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3월 15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87문답

[본문]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입니까? [대답]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구원의 은혜이고(행 11:18; 딤후 2:25), 이로써 죄인이 자기의 죄를 바로 알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달아(시 51:1-4; 욜 2:13; 눅 15:7, 10; 행 2:37), 자기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고, 그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고(렘 3:22; 31:18-19; 겔 36:31; 눅 1:16-17; 살전 1:9), 굳은 결심과 노력으로 새롭게 순종합니다(대하 7:14; 시 119:57-64; 사 1:16-17; 마 3:8; 고후 7:10-11). 

87문답에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무엇입니까?”라고 한 질문이 지향하는 바는 털두철미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 편에서 이렇게 한다거나 저렇게 한다는 요소가 아예 없다는 의미는 아니로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그러한 사람들 간에 공통적으로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나타내기 마련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의해 일으켜지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문제입니다(행 11:18).

먼저, ‘생명에 이르는 회개’라고 했을 때, 여기서 ’생명’은 ’구원’의 의미로 쓰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동시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회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시사됩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가룟 유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가룟 유다의 행위를 보면 일견 회개한 듯한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크게 뉘우쳤고, 따라서 배신의 대가로 받은 30개의 은을 되돌려 주었고, 그러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는 말로써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러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 스스로 목매어 죽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는 일면 회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회개(repentance)나 뉘우침(후회, remorse)을 놓고 각 단어의 차이를 따져보는 것은 별로 유익이 없습니다.  

첫째, 참된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수반합니다. 본디 회개와 신앙을 엄격히 구별짓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고, 또한 둘 다 평생 동안 계속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서상으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하는 말보다는, 신앙함으로써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다 하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의 일성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라고 하신 것은 회개와 신앙의 동일성 차원에서 하신 말씀이지, 순서상으로서가 아닙니다. 그러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필히 회개를 수반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가 없이는 구원도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로 하여금 자신의 죗값을 지고 대신 죽음을 당하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자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못지 않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도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우리의 죄값을 대신 감당해 주신 대속자이기만 하셨던 분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모양’이 되신 끝에 그렇게 해주신 분이십니다(롬 8:3; 빌 2:6-8). 참된 신앙의 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못지 않게 그분의 인격까지 보는 데서 찾아집니다.

둘째, 참된 회개는 ‘평생의 경주’입니다. 어떤 사람들처럼 기도원과 같은 곳에서 그야말로 눈물 콧물 쏟아내면서 격렬하게 기도한 것을 놓고 회개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러한 식으로 회개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정의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모든 것’에서 찾아지는 동시에 선에 대한 정의 역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에서 찾아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회개를 그런 정도로서 정의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평생의 경주’에서 회개의 정의를 내린다고 할 때에, 그것은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는’ 자세가 증대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이고,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열망’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회개에는 죄를 방하기에만 급급한 수동적 자세를 벗어나 의를 향하여 자라나고 성숙해지는 역동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셋째, 서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은 성도에게서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평생 동안 진행되는 데에는 배후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베풀어지는 데 따른 것이라는 의미로되, 그러한 데 따라 성도로서는 모름지기 부단히 모태 교회의 품에 안겨 있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에 붙어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그로 하여금 신앙과 회개를 유지해 나갈 수 있게 해주시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신앙과 회개를 평생의 경주로서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의 자리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다른 지체들과 한 몸이 되어 더불어 살아나가는 사실 그 자체 및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여러 가지 유익과 벙편을 힘입지 않은 채 홀로 독자적으로 회개와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일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 또는 성령의 소욕은 항상 교회적인 일인 것이지, 개인적인 일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다음 제88문답을 통해서 심화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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