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31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7문답

[질문] 신자가 죽을 때에 그리스도에게서 무슨 유익을 받습니까? [대답] 신자는 죽을 때에 그의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히 12:23) 즉시 영광에 들어가고(시 73:24-25; 눅 16:22-23; 23:43; 고후 5:6, 8; 빌 1:23), 그의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살전 4:14)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서 쉽니다(욥 19:26-27; 사 57:1-2; 단 12:2; 요 5:28-29; 행 24:15).

제37문답은 인생사에서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룹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외이지만 말입니다. 곧 죽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인생의 역사만큼이나 사람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히 2:15)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 가령 플라톤은 사람의 최고선(the chief good)은 신과의 연합이라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럴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진리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성도는 죽을 때 영혼과 육체가 분리됩니다. 육체는 땅에 묻혀 썩겠지만, 영혼은 영광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한 가지 성도의 의식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데 대해서는 공통적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해해야 할 것은 성도는 죽는 즉시 자신의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간다는 데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의 강도에게 하신 말씀(눅 23:43), 그리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라고 기도한 스데반의 경우에서, 그리고 빌립보서 1:23과 요한계시록 6:9-10을 통해서 정확하게 진술되었습니다.

먼저 성도의 죽음은 죄값을 치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즉 성도들의 경우에서의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으로 하나님의 저주 아래 죽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 6:23), 그러나 성도의 죗값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님에 의해 이미 치러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에서의 대속적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삯’ 또는 ‘대가’를 만족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음은 자신의 죄에 대한 징계일 수 없습니다. 진실로 그에게 속해 있는 모든 죗값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두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저주로 연상되는 것이로되,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신 분의 죽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저주로서의 죽음은 어떤 성도들에게도 관계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실로 바울은 감격에 겨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도다”(갈 3:13)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믿는 자들의 죽음은 그의 영혼이 천국으로 인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하이델베르크 제42문답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 우리도 왜 여전히 죽어야 합니까”라고 물은 후 “우리의 죽음은 자기 죄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며, 단지 죄짓는 것을 그치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실로 육체적 죽음에 의해 성도는 이 죄된 세상과 죄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영광으로 옮겨집니다. 성경은 성도가 죽음을 통해 육체를 떠나는 것에 대해 주님과 함께 거한다는 의미이고(고후 5:6-8), 따라서 죽는 것은 성도에게 유익이라고 확실하게 가르칩니다(빌 1:21).

그러므로 사람이 죽게 되면 그의 영혼은 죽은 육체와 함께 무덤 속에서 ‘잔다(sleeps)’라고 가르치는 제7일 안식교를 비롯하여 그와 비슷한 여호와 증인 여타 다른 종교집단들의 가르침을 철저히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은 자신 쓴 첫 번째 책에서 당시 유행하던 ‘영혼 수면설’의 오류를 성경에 근거하여 확실하게 배척했습니다. 영혼수면설의 배후에는 영혼멸절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존재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진리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우리는 성도이므로 죽음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에 들어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실제로는 축복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죄된 육체의 상태로서 영원히 살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도다! 지금과도 같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실 지옥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 그 자체만의 모습으로서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에게서의 죽음의 실상이 상기한 바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성도는 육체적으로는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다음 세대들이 계속 지상에서 살게 될 것인데,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때에는 그들은 죽음을 겪을 필요가 없을 것이고 다만 죽음을 통과한 자의 모습으로 홀연히 변화되기만 할 것입니다. 아마도 지금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면 우리부터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살전 4:17).

결론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여 영생의 부활을 향해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이라면 진정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니 칼빈에 의하면 이 목표를 갈망하지 않는 것은 태만의 죄이기까지 합니다. “... 실로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말못하는 피조물들까지도 새롭게 되기를 갈망하니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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