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4일(SUNDAY) ●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제35주차(96-98문답)

[제96문답 제2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고(신 4:15-18; 사 40:18-19, 25; 행 17:29; 롬 1:23-25),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방식으로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레 10:1-2; 신 12:30-32; 삼상 15:22-23; 마 15:9). 

첫 번째 계명은 우리가 누구를 예배할 것인가를 말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예배 대상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뿐입니다. 두 번째 계명은 참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할 것인지, 다르게 말하자면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서의 우리의 의무를 말해 줍니다. 따라서 이 두 개의 계명에서 두 개의 도덕적인 의무가 제시됩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나 루터교가 하는 것처럼 이 두 계명을 하나로 묶는 것은 아주 심각한 실수입니다.

두 번째 계명과 네 번째 계명은 십계명 중에 가장 긴 계명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아주 중대한 말씀을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영광과 관련하여 질투하십니다. 죄인들은 결코 하나님에 대해 정확하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죄 있는 인간들로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체의 시도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으로 귀착하고야 맙니다. 형상 사용이나 다른 고안들에 의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보기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영광을 빼앗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종류의 예배를 싫어하십니다. 요한복음 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승인하지 않으신다거나,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명백히 규정하지 아니한 모든 예배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중요한 계명이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다음과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각자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창 4:3-4). 가인은 자신의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나답과 아비후는 제사의 잘못된 형태인 ‘다른 불’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셨습니다(민 3:4).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배척당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 적절치 않은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삼상 13:9, 13). 아론과 여로보암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를 드리도록 ‘도움’으로써 금송아지를 만들어 제2계명을 어기게 하였습니다(출 32:1-5; 왕상 12:25-33). 또한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다른 방법들을 제정했습니다. 가령, 그는 레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제사장을 뽑아 자신이 직접 임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집인 산당도 만들었습니다. 그는 절기 날짜도 자신이 제 마음대로 바꾸었습니다.  

오늘날, 마치 유행처럼 되어버린 잘못된 예배의 관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금지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예배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발상에 의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 교회, 루터교, 그리고 심지어 다른 개신교들에서조차, ‘제단, 초, 성일, 금요일의 금식, 십자가, 묵주, 십자가 표시, 성수, 성직자를 위한 특별한 옷, 성탄절 나무, 영화’ 기타 등등을 예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참된 예배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명령하시는가를 정확하게 알아 순종하는 데 있고, 동시에 무엇을 명령하지 않는가를 알아 철저하게 배척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떠난 기타 다른 원리들은 예배의 순수함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제97문답] 그렇다면 어떤 형상도 만들면 안 됩니까? [대답]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든 형상으로 표현될 수 없고 또한 표현해서도 안 됩니다. 피조물은 형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그것에 경배하기 위해 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형상을 만들거나 소유하는 일을 금하셨습니다(출 34:13-14, 17; 신 12:3-4; 16:22; 왕하 18:4; 사 40:25).  

제97문답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사용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 것에 대해 가르칩니다.

형상은 어떤 사람이나 피조물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림과 동상 그리고 사진은 모두 형상입니다. 이 문답은 예술이 타당한 활동이 아니라는 의미를 진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진 예술적 재능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특별히 기독교인들에 의해서도 보다 더 멋있게 개발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형태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대한 고안물이나 도움처럼 사용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 직접 향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할 때에 하나님은 본질상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육체가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형상화 되거나 또는 표현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딤전 6:16).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렘 23:24; 왕상 8:27). 그러므로 하나님을 그려내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하나님께 모욕이 되는 것이고, 저급한 허위이고, 그리고 거짓된 상상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거짓 형상들에 의해 예배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정신적 상상’조차도 역시 이 계명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해져야만 합니다. 비록 성경이 하나님을 묘사할 때 인간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할지라도, 우리로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하고 싶어하는 유혹을 참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람과 비슷하게 묘사하는 용법에 대해 ‘신인동형론’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에 대해 눈, 귀, 입, 그리고 손 등등이 있으신 것처럼 적용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형상을 사용할 경우 이토록 명백히 잘못된 것인데, 그렇다면 왜 구약 제사에서는 그림과 형상 사용을 허락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령, 속죄소 안의 법궤 위에 금으로 만든 두 천사가 서 있었고(출 25:18-20), 성막 덥게 위에는 천사들이 수 놓아져 있었고(출 26:1, 31), 그리고 장대 위에 놋뱀을 매단 일 등과 같이 구약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형상들이 많이 있습니다(민 21:8-9).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당시 그러한 형상과 그림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아주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지 하나님의 명령은 옳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자신을 묘사하는 형상을 만드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결코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을 붙잡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예배를 위하여 사용할 것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 간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아버지, 아들 혹은 성령이신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든 직접 묘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계명을 위반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은 위반자 자신뿐만 아니라, 심지어 3대와 4대에 걸쳐 아이들까지 포함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이란 그들의 부모가 걸어간 동일한 길로 인도되는 것이 보편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부모의 모범과 책임이 막중한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제98문]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평신도를 위한 책’ 차원에서도 형상들을 허용해서도 안 됩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척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말 못하는 우상을 통해서가 아니라(렘 10:5, 8; 합 2:18-19) 그의 말씀에 대한 살아 있는 강설을 통해 가르침 받기를 원하십니다(롬 10:14-17; 딤후 3:16-17; 벧후 1:19). 

두 번째 계명의 마지막 질문은 왜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형상을 사용할 수 없는가를 배웁니다. 이 문답이 신앙고백문답에 필히 들어와야 했던 이유는, 신앙고백문답이 작성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그림들을 끔찍하게 예배에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황 중에 한 명인 그레고리우스는 각종 그림들은 ‘배우지 못한 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각종 그림들을 적극 사용했습니다. 교황은 예수님을 그린 그림은 성경을 읽지 못하거나 라틴 교회의 예배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는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에 따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성경보다는 그림, 동상, 유물 같은 것들을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이 모든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방법은, 성경으로써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과 그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그림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화가들이 그리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설교자들에 의해 설교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림은 침묵의 우상입니다. 설교자들은 오직 언어와 음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봅시다.

첫째, 종교적인 그림의 경우입니다. 만일 뚜렷한 목적이 있다면, 사람들을 위해 허용되어야 하는 그런 종교적인 그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는 설명적인 삽화를 위하여는 있을 듯합니다. 꼭 알아야만 하는 것은, 예를 들어, 팔레스타인 지역의 지리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세세한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문화와 관습을 꼭 알아야 합니다. 가령, 만약에 에스키모가 양의 그림을 보지 않았다면, 양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그림과 삽화들을 이용하여 이러한 것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의 재능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의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은 다른 문제입니다. 비록 대부분 개신교 신자들과 심지어는 일부 개혁주의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은 언제나 사악한 행동입니다. 어느 개신교 선전물 앞면에 ‘예수’의 그림을 특종으로 정하고, “당신이 가는 곳마다 이것을 당신의 수표책이나 지갑에 넣고 다니십시오, 당신이 하루를 위하여 당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그것 위에서 당신의 눈은 휴식을 취할 것입니다”라고 조언한 경우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명백한 우상숭배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잘못된 형상 예배의 일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그려서 안 되는 이유는, 주님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형상화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사람이셨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라고 불리는 모든 현존하는 그림들은 예술가의 상상의 허구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두 성품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으며, 따라서 결과적으로 명백히 우상인 거짓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그림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두 번째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므로 확실히 우리의 교회나 집에서 그런 것들이 발견되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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