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4월 12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91문답

[질문] 성례가 어떻게 효력 있는 구원의 방도가 됩니까? [대답] 성례가 효력 있는 구원의 방도가 되는 것은 성례 자체에나 성례를 행하는 사람에게 어떤 덕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 주심과 믿음으로 성례를 받는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신께서 일하심으로 됩니다(마 3:11; 고전 3:6-7; 12:13; 벧전 3:21).

지난 88-90문답을 통하여 살펴본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의 두 가지 은혜의 방도 중의 첫 번째 요소인 ‘말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은혜의 수단은 성례인데, 이것은 91-97문답을 통해 고백됩니다. 전체적인 구조를 보자면, 성례 일반(91-93문답), 세례(94-95), 성찬(96-97) 등의 순서입니다. (참고로 대신앙고백문답은 이와 관련된 한 가지 주제를 더하여 ‘세례와 주님의 만찬의 차이점[176-177문답]’에 대해서도 다루었습니다.) 

이곳의 질문의 요지는 “성례가 어떻게 효력 있는 구원의 방도가 됩니까?”라고 한 내용입니다.  성례는 당연히 세례와 주님의 만찬(성찬)을 가리킵니다. 성례에 대한 단어 풀이부터 정확하게 해보자면, 말 그대로 ‘거룩한 예식’입니다. 옛적에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례의 숫자가 무려 일곱 가지나 되었습니다. 단지 숫자만 많았기에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고, 세례와 주님의 만찬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상당한 오류에 빠져 있었는데, 세례 그 자체를 구원의 수단으로 보았고, 주님의 만찬은 매 번 예수님을 다시 제물로 바치는 식의 미사와도 같은 것으로 전복시켜 버렸습니다.   

성례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의 보이는 형식’이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은혜의 수단이라는 면에서의 말씀과 성례 간의 공통점을 부각시킨 표현입니다. 통상 세례는 필요한 경우 수시로 행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성찬은 1년에 2차례 정도, 즉 성탄절과 부활절 같은 때에 행하고 있는 것이 현대적 경향입니다. 이는 자주 시행하는 것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그런 정도로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시행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물론 자주 시행할 경우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정도가 덜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지라도 단지 횟수를 제한한다고 해서 성례를 올바르게 시행하는 것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만찬을 성경의 가르침에 맞게끔 올바르게 시행한다는 전제가 충족된다면, 사실 성례는 자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유익할 것은 자명합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서 활성화시켜 주는 ‘은혜의 수단’인 것이니 말입니다. 이것은 존 칼빈이 제네바 교회에서 최초로 목회를 시작할 당시, 교회 개혁에 있어서 우선 시급한 사안들로서 네 가지를 제안할 때에, 주님의 만찬을 매 주마다 시행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주님의 만찬은 자주 시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지만, 성례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상 이것은 결코, 어떤 경우에도, 여하한 이유로도 형식적으로나 겉치레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의 만찬에 내포되어 있는 신학 사상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의 최종 절정으로서, 대속, 속전, 구속, 화해, 화목 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간단하게 표현해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인 것입니다. 여하튼 이 사건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표현할 때에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새 언약을 통해서 인류를 위한 구원이 일어날 것이라는 계시는 세계가 창조되던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내내 이 구속사는 최초의 ‘창조 언약(혹은 아담 언약 및 행위 언약)’을 시작으로,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예레미야의 새 언약 선포’ 등을 통하여 계속 관통해 나왔던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구약’, 또는 ‘옛 언약’이라고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는 바대로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의 은혜의 수단 또는 방도가 말씀 선포와 성례라고 했을 때, 말씀 선포를 통해서는 기독교 신앙의 전체적인 내용을 합목적적(合目的的)으로 다룬다는 데서 매우 특징적입니다. 하지만 성례에서는 특별한 강조점이 있습니다. 세례의 경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데서 특징적이고, 주님의 만찬에서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식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섭취함으로써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데서 특징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로서는 모름지기 주님의 만찬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성례가 효과적이 되는 것은 성신의 사역에 달린 것이므로, “성례가 효력 있는 구원의 방도가 되는 것은 성례 자체에나 성례를 행하는 사람에게 어떤 덕이 있어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 주심과 믿음으로 성례를 받는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신께서 일하심으로 됩니다(마 3:11; 고전 3:6-7; 12:13; 벧전 3:21).”라고 했습니다.

지금, 성신께서 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즉각 무엇을 생각할 수 있어야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말씀의 선포’인 것입니다. 말씀 선포가 수반되지 않을 경우, 주님의 만찬은 일종의 형식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성신의 역사는 기대할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말씀의 선포라고 했을 때의 올바른 의미에 대해서인데, 이것은 예식을 진행하는 가운데 ‘말씀을 선포하는 순서를 갖는다’ 하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만찬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진리를 제대로, 충분히, 집중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교회는 성례를 자주 시행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의 효력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성례에서도 말씀 선포의 중요성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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