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19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05문답

소신앙고백문답 제105문은 주기도문의 다섯째 간구의 핵심인 ‘죄의 용서’ 문제를 다룹니다.  용서란 상대방인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그냥 덮어주는 데서 성립됩니다. 본문은 용서의 중요성을 역설적 문장으로써 강조한다는 데서 매우 특징적입니다. 본래의 의미로 풀어보자면, “성도인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그토록 크신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 역시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는 식의 명백한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오늘날 용서의 문제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 모습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주제로서, 성도는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이웃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자기에게 죄를 지은 이웃, 곧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의 죄에 대해 아무 일도 아닌 양 여겨 용서한다는 것은 인간의 성정을 매우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데서 성도의 깊은 고민이 시작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성도는 누구의 죄 혹은 어떠한 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보복할 권리가 없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의 고유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수 갚는 문제는 오래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매우 현실적인 사항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보건대 명백합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그런데 사실 자기를 용서해준 사람을 상대로 무려 일곱 번에 이르기까지 계속 죄를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상대적으로 그러한 사람을 대상으로 일곱 번이나 계속 용서한다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라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는 용서란 한계가 없다 하는 선언으로서, 곧 성도란 예외 없이 용서의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로되, 어느 때를 물론하고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래야만 합니다. 흔히들 성도의 특징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묘사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 앞서 ‘용서의 사람’이라는 측면이 전면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라면 상대방의 죄나 허물에 대해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명령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부터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크나 큰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그렇게 용서를 받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사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는 경향입니다. 용서 문제와 관련하여, 성도는 자신이 이미 어떠한 용서를 받았고, 지금도 계속 용서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상태라는 데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하는 매 상황마다 하나님께서 즉각 징계하신다면, 아마도 지금의 우리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계속적으로 용서를 베푸시는 사실이 없이는, 우리에게서 구원이란 하늘 높이 떠 있어 붙잡을 수 없는 뜬구름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반복하거니와 성도는 과거의 죄만 용서 받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용서 받고 있는 상태이고, 그러한데 따라 미래에 짓는 죄까지도 용서 받기 마련인 사람이라는 데서, 정말 어마어마한 축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즉각 “그렇다면 계속 죄를 지어도 상관없겠다!”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는 법인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시려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울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2:17)라고 한 데서도 명백하되, 나아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2) 라고 한 데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죄를 짓는 일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마치 ‘죽은 자’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데, 그러한 차원으로서의 ‘새 생명’으로 거듭난 자인 것입니다.

만일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신이 이미 더 용서를 받은 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고 사방팔방 떠버리고 다니는 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어리석은 태도요 행동입니다. 성도로서 자신이 받은 죄 용서로 말미암는 구원을 소중히 간직해 나가는 방법들 중의 하나는, 자기에게 죄 지은 자를 기꺼이 용서해 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기의 거듭난 새 생명의 능력은 더더욱 활성화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 더더욱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선한 통치 세계 속으로 더더욱 깊이 뛰어드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렇게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로서의 자리매김에 성립되어 있는 데서, 몸으로부터 공급받음에 따른 각양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열매들 중에는 당연히 용서의 열매도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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