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2월 16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83문답

[본문] 법을 어기는 죄가 모두 똑같이 악합니까? [대답] 어떤 죄는 그 자체로서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해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보다 더 악합니다(시 19:3; 78:12, 32, 36; 겔 8:6, 13, 15; 마 11:20-24; 요 19:11; 요일 5:16).

제83문답은 죄의 경중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죄를 가벼운 죄와 그보다 더 무거운 죄로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고백문답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가령, 운전을 하다가 잘못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벼운 접촉 사고로부터 심할 경우 사람이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음주한 채 운전하다가 그만 사고를 낸 경우에 대한 뉴스를 심심찮게 되게 됩니다. 각 나라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음주 운전자에 대한 처벌은 좀 더 강합니다. 이는 그가 어긴 법이 더 무겁기 때문입니다.

죄의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권력자가 수많은 백성을 상대로 죄를 범하는 일은 어느 시대이든지 있기 마련이고, 개인이 개인을 상대로 죄를 범하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고, 그러할 때에 교회의 직분자들도 자신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끔 죄를 범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분 여하를 물론하고 죄는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하여 그야말로 불철주야로 역사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보다 더 악합니다”라고 한 데서 자명합니다 .

그러므로 여기서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에 대해서 먼저 다룬다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세상이 제정한 법률과 관계되는 죄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위정자들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므로, 성도가 세상 법률을 범하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 앞에서 그러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는 항상 먼저 하나님을 상대로 자행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예외 없이 죄인입니다. 시편 저자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라고 한 것이 이러한 때문이었습니다.

항간에 “저 사람은 착하기 이를 데 없어서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하는 말이 회자되곤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으리만큼 개중에는 더러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관점의 일환일 뿐입니다. 실제로 사람이란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제아무리 간절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육체라고 하는 것의 성향 자체가 부패하고 타락하였기 때문에, 이 땅의 인간들 중에서 의인은 그야말로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앞의 평가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정말 사람 속은 모를일이야, 그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하는 평가도 회자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성경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렇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경우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준과 관습에 따라, 자칭 선인이나 의인을 규정하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벗어버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제83문답의 핵심은,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무겁거나 많은 죄를 짓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가령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시 2:2)라고 한 경우를 보십시다. 이 말씀은 공생애 사역을 끝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을 때 보다 더 근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은 법과 정의를 수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상황인 것이 대체적입니다.  권력자들의 일탈이 절정에 달한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였습니다.  그 어린아이들의 전쟁 놀이에나 어울리는 그 장난감 같은 무기를 들어 예수님을 핍박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노릇입니까?  

구약시대 때 왕 같은 권력자나 제사장 같은 종교 지도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책임을 진 것이었습니다. 가령 북국 이스라엘의 시조였던 여로보암이 자신의 정치 권세를 보존할 양으로 제도적으로 구약신앙을 변개시킨 가운데 그 길로 백성들을 몰아갔던 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경우 혹 죄를 사함 받기 위하여 제물을 바치려 할 때에, 일반 백성에 비해 더 값비싼 가치의 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지도자적 위치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더 많은 죄의 영향력을 백성들에게 미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가령,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그토록 많은 성도들과 관계하는 격이므로, 잘못된 목회를 할 경우 성도들 전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개교회에 성도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목사로서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고, 오히려 큰 부담이 되어야 합니다. 그토록 많은 성도들의 영혼은 마치 자신이 회계할 자인 것같은 자세로써 섬긴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히 13:17). 오죽하면 사도 바울은 성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일에 대해 ‘해산하는 수고’라고 한 표현을 사용하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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