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8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18문답 묵상2018년

[질문] 사람이 그 타락한 처지에서 죄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 사람이 그 타락한 처지에서 죄 되는 것은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과(롬 5:12) 원시의가 없는 것과(롬 3:10; 골 3:10; 엡 4:24) 온 성품이 부패한 것인데(시 51:5; 렘 13:23; 렘 17:9-10; 요 3:6; 롬 3:18; 8:7-8; 엡 2:3), 이것이 보통 원죄라 하는 것이고, 아울러 이 죄로 말미암아 나오는 모든 자범죄입니다(창 6:5; 시 53:1-3; 마 15:19; 롬 3:10-18, 23; 갈 5:19-21; 약 1:14-15).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제18문답은 아담에게서 원죄를 물려 받았다는 사실을 규정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아담이 지은 원죄와 그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빠져들게 된 자범죄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귀가 따거울 정도로 자주 듣습니다. 너무 자주 듣게 되면,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무뎌지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겠지만,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을 감수하면서까지라도 이 이야기는 거듭거듭 신앙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했듯이(롬 5:20), 죄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어야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얼마나 귀하고 귀한 분이신가에 대해서도 더더욱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원죄는 우리에게 두 가지 요소로 임해 있습니다. 죄책과 부패인데, 죄책은 우리에게 전가(impute)된 것이고, 부패는 인간의 생육 관계를 통해서 전달(convey)됩니다. 이 둘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의 관계와도 같아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원죄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산물인 자범죄를 통해서입니다. 즉 누군가가 그렇게도 애를 쓰고 또 애를 씀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죄에 빠지곤 하는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원죄를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의 영역에서 원죄와 자범죄의 동일성 관계는 마치 칭의와 성화의 동일성의 관계와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자신에게 이루어진 칭의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결코 독립적으로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칭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로의 신비적 연합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약동하기 마련인데, 바로 이 새 생명을 따라 사는 데서 통상 일컬어지는 성화가 전개되는 것입니다. 즉 성도가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동시에 칭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칭의와 성화 역시 동전의 양면의 관계처럼 결코 독립적으로 분리해서는 다룰 수 없는 주제입니다. 그처럼 원죄와 자범죄도 같은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원죄는 향후 인간에게 자행되는 모든 자범죄들의 근원이요 뿌리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하게 전제해 두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아주 선하게 지으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자신의 죄성을 들어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죄를 짓는 인간은 자신의 죄에 대해, 자기 자신이 창조자임을 깨닫고 스스로를 비난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고 구질구질한 변명을 늘어놓기 마련인데, 바로 이 사실 역시 인간이 죄인이라는 데 대한 반증입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가 했던 변명을 기억하십니까?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했습니다. 이는 아담이 자신이 지은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린 것이로되, 직접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까, 하와를 걸고 넘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은 후로도 항상 자신을 옹호하고 변명하는데 급급할 뿐이고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범죄했을 때, 그로 말미암은 부패성은 아담만 채우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향후 그를 통해서 태어나는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기 위하여 모태에 잉태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부패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5:12-21에서 아담의 한 가지 죄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고,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의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의인이 되었다는 그 유명한 대표자 논증을 전개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은 자범죄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악한 행동만 한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람이 보기에 선한 것같은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가령, 의사로서 무료 봉사도 나가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돈을 기부하기도 하고, 더불어 사는 공익 사회를 위한 시민 운동을 하고 기타 등등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빈이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그러한 사람들의 소위 ‘선한 일들’은 여전히 ‘악한 마음’에서 나온 것들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눈 앞에서는 결코 선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연인이 행하는 ‘선행’과 ‘친절’은 결코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는 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돌아오는 칭찬과 선망을 위해 소위 자기들 방식대로의 의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덧붙여 알아 두어야 할 것은 그들은 대체적으로 기타 여러 가지 숨은 상태의 은밀한 죄들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예외 없이 아담의 원죄를 지고 있고, 그로 말미암아 부패한 상태로서 살아가고, 그래서 오만가지 범죄의 공장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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