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9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47문답

[질문] 제1계명이 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제1계명이 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심을(시 81:10-11) 부인하거나(시 14:1), 그러한 분으로서 경배하지 않거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이며(롬 1:20-21), 또한 오직 그분께만 드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다른 자나 다른 것에게 돌리는 것입니다(왕상 18:21; 왕하 17:33; 겔 8:16-18; 마 6:24; 롬 1:25).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 제47문답의 핵심은 제1계명이 하나님의 백성을 제한시키는 바에 대한 것입니다. 즉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고 한 제1계명 본연의 명령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정확하게 고찰할 것과 그렇게 깨달은 바대로 적극 실천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제1계명 자체의 부정적인 특성상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의당히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연약한 성도에게서 이런 경우는 곧잘 일어나곤 합니다. 가령, 회사에서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에서 때마침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제가 화제로 떠오르면서 주로 비판적인 이야기를 경쟁적으로 늘어놓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 스스로 기가 꺾이면서 그만이나 비록 소극적이긴 하겠지만 하나님을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유복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잘 자란 한 청년이 이제 나이가 차게 되어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안에서 훈련을 잘 받고 씩씩한 군인이 되어 자대에 배치되었는데 보직이 행정병이었으므로 군대 사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보게 되었습니다. 네댓 명의 고참 행정병들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는데, 아뿔싸 희한(?)하게도 그들 모두가 불교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행정병이었던지라 인사 기록부를 통하여 이제 막 합류한 신참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아채고서는, 사실상 ‘불신앙의 무서운 죄악’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한 그러한 고약한 신고식을 받기로 작당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뜩이나 처음 대하는 고참들 앞에서 차려 자세로 꼿꼿이 선 채 잔뜩 주녹들어 있는 이 가여운 신참이 들으라는 듯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을 마치 구호처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고참병은 ‘하나님을 모독한 자기의 말’을 그대로 복창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청년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궁금증은 생략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해나가노라면 이와 같은 상황을 몇 번은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처신했습니까, 혹은 처신할 것이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부인하거나 …”라고 했을 때, 그렇게 부인해서는 안 되는 당위에 직면해 있는 ‘우리’란 과연 어떠한 존재들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영광되고 축복된 신분이 베풀어지기 위해서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이 대가로 지불되었습니다. 그러한 희생의 터 위에서, 이제 공의의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 되어주셨고, 육신의 아버지로서는 감히 견줄 수 없는 그런 완벽한 아버지가 되시사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느라 하루 하루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므로 하나님을 “... 그러한 분으로 경배하지 않거나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 …”에 걸리게 되는 상황이란 명백히 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그러한 분’이라고 했을 때, 이는 ‘권능의 하나님’이신 것과 ‘은혜의 하나님’이신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가리킨다는 것을 염두에 두십시다. 권능의 하나님이신 특징은 시대를 초월하지만, 은혜의 하나님이신 특징과 관련해서는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러하시고, 구약시대에는 출애굽 사건 안에서 그러하십니다. 그런데 은혜란 어떠한 경우에도 진공 상태에서 베풀어지는 것일 수 없고, 공의와 그로 말미암은 정죄라고 하는 상대적 개념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렇게 될 때라야 만이 비로소 은혜의 진정한 가치와 능력도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게 되는 법입니다. 이 사실은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라고 외친 데서도 명확합니다.

셋째, 이제 마지막으로 “… 또한 오직 그분께만 드려야 할 경배와 영광을 다른 자나 다른 것에게 돌리는 것입니다”라고 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히 우상숭배라고 하는 그림만을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네가 행하고 있는 신학의 목적과 내용의 건전성을 돌아보게 하는 좀 더 깊은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건전한 신학이란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목적을 지향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그러한 내용을 구성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에게 중심을 두는 신학은 이미 건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실로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 사상과 그것의 실제적인 구현이 결여 되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앙이 되지 못하고 단지 신학에 머물러 버릴 수밖에 없어서 스콜라주의(지식주의)가 되고 맙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제47신앙고백문답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입술로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되어야 하고, 그렇게 고백하는 바의 진실성에 따라 실제적인 경배를 드림으로써 영화롭게 해드려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경배와 영광을 다른 자나 다른 곳에 돌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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