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6월 14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100문답

[질문]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머리말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기도에서 "하늘에´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한 머리말은,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나아가듯이(마 7:9-11; 눅 11:11-13; 롬 8:15) 우리로 하여금 모든 거룩한 공경심과 확신을 가지고(엡 3:20) 도와줄 능력과 마음이 있는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가르칩니다(사 57:15; 시 95:6; 엡 3:12; 히 4:14-16).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칩니다(행 12:5; 엡 6:18; 딤전 2:1-2).

제100문답은 아주 간단해 보이는 내용이지만, 상당히 깊은 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머리말 부분을 다룹니다. 참고로, 주기도문은 머리말을 시작으로, 여섯 개의 간구가 진행된 후, 최종적으로 마침말로서 끝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하려 할 경우, 또는 무엇인가를 부탁할 때에, 먼저 적절한 호칭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부르는 일부터 하는 것은 당연한 습속입니다. 이것은 기도의 경우에는 더더욱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단계를 거침이 없이 무작정 기도로 들어간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뿐더러 우리네의 경험상으로도 매우 어색할 수밖에 없는데, 심지어 자칫 미신적 행위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무당들을 보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산신령이시여 …” 하는 식이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정확하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면서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의례적인 습성, 또는 기도를 시작함에 있어서의 일종의 장식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첫째, 주기도문을 시작하면서 ‘하늘에 계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지 않았음을 눈 여겨 보아야 합니다. 곧 “우리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에 대해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실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기도문에서는 정확하게 ‘나’라고 하는 단수가 아닌 ‘우리’라고 하는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은 주기도문의 ‘공동체적 성격’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 받은 성도들 모두에게 공통적일 수밖에 없는 사안이 기도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안의 기도란 아예 허용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가급적이면 공동체적인 성격의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성도는 개인적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앞뒤좌우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한 몸이 되는 형식으로 구원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자의 간구는 ‘공동체’로서의 ‘몸의 유익’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어야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마지막 다섯째 항목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둘째,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우리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표현이 가르치는 바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구원론적인 인식’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천지를 창조하신 분으로서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로되,  놀랍게도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하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방점은 ‘관계’ 또는 ‘신분’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에서 아버지에 대해 갖는 친밀한 경험, 바로 그러한 관계가 하나님과 우리 간에 성립되어 있는 데 따른 것입니다. 이 관계에 대해 성경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홈 8:29)라고 한 선포로써 보증해줍니다. 그리고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히 1:6)라고 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므로, 우리는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나아가듯이’ 그렇게 하나님께 매우 친근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태도가 마구잡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중요한 원리이므로 매우 강조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세계에서의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보면, 대체적으로 질서가 무너져 있는 형편인데, 그러한 경향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대함에 있어서 상당한 왜곡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모든 확신’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모든 공경심과 확신”이라고 한 이유입니다.  

넷째,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이 간구하는 바를 기꺼이 “도와줄 능력과 마음이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28)라고 스스로 선포하실 정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선포했을 때, 그의 머리에는 ‘구원의 서정’이라고 하는 장엄한 하나님의 언약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곧장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라고 한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기초한 것이요, 동시에 창세 전부터 작정하신 바에 따라, 지금 현재 이 시간에 ‘우리의 것’으로서 현실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그 날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보다도 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뜻대로 구하는 우리의 간구에 손을 내밀어주십니다(참조. 요 9:31; 요일 5:14).

다섯째, “우리가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한 기도’ 및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함께’와 ‘위하여’(with and for)의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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