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4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6문답

[질문]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대답]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롬 5:5; 8:35, 38-39) 양심의 평안과(롬 5:1) 성신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롬 14:17) 은혜의 많아짐과(잠 4:18; 벧후 3:18)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것(견인)입니다(렘 32:40; 요 10:28-29; 빌 1:6; 벧전 1:5; 요일 5:13).

제36문답의 주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끝 부분에서 “...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라고 한 것이 더욱 그러한데, 사실 성도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렇게 끝까지 견딘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견딜 수 있게끔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견인 교리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도르트 회의가 작성한 칼빈주의 5대교리 중의 하나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제17장에서 3개조를 통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해 놓았습니다.  다소 특이한 것은 대신앙고백문답에서는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제79문답 같은 곳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는 다루었습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고, 따라서 “그것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이생의 유익”을 누리는 권리를 소유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는 사랑에 따른 것으로, 사실상 ‘은혜 언약’의 핵심 사상이기도 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다거나 그처럼 받은 구원을 중도에 상실함이 없이 안전하게 영화의 단계까지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도 자신이 발휘해내는 의지랄까, 계획이랄까, 능력이랄까 여하튼 이런 데만 달려 있지는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베푸시는 은혜 언약에 따른 것이고, 성도가 자신의 생애 속에서 이것을 실제적으로 누리게 되는 모든 현실에 대해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로써 설명하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과 그들에게 견인을 주시려는 작정과 언약, 그로 말미암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떨어질 수 없는 연합,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천상의 보좌에서의 하나님께 올리는 끊임없는 간구로 말미암아 한 번 받은 영단번의 구원에서 결코 이탈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견인의 역사가 경험적 차원에서는 성도에게 어떻게 작용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신의 신비한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즉 성신께서는 성도 속에 거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공효가 끊임없이 약동케 해주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신님의 사역으로 인하여, 성도는 궁극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타락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안잔하게 보존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그로 말미암은 양심의 평안을 누리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큰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도는 구원의 확신을 누리는 가운데서도 때로는 많은 혈기와 죄와 유혹에 빠져 성도로서의 생명력이 약해지기도 하고, 심하면 아예 없는 것같은 상태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 되지는 않고,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내포하고 있는 원리(은혜 언약)와 효력(성신의 역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까지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바대로, 성신께서 성도와 늘 함께 하시면서 지키시기 때문에, 어느 순간엔가 다시금 침체를 벗어버리고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성도란 모름지기 ‘은혜 가운데서 끝까지 견딘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현실화시켜 보자면, 은혜를 의지하여 끝까지 분투하고 투쟁한다는 의미이겠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자동적으로 되어지는 일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도는 자신의 의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일종의 꼭두각시 밖에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만의 의지와 노력에만 맡겨질 수 없는 것은 그럴경우 백전백패하리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성신께서 단순히 도우신다는 정도로 이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또 다시 기독교의 신비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성신께서는 항상 ‘자기 은닉적’으로 역사하셔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느낄 수 없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실례를 들어봅시다. 한 일꾼이 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자갈 투성이라서 씨앗을 뿌릴 수 있을 만큼 깊이 파서 옥토를 만드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이때 성신께서 일꾼보다 몇 발자국 앞에서 먼저 일구어 놓은 후 살짝 덮어놓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꾼은 신기하게도 밭이 잘 일구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절로 힘이 나 더더욱 열심히 일구어 나갑니다. 그러한 중에 나름 힘든 곳과 조우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해나온 실력이 관성의 법칙과도 같이 작용하여 결국에는 딛고 전진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정리해봅시다. 성도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양자로 입양되고, 거룩해진 신분을 이 땅에서 누리는 존재들입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양심에 평안이 깃들고, 성신으로 말미암은 기쁨으로 충만하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때로는 환난에도 직면케 되지만, 능히 인내에 인내를 거듭함으로써 연단을 이루어 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개인적인 도덕성 함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는 데 이바지 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또한 그래야만 성신의 역사에 성립된 증거가 되는 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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