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2월 09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82문답

[본문]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대답] 타락한 이후 한낱 사람으로서는 이 세상에 살 동안에 하나님의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전 7:20; 갈 5:17; 요일 1:8, 10),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위로 날마다 범죄합니다(창 8:21; 롬 3:9-18, 23; 약 3:2, 8).

제82문답의 질문은 성도라면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할 사실상의 명문장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십시다.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질문할 경우, 혹 만에 하나, 다시 만에 하나인데, 나름 우려되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질문에서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 데 따른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그렇다면 만에 하나라도 비록 ’완전히 지키지는 못할 지라도’, 그럴지라도 “부분적으로라도 지킬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을 자칫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우려를 표명하는가 하면, 실제로 통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한두 가지의 선행을 앞세워, 자기들의 죄 덩어리 투성이인 진면목을 상쇄시키는 성향, 즉 그러한 습관 혹은 성향의 왜곡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가볍게 넘어갈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실제로 과거의 유대인들의 경우는 물론이고, 역사 속에서 계속 영향력을 펼쳐 나온 중에, 급이야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서 기독교 계에에 만연해 있게 된 무서운 사탄의 계략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지면상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루기는 어렵지만, 가령, 현대교회에서 ‘상급주의’을 보는 것은 이에 대한 매우 적절한 실례입니다.

그러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무슨 그렇게도 대단한 공로 또는 헌신을 했다고, 그것을 앞세워 주님께서 보상을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물론 자기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서 이렇게 저렇게 수고하고 헌신한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랬다는 사실 자체를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가르치고 주장한다는 것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신의 수고가 제아무리 헌식적이고 희생적이었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대가’나 ‘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리리만큼의 가치의 것인가 하는 데 있습니다.

성도라면 모름지기 다음의 원리를 잘 깨닫고 가슴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지 못한 옛 사람의 시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이제 새 사람이 되었다 할지라도, 새 사람으로 행하게 되는 일체의 선행은 지극히 작은 점의 또 지극히 작은 점의 점만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어느 모로든 자기 자신의 뜻과 의지의 산물일 수 없는 법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말입니다.  성신의 인도와 능력이 없이, 실로 어느 누구라고 감히 자신의 선행을 앞세워 하나님께 보상이나 보답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반대로,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력이 자신에게서 발휘되는 것을 볼 때에, 실로 자기와도 같은 죄인에게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셨고, 그러한 데 따라 비록 지극히 작은 점의 점만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 가능해졌구다 하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 실로 구원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더더욱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 대한 의욕을 불태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을 잘 깨닫게 해주려고, 소신앙고백 제82문답은 우리의 본성에 대한 세 가지를 일깨웁니다.

첫째, ‘생각에서부터 죄를 짓는다고 했고(창 6:5; 8:21)’, 둘째, ‘말로써 죄를 짓는다고 했고(롬 3:13이하)’, 셋째, 결국에는 ‘행동의 죄를 짓는다(약 2:10)’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할지라도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옛 사람의 잔재로 말미암아 거듭난 새 사람이 부단한 죄의 공격을 받습니다. 옛 사람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이는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엡 4:22)라고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자기 속에서 부단히 솟아 오르는 욕심에서 대표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인간 모두에게서 일종의 성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인데, 곧 바울이 “너희는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골 3:9)라고 한 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인 것을 바울은 누구 못지 않게 인정하였는데, 이는 자기 스스로도 평생에 걸쳐 다음과 같이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  

이제 우리 역시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선한 삶을 살 수 없을 뿐더러, 스스로를 구원할 수는 더더욱 없는 법이다”라고 말입니다. 다시 한 번 예레미야 선지자의 선포를 보겠습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구약성경에 능통한 신학자였던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 못지 않게 절감한 사람으로서, 결국 성도가 구원 받은 것은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라고 한 사실을 신앙으로써 고백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내용이 이렇게 전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편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떠오릅니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시 58:3).

그러니, 우리로서는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야겠습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 혹은 당신의 경우에는 왜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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