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26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06문답

[질문] 여섯째 간구로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대답]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여섯째 간구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셔서 우리가 죄에 이르는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주시고(시 19:13; 마 26:41; 요 17:15; 약 1:13-15), 시험을 당할 때에는 우리를 붙드시고 구원하여 주십사고 간청드립니다(시 51:10-12; 눅 22:31-32; 고전 10:13; 고후 12:7-9; 히 2:18).

소신앙고백문답 제106문답은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항목인 ‘시험’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셔서 우리가 죄에 이르는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주시고, 시험을 당할 때에는 우리를 붙드시고 구원하여 주십사고 간청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그야말로 수많은 시험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사실 시험이란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관한 전형적인 말씀인 야고보서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3-15). 여기서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 명백한 동시에 결론적으로 죄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소망도 일종의 욕심이겠지만, 그런 것은 얼마든지 허용되는 것이로되, 죄로 정죄되지는 않을지라도, 대신 ’헛된 소망’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도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경고합니다(롬 6:23). 야고보와 바울이 사망이라고 했을 때, 이는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심판의 형벌을 받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들에 의한 ‘죄와 사망의 구도’는 구속사를 거슬러 올라가 에덴 동산에서 전개되었던 ‘행위 언약’의 상황을 상기케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부부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들’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되,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데서 죄가 성립되는 법이고, 그 결과는 사망으로 대변되는 지옥에서 받아야 하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여기서 지옥이란 사람이 죽게 되는 때에 즉각 가게 되는 곳이기도 하겠거니와 더 정확하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때에 ‘심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요 5:29). 사람은 눈에 보이는 현세가 아닌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데 대해서는, 겉으로는 얼마든지 부정할지 몰라도, 양심상으로는 결코 부정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라고 한 바대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자기의 속에서 욕심이 부추겨지는 때에 주도적으로 사탄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탄이 자기 속에 들어와 그러한 욕구를 일으킨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신의 본성이 이미 부패한 존재인 데 따른 것으로서, 사탄은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교묘히 부추겨 결국에는 죄를 짓는 데까지 내몰기 마련입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무한정 자기의 욕심을 펼쳐 나가기 마련인 불신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성도들에게는 감사하게도 공히 ‘성령의 소욕’이 역사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라고 한 데서 여실합니다. 여기서 본디 성령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는 분이심을 고려할 때에, 성도가 욕심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쪽으로 단호히 돌아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실 성도가 시험에 직면할 경우, 그것은 본디 이중적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방금 보았듯이 성도가 받는 시험의 상황에서는, 성령께서 선한 욕구를 일으키시는 일도 필히 병행되기 마련인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양면의 시험’에 직면케 되는 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때로는 시험에 드는 것이 좋은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욥이 고난 당하는 시험을 사탄에게 허락하셨다거나,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도록 직접 시험하신 데서도 여실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이 입증되기를 바라시는 데 따른 시험을 얼마든지 베푸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과 아브라함은 동시에 하나님께 순종치 않으려는 시험(유혹)에도 직면했을 것임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때에 하나님과 사탄 중에 누가 시험하는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믿음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선한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러려면 성도는 평소에 주기도문의 사상에 따른 기도생활이 일상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시험을 극복하는 데 대한 최상의 해결책으로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한 처방책을 제시해 주셨는데, 이것은 평소의 일상적 기도가 그러해야 한다는 의미로서인 것이지, 시험을 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서의 해결책으로서가 아닙니다. 사실 처음부터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한 마냥 그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그 자체로서 온갖 시험거리들을 숱하게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사방팔방에 우리의 눈을 호려 욕심을 부추기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널려 있습니까? 그럴지라도 그나마 시험에 덜 들 수 있고, 또한 시험의 때에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평소부터 주기도문의 사상으로써 쭉 기도하기를 생활화하는 데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혹 시험에 들지라도 ‘악에서 구하옵소서’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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