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05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03문답

[질문] 셋째 간구로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대답]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셋째 간구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기꺼운 마음으로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듯이(시 103:20-21; 히 1:14), 모든 일에서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고 열복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욥 1:21; 시 19:14; 67편; 119:1-8, 36; 마 26:39; 행 21:14; 살전 5:23; 히 13:20-21).

소신앙고백문답 제103문에서 다루는 주기도문의 세 번째 간구의 내용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에 대해, 천상에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듯이, 우리 역시 그러한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는 데 있습니다. 이 문답은 칼빈이 한 유명한 말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는 “참된 성도는 하나님께 대한 거역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매우 놀라운 말이지만, 사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실로 “성도로서는 모름지기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라는 것은, 당연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는 데서 고민이 있게 됩니다.  여기에 더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참된 순종이냐 하는 데 대한 오해까지 생겨 혹 율법주의로 빗나가게도 됩니다.

먼저, 순종의 당위성 문제부터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이것을 우리가 받은 구원의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

성도의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문제를 생각할 때면, 의례껏 떠오르는 주제를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자기를 부정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자기라는 존재를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자기라고 하는 존재가 계속 살아 있는 한, 누구도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순종에는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즉 자기 부정이란,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 요구되는 전제 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라고 하는 존재를 실제로 없는 것으로 여기셨기에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기어이 자기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어코 십자가로 지셨던 모습은 한편으로는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신 순종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로 하여금 뒤따르게 하시기 위한 모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위해서라면, 주어진 것이 고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받들어 나가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부정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사도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에게서 가능했던 일은,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평소에 작은 일에서부터 순종하는 훈련을 쌓아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작은 순종을 통해서 큰 순종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러한 작은 순종조차도 평소에 관심을 갖고 씨름해 나가는 데서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러한 사람이라면, 그는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연의 힘만으로도, 혹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는 온전한 순종의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몇몇 개의 순종으로 만족한다거나, 그것을 붙잡고 자만할 경우 지극히 어리석은 태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순종의 총체는 통상 도덕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십계명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을 필두로 기타 하나님의 계명들을 잘 지킬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수단을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작정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지켜나가려 할 경우, 자칫 율법주의로 빗나가기 십상입니다. 성도에게 주어진 수단이란 다음을 가리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한다’라는 조건이 자신에게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렬해지는 것이고, 실제로 순종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것을 바울의 표현으로서 보자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고 한 바와도 같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싶은 마음에 들뜨고, 그러한 소망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그의 속에 성신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서 내주하시는 데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성도로서는 단순히 기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의 의미를 넘어, 자신에게 이루어진 구원에 대한 확신도 더욱 부여잡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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