사실상 ‘영적 살인’을 범한 살인자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미련한 놈(미워하는 말)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도 같은 사상을 가르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제6계명에 대한 이와 같은 영적인 해석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살인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는 생활 전체에서 제6계명을 범하고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과 관계되시고, 이때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심한 증오와 살인적 동기를 보십니다. 우리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범죄들보다는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영적이고 숨겨진 살인이 계속적으로 범해지는 현상들입니다.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도다”(롬 3:15-16)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사실입니다.

둘째, 미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항상 잘못입니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혼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악은 마땅히 미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악을 미워하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부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을 미워하는 분이시고, 게다가 구약백성 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시켜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기도 했습니다(시 5:10; 35:1-8; 59:10; 69:24-28; 139:20, 21; 렘 11:20; 15:15). 이에 대한 설명은, 우리는 사람의 사악한 일, 심지어 회심을 갈망하는 동안이라도 마땅히 미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악인의 회개보다도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악인의 멸망이 취해질 때조차도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역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상대가 우리의 원수라는 이유 때문에 단순히 그를 미워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미워하는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거스르는 그들의 악한 죄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 스스로 죄인이 되지 않도록, 판단하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개종하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우리는 죄스러운 증오하는 마음과 어두운 마음으로부터 건져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도록 계속해서 기도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빛 안에 거해야 합니다(요일 2:10).

[제107문] 앞에서(106문답) 말한 방식으로 우리의 이웃을 실제로 죽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입니까? [대답]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시기와 증오와 분노를 정죄하심으로써 우리가 우리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여(마 7:12; 22:39; 롬 12:10), 인내와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친절을 보이고(마 5:5, 7; 눅 6:36; 롬 12:18; 갈 5:22-23; 6:1-2; 엡 4:1-3; 골 3:12; 벧전 3:8)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해악으로부터 보호하며, 심지어 원수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하셨습니다(출 23:5; 마 5:44-45; 롬 12:20-21).

이 문답은 제6계명의 긍정적인 요구로 이웃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할 의무를 강조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단순히 이웃에 사는 사람이나 혹은 우리와 같이 친구로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인생행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함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관계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0장 29절부터 37절까지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동료인 인간에게 중립이 되거나 혹은 무관심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그를 사랑하든지, 아니면 죄 때문에 그를 미워하든지 해야 합니다. 이 답변은 우리가 이웃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여덟 가지 미덕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6계명은 이것보다 더한 것을 요구합니다. 설사 자신의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 인내, 화평, 온유, 자비와 친절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채워진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의 의미 문제입니다. 사랑이란 진정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첫째, 사람에게는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영적 부상을 막기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틀림없이 지옥 불 못에서 영원히 죽게 될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기독교인이든 불신자이든 간에, 설사 그들이 불쾌하게 여길지라도 언제나 한결같이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불친절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무릅쓰고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하여 그들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셋째, 설사 우리 자신의 생활이 위험해진다 할지라도, 우리의 이웃이 신체적 상해나 죽음의 위험 가운데 처한 것을 볼 때에는 주저 없이 그를 돕고 도움이 되도록,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넷째, 우리는 항상 질병과 다른 위험 요소들에 대비하여 강건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의 삶에 반대되는 끔직한 두 가지 범죄가 의사와도 같은 지성이 그룹에서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낙태와 안락사입니다. 사전에서 이 단어들을 살펴보면, 왜 그것들이 제6계명에 의해 정죄를 받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기독교인으로서, 아주 어린아이, 또는 아주 늙거나, 심하게 병들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살인 형태가 늘어나는 데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원수에게조차 선한 일을 행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가르칩니다(마 5:44-47; 롬 12:17-21).

우리의 마음과 정신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능히,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줄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제 의문이 생기는데, “자기 방어를 위하여 원수들과 싸우는 것이 잘못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을 공격해오는 자들을 상대로 싸우는 과정에서 상처를 입히거나 혹은 그를 죽이는 것은 잘못입니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면서 “아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까지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증명을 시도합니다(마 5:39-42). 그러나 반대로, 만일 우리가 저항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부상을 입히거나 우리를 죽이도록 허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이웃 사랑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방어는 성경적입니다(삼상 19:10; 시 82:4; 잠 24:11-12; 행 23:17-22).

마태복음 5장 39절부터 42절까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금지하신 것은 개인적인 모욕에 대한 보복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악한 공격자에 의한 해악과 죽음으로부터 우리의 인성을 방어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Posted in 오늘의 신앙고백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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