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24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32문답

[질문]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무슨 유익을 얻습니까? [대답]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삶에서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입양됨과 거룩하게 하심을 얻고, 또한 그것들과 함께 오거나 그것들에서 나오는 제반 유익을 얻습니다(롬 8:30; 고전 1:30; 6:11; 엡 1:5).

지난 제31문답에서는 효력 있는 부르심이란 간단히 말해서 소명이로되, 성신에 의한 유효적 소명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제32문답은 ‘유익’이 주제입니다. 성신에 의한 유효한 소명은 기본적으로 성도의 생명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키시는 것인데, 따라서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구속의 공효를 덧입게 됩니다.

제32문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공효에 대해 ‘칭의’, ‘양자 입양’, ‘성화’ 등의 세 가지 신학적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하이델베르크 제51문답의 경우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라고 물은 후 “첫째, 그리스도는 성신으로 그의 지체인 우리에게 하늘의 은사를 부어 주십니다(행 2:33; 엡 4:8, 10-12). 둘째, 그는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고 보존하십니다(시 2:9; 시 110:1-2; 요 10:28; 계 12:5). ”라고 대답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자 하는 것은 ‘거룩하게 하심을 얻고’라고 한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로는 ‘성화’입니다. 첫째, 성도의 성화는 칭의의 경우처럼 단 번에 이루어집니다. 성도에게 이루어진 칭의가 어떠한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이루어진 거룩함도 어떠한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앞에 고백된 ‘양자 입양’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성화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에 약간 혼란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성화의 과정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도에게서 진행되는 성화가 세상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일반적인 ‘도덕주의’와 다른 것은, 성도의 성화에는 기독교적인 용어들이 따라붙는다는 그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실제로’ 성도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화 역시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지, 사람 편에서 성취한 도덕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유념해야 합니다. 물론 사람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능력이 실제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성화를 성취하고 있다’라는 인정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도의 성화나 도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옷입혀지지 않는 한, 그 자체로는 여전히 전적 타락에서 나오는 그러한 것들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개혁자들은 이것을 ‘이중 은혜’라고 하는 관점에서 옳게 파악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살이에서 성화를 이루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이를 받아주시는 것에 대해, ‘또 하나의 칭의’라고 본 것입니다. 물론 이 두 번째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영단번에 일어나는 ‘이신칭의’ 그 자체는 아니고, 그보다는 첫 번째 칭의가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전제 하에 주어지는 칭의입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성도의 거룩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연합된 자로서, 그러한 생명을 자기 속에서 활성화시켜 주시는 성신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의로 여겨주시는데, 그러한 차원에서의 이중 은혜 또는 이중 칭의이다 하는 말입니다.

성화의 개념을 이렇게 올바르게 파악하게 되면, 항간에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운영하고 있는 소위 ‘성인 제도’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네들은 순교자들이나 특별한 신앙적 공로를 쌓은 사람들에게 ‘성인 칭호’를 부여하고, 역사적으로 길이길이 섬깁니다. 심지어 성인들이 취득한 공로에 대해 잉여 공로처럼 여겨, 그것을 넘겨 받을 수 있도록 의지하게까지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성화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가납해 주시는 데서 성립되는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없이 그 자체만으로는 여전히 썩은 하수구나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항간에 개신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특정인을 드높이고 그가 일반인들보다 더 뛰어난 성인인양 드높이고 떠받드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대로 성화를 이중 은혜 차원에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성도에게 베풀어진 영단번의 칭의와 영단번의 성화는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뗄레야 땔 수 없는 관계를 이루면서 상호 진위성을 보증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의롭게 된 자이기에 성화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고,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을 보니 의롭다 함을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 그 자체를 칭의의 근거로 삼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화의 능력이 수반되지 않는 신앙주의 그 자체는 명백히 구원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도다”(고전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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