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5월 10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95문답

[질문] 세례는 어떤 사람에게 베풉니까? [대답] 세례는 보이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지 않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 순종하겠다고 고백할 때에 비로소 베풀며(행 2:41; 8:12, 36, 38; 18:8), 보이는 교회의 회원의 유아들이 받습니다(창 17:7, 9-11; 행 2:38-39; 16:32-33; 고전 7:14; 골 2:11-12).

제95문답은 누가 세례를 받기에 합당한가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 주제는 오늘날처럼 세례가 남발되는 상황에서는 매우 필요하고 적절해 보입니다. 흔히 듣는 이야기로 ’진중 세례’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시행되는 것으로, 많게는 수천 명을 대상으로 한꺼번에 세례를 베푸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통계에 의하면 연간 군대에 입대하는 장병들이 20만 명 정도인데, 그 중에 평균 14만 명에게 세례가 베풀어진다고 합니다. 실로 상당히 많은 훈련병들이 군대에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실례를 들어, 2012년 5월 19일에 논산 육군훈련소에서는 9,014명이 동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군선교연합회는 그날의 세례식이 세계신기록으로 공인되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세례 받은 훈련병들이 기독교인 정체성, 곧 참된 신앙고백에 따라 그렇게 하는지는 심히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구잡이 식으로 이뤄지는 진중 세례는 상당히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 교회 차원에서도 이 문제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칼빈은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그 마음을 죽이는 화려한 연극을 세례에서 제거한다면, 세례가 진정으로 개선될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런 정도로 종교개혁 시절에는 세례가 마구잡이로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첫째, ‘세례는 보이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세례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베풀 수 없습니다. 여기서 교회 바깥이라고 함은, 그 사람의 신앙고백을 확증할 수 없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다거나 신앙고백이 확실하지 않다면 세례를 받을 수 없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중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소위 비상 세례라는 것을 베풀었습니다.  즉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지만, 당장에 사역자가 없을 경우, 일반 신자가 세례를 주는 경우가 교회의 초기부터 관습이 되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관습을 따랐거나 묵인한 옛적 저술가들도 이것이 옳다는 확신은 없었습니다. 가령, 어거스틴의 말에서도 이러한 의문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일반 신자가 부득이한 경우에 세례를 줄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것이 되풀이 되어야만 한다고 경건하게 말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한다. 만일 부득이한 형편이 아닌데도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직책을 빼앗는 것이 된다. 만일 불가피 해서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죄가 되지 않거나 혹은 가벼운 죄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절의 칼타고 회의(the Council of Carthage)는 여자는 일체 세례를 베풀지 못하도록 공포함으로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께 순종하겠다고 고백할 때에 비로소 베푼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이 없는 한, 세례는 어떤 경우에도 받을 수도 없고 베풀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측에서는 세례 받을 사람에 대한 일정한 신앙교육을 시행하기 마련입니다. 사도신경의 사상과 범위에 일치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표현으로 그치는 것은 애매합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경우 대체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에 준한 교육을 실시하게 됩니다. 개혁교회의 경우는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을 사용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한 칼빈이 제안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세례식 때, 우선 그를 회중 앞에 소개하고, 온 교회가 증인이 되어 그를 주시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를 하나님께 드리며, 학습 교인이 배운 신앙고백문을 확인하면서 세례에서 받을 약속을 열거하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의 이름에로 학습 교인에게 세례를 주고(마 28:19), 끝으로 기도와 감사로 그를 자기 자리로 돌아가게 한다.” 이상과 같이 하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의식은 이상한 오염에 파묻힘이 없이, 본질적인 것을 빠뜨림이 없이 완전한 광채를 나타낸다고 보았습니다.

셋째, ‘보이는 교회의 회원의 유아들이 받는다’고 했습니다. 일각에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지만, 종교 개혁자들 중에 누구도 유아 세례를 폐지한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본인 스스로의 신앙고백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지만, 세례는 근본적으로 ’언약’을 토대로 한 것입니다. 칼빈 당시 유아 세례 문제는 교회 내에서 상당한 혼란을 야기시켰습니다. 재세례파는 유아 세례를 적극 반대하면서 개혁 교회권 내에 파문을 일으켰는데, 특별히 그들의 지지자 세르베투스는 자신들의 주장을 상당한 이론으로 채색하였습니다. 칼빈은 그들의 잘못에 대항하여 조목조목 구체적인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그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행했던 구약의 할례에서 세례의 전형을 찾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천국 백성 반열에 어린아이들을 포함시키신 사건을 유아 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불멸의 증거로 삼았습니다. 성찬은 참여자들에게 분별이 요구되므로, 이미 유아의 시기를 지난 성인들에게만 베풀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세례와 관련해서 주님은 특정한 연령을 규정치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실로 유아 세례는 수세자의 믿음이 아니라 은혜 언약에 근거합니다. 실로 유아 세례의 당위성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성립되어 있는 ‘영적 관계의 영속성’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성인 세례를 위해서는 신앙고백이 필요하지만, 유아 세례의 경우에는 그의 가족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것으로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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