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30일(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50문답

[질문] 제2계명에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제2계명이 명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정하여 주신 그 모든 경건한 예배와 규례를 받아들이고 행하며 순전하고 온전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신 12:32; 32:46; 마 28:20; 행 2:42).

제2계명에 따른 올바른 예배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정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 올리는 예배의 합당한 원리 방법이 성경에 계시되어 있지 않았다고 가정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 예상되는 혼란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여서, 아마도 오만 가지 예배법들이 난무하여 마치 ‘예배의 홍수’에 빠져 죽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합당한 예배법이란 반드시 성경에 기초해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 모든 경건한 예배와 규례’라고 한 부분인데, 이것은 앞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장시킨 경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종교개혁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지독한 미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배를 미사라고 하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로 명백히 변질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가대를 운영함으로써 잘못된 찬송을 도입했고, 기타 조잡하기 짝이 없는 형상숭배와 조상숭배들도 도입했습니다.

끝으로, ‘순전하고 온전하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먼저, 예배는 순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배의 동기부터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올리는 순수한 경배’여야 합니다. 가령, 하나님의 호의를 사겠다는 의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는 예배를 일종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단순히 잘못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시는 우상숭배 죄로 명백히 빠져버린 것임에 다름이 아니게 됩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겠다는 동기로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정신에 사로잡히는 데서 예배의 양적인 증가나 예배 자체에 무슨 가치를 더하는 그러한 방식들을 고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상기한 원리를 고려할 때에, 오늘날 예배를 마치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여하튼 간에 치러야 하는 순서처럼 생각한다거나 그렇게 하는 데서 초래될 수밖에 없는 온갖 가지 그릇된 예배의 모습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 유난히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조상숭배 사상에 의한 차례 지내기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사실 차례를 지내는 사람으로서 얼마만큼이나 진실된 신앙(?)으로 조상을 숭배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죽은 조상의 영혼이 계속 살아 있으면서 자신들의 생활에 길흉화복의 원인으로 역사한다는 사상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에 대해서는 자신들도 충분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소위 체면을 생각한다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마지 못해서 차례를 드리기 때문에 형식주의로 일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러한 차원의 연장선상의 예배란 사실은 무서운 죄악이라 하는 말입니다.

또한 예배를 자신의 종교감정을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삼는 현상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번지기 시작한 소위 ‘찬양과 경배’라는 형식이 이제는 의례껏 정당한 예배의 모습인양 교회들 속에 자리잡아 버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드럼이나 기타 같은 악기들이 동원되고, 춤사위가 벌어지고, 두 손을 위로 치켜든 채 눈을 지긋이 감고 스스로 무아지경을 자아내는 그런 모습이 연출됩니다.

그러면 긍정적인 대안으로 돌아와서, 제50문답에 따른 예배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먼저, 예배 순서의 획일화 또는 통일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의 원리와 정신이 살아 있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의 순서의 불일치 또는 순서의 다양성은 수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고백하고 있듯이 ‘선하고 필요한 중대성에 의한(by good and necessary consequence)’(제1장 6조) 원리를 따라, 예배를 위해 필요한 어떤 실제들을 끌어내거나 추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의 요소들과 환경들 사이의 조화 문제입니다. 예배의 요소들은 예배 내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환경들이란 행해지고 있는 예배를 둘러싸고 있거나 또는 관련되어 있는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이 둘 간에 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배의 요소와 순서 및 방법 등을 생각할 때에 중요한 핵심은 ‘언약의 원리’를 따른다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에 응답하고 반응하는 방식 말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예배에 관한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라고 합니다. 이 원리는 종교개혁 당시 개혁교회가 로마 카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는 개혁의 선봉 노릇을 한 루터파 교회와도 구별되는 주요 원리가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경에 명령된 것에다 교회가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더하거나 빼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루터파 교회는 성경이 뚜렷하게 금지하고만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락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정확하게 명령하신 계시에 따라서만 예배 드려야 하고,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 외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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