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3월 29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89문답

[질문] 말씀이 어떻게 구원을 위하여 효력 있게 됩니까?  [대답] 하나님의 성신께서 말씀의 낭독, 특별히 설교를 효력 있는 방도로 쓰셔서 죄인을 설복하고 회개시키며, 거룩함과 위로로 그들을 세워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느 8:8-9; 시 19:7; 행 16:14; 20:32; 롬 1:16; 10:14-17; 15:4; 딤후 3:15-17).

웨스트민스터 89문답과 90문답은 앞의 제88문답에서 그리스도께서 끼치시는 은혜의 세 가지 방도로서 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제시한 데 대한 심화과정으로서 ‘말씀’이 주제입니다. 먼저,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구원을 누리도록 해주시는 분이신 성신의 역사를 강조하고(89문답), 이어서 성도들 편에서 어떻게 말씀을 대해야 할 것인가를 다룹니다(90문답).

첫째, 말씀이 성도에게서 구원의 효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은, 일반의 경우와는 달리 전적으로 성령께서 말씀을 도구로서 사용하시는 데 따른 것입니다. 성도가 혼자서 성경을 정독하거나 좀 더 깊게 살펴보는 때에, 나름대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거나, 동시에 마음에 큰 감동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써 성령께서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 앞에서 오늘날 많이 속는 경향이 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직은 의지적 행동으로까지 나아간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신께서는 성도의 인격 전체에 간여하시기 마련인데, 이는 성령에 의해 활성화되는 성도의 새 생명의 모습이란, 성도의 생명활동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활동을 대신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할 때에 성신께서는 예배에서의 목사의 설교를 주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 특별히 설교를 효력 있는 방도로 쓰셔서 …”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방법 및 기회는 오직 예배 의식 속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배의 자리에서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들을 때 이상으로, 그렇게 들은 바대로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천하는 때가 없는 법입니다. 그것이 계명에 대한 순종의 문제이든지, 또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용서의 문제이든지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자신에게 확신이 되는 때는 오직 예배의 현장 뿐입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바에 따라, 예배당을 벗어나 어느 현장에 있든지 간에, 그렇게 깨달은 바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기가 약동하여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말씀을 쓰신 사실의 진위성 문제입니다. 항상 강조할 필요가 있거니와, 성령께서 말씀을 쓰신다고 할 때, 그것의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핵심적인 방법은, 성도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의 성격을 보면 됩니다. 이것은 “… 죄인을 설복하고 회개시키며, 거룩함과 위로로 그들을 세워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한 바와도 같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항상 그 특성이 ‘구원론적’입니다. 이는 성경 진리의 내용이 주도적으로 구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7)라고 한 말씀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또한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5-17)라고 한 신약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 말씀을 쓰시는 성령의 역사의 성격이 구원론적이다 하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론적이다 하는 말은 항상 ‘교회적이다’ 하는 데로까지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진리로서 살 수 있게끔 능력을 베푸신다고 할 때, 그것의 최고봉은 단연 성도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가 되어 자리매김을 확고부동하게 하시는 것을 지향하시는 때문입니다. 일견 말하는 형식으로는, 성령께서는 개개인을 중생시키시고, 그의 삶을 신앙과 회개로 부단히 이끄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총체, 또는 그러한 데 따른 성도의 변화의 실체가 무엇이냐 할 때, 두말할 것도 없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임재를 이 지상에 구현하시는 바에 대한 참여이자 기여이기 마련입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되면, 그는 매우 교회적인 사람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할 때에, 자기 속에 그렇게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마음의 감동과 그래서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실천해 나가는 실천력이 확고부동한 것입니다. 비록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수고일지언정, 주님의 몸된 교회의 역사적 행진이 막힘이 없이 기운차게 흐르게 하는 데 기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세상의 어떠한 것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매우 값진 가치의 것임을 명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성령으로라야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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