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8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0문답

[질문] 안식일을 어떻게 거룩히 지킬 수 있습니까? [대답] 우리는 그날 종일을 거룩하게 쉬고, 다른 날에는 해도 정당한 세상일과 오락까지도 쉬고(출 20:20; 16:25-28; 느 13:15-22; 사 58:13-14), 또한 그 모든 시간을 하나님께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예배드리는 데에 사용함으로써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출 20:8; 레 23:3; 시 92:1-3; 눅 4:16; 행 20:7). 다만 불가피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행할 수 있습니다(마 12:1-13).

지난 56, 57, 58, 59문답에서는, 옛적 사람들이 안식일을 주의 날(Lord’s day)로 대신한 것은 안식일의 모형이 우리 주님의 부활(the resurrection of our Lord)에서 실현되었다는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했기 때문으로, 즉, 그림자였던 의식을 고수하지 말라는 경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제 칠일에 대한 지정은 폐지되었지만, 이레 가운데 하루를 정하는 것은 남아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허접한 거짓 선지자들(the false prophets)의 주장이라면서 단호히 배척합니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주장은, 단순히 유대인들을 반대하기 위하여 날만 변경했을 뿐이고 여전히 그 날을 거룩하다고 생각하니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지키는 미신적인 안식일 준수 행위는 여전히 이사야가 했던 책망을 받아 마땅하다고 일갈했습니다(사 1:13-15; 58:13).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방법은 어떤 것입니까? 이 문제 앞에서 칼빈은 역시 말하기를 “유대인들에게는 전형적으로(typically) 전달되었던 진리이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림자 없이 진리 그 자체로 제시되니, 따라서 일곱이라는 수를 고집하지 말고,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미신이 없는 것이니, 다른 날에 엄숙히 모이는 것도 상관없다”(의역)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안식일을 지키는 정신은 일단 그 날 하루를 종일 쉰다는 토대로부터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소신앙고백문답은 “불가피한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은 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명백히 해놓았습니다.

먼저, 하루를 쉰다는 것의 의미를 정확히 해야 합니다. 이는 한 주간 동안 전개되어 나온 일체의 세상살이를 위한 일들을 실제로 중지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제 앞에서 현대인들은 산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가령, 국가 실시하는 여러 가지 자격증 관련 시험들이 대체적으로 주일에 시행됩니다. 인생사에서 몇 안 되는 중대사일 수 있는 혼인 예식들도 주로 이 날에 집중되어 있어서, 불가불 다양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상황에서 그들의 초청을 외면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기타 사회 생활과 경제 활동의 다양성은 주일에도 우리를 일터로부터 쉽게 돌아서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들 하나하나에 양보하기 시작하면,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서의 안식일 준수란 먼 옛날의 추억으로만 남게 될 것이 뻔합니다.

지난 번에도 언급했듯이, 성도가 안식일(주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의 모든 것을 대표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요 그러한 가치에 실제로 성립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설혹 여러 가지 소소한 신앙적 덕목들에 많은 열심을 낸다 할지라도, 정작 주일을 거룩한 날로 구별하는 이 중요한 실질이 없이는, 그러한 것들의 가치는 잠시 잠깐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내 허공에서 사라져버리는 연기와도 같습니다.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서 앞의 세 계명이 부정 명령 형태를 취하는 것과는 달리 마지막 네 번째에 위치한 안식일 준수 명령은 긍정 명령 또는 적극적인 명령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바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단순히 쉬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쉰다는 것은 다른 소중한 일을 적극적으로 달성하기 위함 때문입니다.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려는 명백한 목적 때문에 그처럼 쉬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성도들은 삼삼오오 예배당으로 모여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드리는 예배에서 한 몸으로 연합합니다. 이 예배 공동체는 피차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한 데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결원이 생기게 되면, 그것은 ’불구의 예배’가 되고 만다는 것은 뻔한 상식입니다. 성도들은 모름지기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서로 지체를 이루어 굳게 결속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렇게 연합되어 있는 사실은 예배 의식을 통해서 그 모습을 가장 충만이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이 날에 “주께서 성신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줍니다. 성신님의 자유로운 역사는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데서 충만할 수 있는 법이므로, 일상상의 성경 읽기는 물론이고, 예배 의식 속에 임재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설교를 통하여 선포된 말씀이 자신의 뇌리에서 깨달음이 되어 전인을 지배하려 할 때에, 단순히 종교적 감동으로 치부치 아니하고, 성신님의 주도적인 일하심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라면, 그는 구속사의 현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주일에 성도들 각인은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대역하고, 천상의 일들을 경건하게 명상하면서, 자신의 신앙의 모태인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잘 지켜 나가야 합니다. 실로 성도는 경건이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교회의 각종 모임에 부지런히 출석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증진시키게 해주는 외부의 수단들(those external aids)을 잘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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