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5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61문답

[질문] 제4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제4계명이 금하는 것은 명하신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주의하게 이행하는 것이며(겔 22:26; 말 3:1), 게으르거나 그 자체로 죄악적인 일을 하거나(겔 23:38; 행 20:7, 9) 또는 세상일과 오락에 관련된 불필요한 생각과 말을 함으로써 그날을 더럽히는 것입니다(사 58:13-14; 렘 17:24-27; 암 8:4-6).

제61문답은 전적으로 제4계명을 더럽히는 행위를 금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지난 번에 성도가 주일을 지키는 것은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대변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주일에 다른 지체들과 함께 예배당에 모여 공적 예배를 드리는 행위가 없이는, 다른 기타의 것들을 신앙의 요소로서 주장하는 것은 별반 큰 의미가 없다고 한 바를 상기하면서 이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도는 주일에는 ‘하라’고 ’명령된 의무’를 온전히 이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행하되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이는 특별히 ‘부주의하게 이행하는 것’에 대한 경고가 수반된 데서도 명확합니다. 성도가 주일에 공적 예배를 드리고 기타 필요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교회가 제정한 도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선한 의무이자, 자신이 누려야 할 마땅한 권리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가운데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경향은, 성도가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에 여러모로 힘들어지는 상황을 여기저기서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가령, 어떤 성도는 직장 동료의 혼인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핑계로 주일의 예배의 의무를 쉽게 저버리는가 하면, 혹은 건성건성 예배에 참석한 후 서둘러 예식장으로 달려가기에 바쁩니다.

예배 자체에서의 ‘부주의한 이행’ 문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시작할 경우, 그곳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이루지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물론 예배 의식 전체와 관련해서 그런 것이므로, 다른 무엇보다도 말씀의 순수한 선포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 내내 마치 부흥회와 같이 천박한 인간의 종교심만이 고양된 그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배 시간에는 내내 예배를 집례하는 담당자들은 물론이고 청중들 모두가 최고로 고양된 경건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주의한 이행 또는 습관적이며 형식적으로 일관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대놓고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을 각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둘째, 게으름 역시 무시 못할 원수로 작용합니다. 한 주간 직장이나 일터에서 시달리고 나면 육신이 피곤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배 드리기를 귀찮아 하면서 이런저런 핑계거리를 찾기에 바쁜데, 여기에 TV 같은 데서 자신이 특별한 관심을 갖는 경기나 기타 프로그램을 방영할 경우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아예 예배를 불참하기가 쉽습니다. 요즈음은 무슨 국가 자격증 시험 같은 것이 대체적으로 주일에 실시되는 까닭에,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셋째, 아예 ‘그 자체로 죄악된 일’을 자행하는 경우도 혹 있습니다. 이런 경우 하필 주일을 골라서 노골적으로 죄를 짓는 게 됩니다. 자신이 마땅히 행해야 할 적극적인 의무에 게으르고, 마지 못해 억지로 하듯이 소극적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이런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특별히 주일은 그야말로 ‘쉬는 날’이기 때문에, 평소에 동경하던 죄악,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기회로 삼는 경우입니다. 가령, TV로 건전치 못한 프로그램을 시청한다거나, 순전히 오락에 불과한 것들을 즐긴다거나, 지인들과의 자유로운 대화 분위기에서 음담패설에 빠져들거나 즐기는 등의 모습입니다.

“최대의 수비는 적극적인 공격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죄는 게으르고 소극적인 태도에 쉽게 스며드는 법입니다. 반면, 범사에 하나님께 순종할 거리를 찾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적합한 것들에 관심을 갖는 적극적인 신앙에는 상대적으로 죄가 틈탈 기회가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모름지기 이런 생각으로 주의 깊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라고 하는 존재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라고 한 외침이 어찌 공연한 한 말이겠습니까? 성도라면 공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자신은 범사에 ‘선한 노예’라는 의식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럴지라도 항상 행복하고 즐겁기만 할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를 위하여 스스로 고생하는 사람의 경우처럼, 자원하여 순종하는 ‘자기 희생자’로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신 원리처럼,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하는 만큼 오히려 상대적으로 한없이 솟구치는 행복만을 맛보기 마련인 때문입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을 드높이기 위하여 제정된 날을 도리어 자신의 죄를 즐기는 날로 변질시킨다는 것은 실로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죄된 행위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호리 만큼인들 잠식하지 않도록 각별히 깨어 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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