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1일 (SUNDAY)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문답 제017문답 묵상2018년

[질문]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어떠한 처지로 떨어지게 되었습니까? [대답]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와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창 3:16-19, 23; 롬 3:16-17; 5:12; 엡 2:1).

오늘날 세계의 문명은 눈부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역사가들이 이구동성으로 동의하듯이 그 동안의 모든 발전을 다 합쳐놓아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급진적인 발전이 최근 100여년 사이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비행기의 발명과 그것의 보편적인 이용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륙간의 거리감이 무너졌고, 전파의 발달 역시 아무리 먼 거리의 사람끼리도 마치 눈 앞에 있듯이 마주 보면서 대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술의 폭넓은 발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삶의 질이 높아지는 형편과 맞물려 인간 수명이 늘어나기도 했지만, 이에는 웬만한 질병은 쉽고 빨리 고칠 수 있게 된 의술의 발달도 한 몫을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인간은 정말 행복해진 것입니까? 오래 살면 행복한 것입니까? 결코 아닌 것입니다. 어떤 개혁자는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빼면 바로 그 자체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행복한듯이 착각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전히 궁극적인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에 사형이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사형수가 있다고 봅시다. 사형 판결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반드시 집행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경우 삶이란 것이 의미가 있기나 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어떤 사형수는 태평하게 아무렇지도 않듯이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사형 집행이 오랜 동안 지체되자 아마도 면역성이 생겼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조용히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간은 사실상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임에 다름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것은 결국에는 자신에게도 닥치고야 말 것이고, 그것도 부지불식간에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면 어떤 형편으로 살건 간에 결국은 죽고야 맙니다. 사실 이 땅에서 인간이 겪는 다양한 불행들은, 본래 인간이란 그러한 불행 끝에 결국에는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숱한 천상의 메시지들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행들은 우선 보기에는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타락해 있다는 데서 원인을 찾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은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어떠한 처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이고, 대답으로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와 비참한 처지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죄’는 원죄와 자범죄 둘 다 포함한 것이고, 비참한 처지란 그러한 죄가 초래하는 인간의 다양한 불행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음을 겪게 하신 것은 그의 죄가 그만큼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당시 아담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 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하고, 따라서 복종심을 시험받기 위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의 죄의 실체는 단순히 ‘탐욕에 의한 무절제’였을 수는 없고,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린 것이므로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교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에 따라 어거스틴(Augustine)은 “교만이 모든 악의 시작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사람이 자기를 알아야 한다고 옛적 격언(proverb)이 역설한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라면서, “인생사에서 자기를 모르기 때문에 필요한 일을 결정할 때 비참한 자기기만에 빠지고 심지어는 눈 뜬 소경이 된다는 것은 더욱 혐오스러운 일이 아닌가?”라고 탄식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미래가 어떤 필연에 직면케 되어 있는가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두 가지가 확실해야 합니다. 첫째, 창조시에 인간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창 1:27), 동물과 구별되는 거룩하고 정직한 생활로써 복된 영생을 향하여 매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둘째, 아담의 타락 이후에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근원이 되어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감과 불쾌감과 더불어 겸손이 생기고, 그리하여 잃어버린 선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찾겠다는 열성의 불길이 일어나게 됩니다.

베르나르(Bernard, 1090-1153)가 한 말을 인용함으로써 마감하겠습니다. “그때에 사탄에게 귀를 열어주었기 때문에 죽음이 용인된 것과 같이(렘 9:21), 오늘날 우리가 동일한 출입구로써 복음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에게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참으로 모든 정욕을 억제하는 가장 좋은 두 가지 굴레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꼭 붙잡아야 하고, 다음으로 “행복한 생활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Posted in 오늘의 신앙고백묵상.