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4월 19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92문답

[질문] 성례가 무엇입니까? [대답] 성례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거룩한 예식이고(마 28:19; 26:26-28; 막 14:22-25; 눅 22:19-20; 고전 11:23-26), 이 예식 가운데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유익이 눈에 보이는 표로써 믿는 사람에게 표시되고 인쳐지며 적용됩니다(롬 4:11; 갈 3:27; 고전 10:16-17).

앞의 91문답에 이어 92문답은 계속해서 성례에 대한 정의를 다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서상으로는 92문답이 먼저 온 다음으로 91문답이 왔으면 흐름이 다소 매끄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여기서는 “성례가 무엇입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성례는 명백히 표징(signs)으로서의 상징(symbols)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것으로 빨강, 노랑, 파랑의 삼색 빛을 발하는 교통 표지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깃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가령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임을 상징하고 표시(징)하는 고유의 국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표징과 상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던 최초의 방식은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나무와 선악과나무를 들 수 있겠고, 노아시대 때 베푸신 무지개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성례를 교회가 항구적으로 시행할 거룩한 예식으로 제정하셨습니다(마 28:19; 26:26-28; 막 14:22-25; 눅 22:19-20; 고전 11:23-26). 그리하여 교회로 하여금 이 예식을 행하는 것을 통하여, 당신 ‘자신’ 및 당신께서 세우신 ‘새 언약’이 제공하는 ‘구원론적 유익’이, 눈으로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표징이 되어, 믿는 사람들 모두에게 인쳐지게 하셨으니, 곧 적용되게 하셨습니다(롬 4:11; 갈 3:27; 고전 10:16-17). 이상은 대답의 내용을 조금 더 상세하게 풀어서 진술해 본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개의 중요한 동사들이 쭉 나열된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곧 ‘표시되고’, ’인쳐지며’, ‘적용된다’고 한 표현들입니다. 하지만 이 세 동사는 한 가지 사실을 거듭 강조한 데 따른 것이지, 각기 별개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새 언약의 유익’이라고 했습니다.

새 언약의 유익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성취하신 구속의 효력이 우리에게서 활성화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의 객관적인 측면은 칭의와 성화(거룩함)이고, 주관적인 측면은 신앙과 회개입니다. 우리는 본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우리 안에 심으시는 데 따라, 아니, 그러한 방식으로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성취하신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되는데, 그것의 법적인 측면에 대해 칭의와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거룩함이 역시 우리의 것으로 전가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현대 교회 안에서 성화와 관련하여 잘못된 이해가 돌고 있는 데 대한 것입니다. 성화란 엄격히 말해서 성도 자신이 거룩해지는 데 따른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의롭게 된 것은 ‘여겨진 것’에 따른 것으로서, 아담 안에서 초래된 부패와 타락은 여전히 성도에게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영단번의 칭의)가 향후 성신의 역사와 인도에 따른 삶을 살아나가는 데 대해,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존되어 있는 데 따라 그것을 인정해주시는 것이므로, 곧 두 번째 칭의(성화로서의 칭의)가 되게 됩니다. 성화의 삶이란 것은 성도의 생애 내내 요구되고 명령되는 것이긴 하지만, 여하튼 간에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대가를 얻어낼 수 있는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항간에 보듯이 ‘성화의 삶’을 공로나 헌신으로 미화시키면서 종내 상급을 얻는 수단인양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대원칙에 위배되기 마련임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이즈음에서 바울의 다음과 같은 고백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이는 두말할 것 없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시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눅 17:10)라고 하신 말씀의 정신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새 언약의 유익’ 문제로 돌아와서, 이것은 성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접붙이신다거나(세례), 성도의 영혼에 유익을 끼치시려고 그가 섭취한 떡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실 때에(성찬), 그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일어나게 하시는 ‘어떤 일(for some else)’이 있기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모든 것을 ’오직 은혜’로 여기는 신앙의 실력인데, 그로 말미암아 철두철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존재로서 살아나가게 되니, 이는 성도 자신의 각성과 노력으로써 구현되는 것이로되, 철두철미 ‘오직 은혜’에 압도된 데 따른 것이므로, 절대적으로 성령께서 그에게 역사하시고 그를 인도하시는 데서 되어지는 일입니다. 그러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라고 한 것임은 자명합니다. 

 정리하자면, 세례와 성찬 두 성례가 합당이 시행될 때에, 거기에 참여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통하여 성취하신 ‘구원의 모든 효력(칭의와 성화)’이 자기를 통해서 활성화되는 데 주도적이 되게 됩니다. 그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의 자리매김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는데, 이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시는 이중의 신비적 역사(칭의와 성화 및 신앙과 회개)로 말미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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