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0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4문답

[질문] 양자로 삼으심이 무엇입니까? [대답] 양자로 삼으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이고(요일 3:1),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 들게 되고 자녀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출 4:22; 요 1:12; 롬 8:15-17).

제34문답의 핵심 단어는 ‘양자(養子)’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함축하고 있는 부요함과 영광은 상당히 다양하지만 그 중에 ‘양자 입양 사상’은 가히 압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최인호의 ‘지구인’이라는 책에 보면 “그가 신부의 주선으로 새로운 집으로 양자로 입양될 때부터 그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 앞에 떳떳하게 내세울 수는 있는 성씨 하나를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처럼 양자는 혈연적으로 부모자식 관계가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법률적으로 자식의 자격을 얻은 자를 일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 입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는 이 사실은 여타의 종교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탁월한 축복입니다. 물론 이 양자됨은 신분 취득과 그로 말미암은 특혜 획득에 핵심이 있는 것이지, 실제적인 하나님의 신성을 공유하게 되는 차원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해두어야겠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의 이 양자 입양 사상은 상당히 오랜 동안의 계시 체계를 형성해 나왔습니다. 가령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로 여겨졌습니다(렘 3:1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라고 말씀하셨고(출 4:22), 이스라엘은 피투성이가 되어 버려진 아이를 데려와서 키운 입양아로 묘사되었습니다(겔 16:6-7).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관계를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다”(호 11:1)라고 말함으로써 ‘입양의 관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게서 다윗 가문과 맺은 언약에서도 보면 ‘입양’이라는 은유가 사용됩니다. “나는 그(다윗의 후손)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삼하 7:1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아들로 입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들로 삼으셨음에 대해 찬양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라고 선언하시자, 다윗은 “주는 나의 아버지요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시 89:26)라고 화답한 것입니다. 이상의 표현들은 이스라엘 나라에 등장하는 열왕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친히 아들을 삼았다는 것으로, 비롯 언약의 원조 다윗이 죽고 난 뒤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그의 자녀들을 돌보시고 키우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시겠다는 데 대한 강조입니다. 이처럼 구약은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들의 관계로, 즉 양자 입양의 이미지로 서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속사 속에서 부단히 계승되어져 나온 양자 입양 사상은 마침내 참 다윗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의 주가 되심에 따라, 이제 성도들 개개인에게 매우 구체적으로 정용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마울은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변하는 양자 입양을 선포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돌립니다(갈 4:1). 헬라 로마 세계에서 입양되는 자녀는 원래이 친자식이 갖는 권리와 동일한 법적인 지위와 특권을 누렸고, 그에 따라 양부의 재산과 소유를 상속받는 상속자로서의 지위와 권리를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자녀로 입양된다는 것은 이전의 소속과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소속의 일원이 되어 그에 부합한 신분과 권리와 의무를 다 소유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상기한 사실을 전제하면서 이제 신앙고백문답이 고백하는 양자 입양 사상을 두 가지 핵심 사항으로 정리해보자면, 첫째, “양자로 삼으심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인데, 둘째, 이로써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의 수에 들게 되고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는 것 이상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증거하는 것은 없다(요일 3:1)”라고 외쳤습니다. 계속 덧붙이기를 “더욱이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므로(딤후 2:13), 우리를 육신의 부모 이상으로 사랑하신다(시 27:10; 사 49:15; 63:16; 마 7:11)”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루어진 양자 입양의 확실성을 위해서 그의 성신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담대한 믿음으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주십니다(롬 8:15; 갈 4:6). 이때 성도는 각각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개인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이것은 실로 하나님은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므로(마 23:9), 하나님의 자녀들 간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진심으로 나누는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서 ‘독생자의 충만’이 실현됩니다. 즉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23)라고 한 바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당신은 지금 바로 앞뒤에, 또는 좌우에 있는 형제 자매들을 혈육의 관계 이상의 실제성과 친밀함으로 대하고 있습니까?  자신에 대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여긴다면,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Posted in 오늘의 신앙고백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