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6월 21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01문답

[질문] 첫째 간구로 우리는 무엇을 구합니까? [대답]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첫째 간구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는 모든 일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시고(시 67:1-3; 99:3; 100:3-4; 살후 3:1),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기의 영광만을 위하여 친히 처리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롬 11:33-36; 계 4:11).

소신앙고백문답은 제101문답부터 106문답까지 주기도문의 내용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간구를 다루고, 마지막 제107문답에서는 주기도문의 결론을 다룸으로써, 소신앙고백문답 전체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주지의 사실이듯이, 우리가 하나님께 담대히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응답해줄 터이니 기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도를 기타 종교와 미신들 간의 기도를 구별 짓는 놀라운 특징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한 약속을 주실 때에 한 가지 조건을 붙이셨다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즉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라고 하셨고, 그에 따라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라고 한 원리에 맞추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전체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첫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려는 소원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는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함부로 이것저것 다 같다 붙이는 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할 경우, 곁길로 빠진다거나 심하면 우상숭배로까지 전락하기 쉽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는 모든 일에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양면성, 곧 창조주되심과 구속주되심을 가리킵니다.

먼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성경은 창세기에서 이 사실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에 대해 창조주로서 이해하려 할 때에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측면이 하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라사대’라고 한 데서 성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한 데서 성령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흔히 성자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지나치는 경향에 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삼위일체이신 것이므로, 태초의 창조 역사에서의 성자의 사역은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라고 한 데서 역력합니다(1:10).  또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라고 한 바대로입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구속주이십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본질이 삼위일체이신 데 따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성이 삼위일체이심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구속사역을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아담 부부가 타락했을지라도, 처음의 창조목적을 원상태로 돌려놓으시는 역사를 행하시는데, 그에 따라 하나님은 구속주로서 계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이 구속사라고 하는 건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이 자리잡고 있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것을 구속의 언약이라고 명명하고, 실제로 역사 속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구속사에 대해서는 은혜의 언약이라고 명명합니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는 모든 일’이라고 하는 동전의 양면은 창조주되심과 구속주되심에서 찾아진다는 것을 잘 기억해야겠습니다.

둘째,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응답하시는가 하는 데 대한 기대를 갖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도는 일종의 종교형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으로서는 향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가에 대해서도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기의 영광만을 위하여 친히 처리하여 주시기를 구합니다”라고 한 바에 종속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응답’으로 응답하시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신의 기도가 진실하고 정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을 경우, 그것은 ‘무응답 형식’의 응답일 수 있습니다. 물론, 후일에 응답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무응답의 응답이 될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 기도자는 “아,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굳이 응답하실 필요가 없으셨구나!” 하는 각성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합법적 기도’가 되기에 부족함이 많은 데 따른 것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성도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는 데 따른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응답은 ‘합법적 기도’여야 할 것을 전제합니다. 즉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알리시는 바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데서 특징적이고, 이때의 응답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에 걸맞게끔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어야 한다는 데서 또한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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